제주 4·3사건 69주년···사진으로 보는 그 날
[경향신문] 노도현 기자 | 수정 : 2017-04-03 19:50:48 | 입력 : 2017-04-03 16:56:00
3일은 제주 4·3사건이 69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군사정권 시절 제주 4·3 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됐습니다.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4·3 사건에 대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밝혔습니다. 희생된 주민은 2만5000~3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경향신문 향이네가 69년 전 그날을 사진과 함께 정리했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한 어린이가 기마경관이 탄 말에 치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군중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경찰서까지 쫓아갔습니다.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총을 들었습니다. 경찰의 발포에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3·1절 발포사건’은 4·3사건의 도화선이 됩니다.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대규모 민·관 총파업에 참여했습니다. 미 군정은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경찰은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벌여 한 달 만에 500여 명을 체포했고, 1년 동안 2,500명을 구금시켰습니다.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도 잇따랐습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했습니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 군정 경무부는 “공산계열의 파괴적, 반민족적 분자들의 지도로 총기, 수류탄, 그 외 흉기를 가진 무뢰배들이 작당하여 경찰관서, 기타 관공서 습격, 경찰관과 그 가족의 살해, 선량한 동포 살해, 방화 폭행과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벌어졌습니다. 제주도의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가 투표소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습니다.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지역이 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4·3 사건은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해 10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나섰습니다. 같은 달 19일 여수 주둔 국방 경비대 14연대가 4·3사건 진압을 위한 파견명령에 반발해 봉기했습니다. 이들이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 등 피해를 보는데, 이것이 바로 ‘여순사건’입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이후 1954년 9월 한라산 전면 입산 통제를 해제할 때까지 제주도에서 대규모 진압작전이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양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참고자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이후 수십 년간 제주 4·3사건은 ‘폭동’으로 불렸습니다. 실제로 전두환 정부 때 4차 교과서는 4·3사건을 ‘제주도 폭동 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서술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민사회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관련 서적과 증언,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 정부와 미 군정의 강경 진압에 초점을 맞춰 4·3사건을 민중항쟁, 민주화운동 등으로 규정했습니다.
정부 차원의 명예회복도 꾸준히 이뤄졌습니다. 2000년 국민화합 차원에서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해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습니다. 이후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출범해 본격적인 진상조사에 나섰습니다.
2003년 5월 진상규명위는 진상보고서를 내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직접적 원인으로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제주사회의 긴장 상황을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해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시발”이라고 설명했습니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4·3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으로 사과했습니다. 2014년 3월 박근혜 정부는 ‘4·3 희생자 추념일’을 신규 지정했습니다. 같은 해 4월 3일 열린 추념식에는 여야 정당 대표를 비롯해 희생자 유족과 시민 1만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 3일이 찾아왔습니다. 최근 제주도교육청이 4·3사건의 의미를 축소 서술한 국정 역사교과서에 맞서 자체적으로 4·3사건 관련 교재를 개발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보도됐습니다. 4·3사건 당시 주민 11명이 피신했다 집단희생을 당한 장소인 다랑쉬굴 등 4·3사건 유적지들이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방치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 [관련기사] 제주, 국정교과서 4.3왜곡 자체 교재로 맞선다…제작완료 학교보급
▶ [관련기사] 불탄 집터엔 풀만 무성…방치된 제주 4·3유적지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비(白碑)가 누워있습니다. 4·3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이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봉기도 항쟁도 아닌 ‘사건’으로 임시 규정된 4·3사건이 역사적 이름을 얻는 날, 비석에는 비문이 새겨질 것입니다.
출처 [정리뉴스] 제주 4·3사건 69주년···사진으로 보는 그 날
[경향신문] 노도현 기자 | 수정 : 2017-04-03 19:50:48 | 입력 : 2017-04-03 16:56:00
3일은 제주 4·3사건이 69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군사정권 시절 제주 4·3 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정의됐습니다.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4·3 사건에 대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밝혔습니다. 희생된 주민은 2만5000~3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경향신문 향이네가 69년 전 그날을 사진과 함께 정리했습니다.
▲ 제주 4.3사건으로 희생된 가족의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 ⓒ격동 한반도 새 지평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한 어린이가 기마경관이 탄 말에 치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군중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며 경찰서까지 쫓아갔습니다.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총을 들었습니다. 경찰의 발포에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3·1절 발포사건’은 4·3사건의 도화선이 됩니다.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대규모 민·관 총파업에 참여했습니다. 미 군정은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경찰은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벌여 한 달 만에 500여 명을 체포했고, 1년 동안 2,500명을 구금시켰습니다.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도 잇따랐습니다.
▲ 제주 4.3 연구소 현장 조사반이 4.3사건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골 11구가 발견된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남서쪽 6km 지점 다랑쉬굴 내부를 조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했습니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 군정 경무부는 “공산계열의 파괴적, 반민족적 분자들의 지도로 총기, 수류탄, 그 외 흉기를 가진 무뢰배들이 작당하여 경찰관서, 기타 관공서 습격, 경찰관과 그 가족의 살해, 선량한 동포 살해, 방화 폭행과 약탈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벌어졌습니다. 제주도의 3개 선거구 가운데 2개 선거구가 투표소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습니다.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지역이 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4·3 사건은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해 10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나섰습니다. 같은 달 19일 여수 주둔 국방 경비대 14연대가 4·3사건 진압을 위한 파견명령에 반발해 봉기했습니다. 이들이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 명이 학살 등 피해를 보는데, 이것이 바로 ‘여순사건’입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이후 1954년 9월 한라산 전면 입산 통제를 해제할 때까지 제주도에서 대규모 진압작전이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양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참고자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 선천에서 체포한 반란군을 트럭에 태우고 있는 모습. ⓒ격동 한반도 새 지평
이후 수십 년간 제주 4·3사건은 ‘폭동’으로 불렸습니다. 실제로 전두환 정부 때 4차 교과서는 4·3사건을 ‘제주도 폭동 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서술했습니다.
▲ 제주 4.3사건 당시인 1949년 2월 2연대 특공대 장병들이 무장대로 가장했다. 당시 토벌에 나선 군인들이 무장대로 변장해 주민들의 사상을 검열한 사실이 확인됐다. 왼쪽 아래에 ‘폭도로 가장코’라는 설명이 뚜렷하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공
▲ 1952년 7월 3일 이승만이 미8군 사령관인 밴 플리트 대장과 제1 훈련소장인 장도영 준장과 함께 군 지프를 타고 제주도를 순시하고 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공
1980년대 후반부터 시민사회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관련 서적과 증언,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 정부와 미 군정의 강경 진압에 초점을 맞춰 4·3사건을 민중항쟁, 민주화운동 등으로 규정했습니다.
정부 차원의 명예회복도 꾸준히 이뤄졌습니다. 2000년 국민화합 차원에서 진상규명과 보상을 위해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습니다. 이후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출범해 본격적인 진상조사에 나섰습니다.
▲ 1994년 4월 3일 제주시 탑동 해변 광장에서 도민과 학생 등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3년 5월 진상규명위는 진상보고서를 내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연계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직접적 원인으로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제주사회의 긴장 상황을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접목해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시발”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비극과 고통의 상징인 ‘무명천 할머니’ 진아영 씨의 생전 모습. 진 할머니는 경찰이 쏜 총탄에 턱을 잃고 이렇게 천으로 턱을 두른 채 55년을 살다가 2004년 9월 9일 오전 타계했다. ⓒ연합뉴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4·3사건과 관련해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잘못을 공식으로 사과했습니다. 2014년 3월 박근혜 정부는 ‘4·3 희생자 추념일’을 신규 지정했습니다. 같은 해 4월 3일 열린 추념식에는 여야 정당 대표를 비롯해 희생자 유족과 시민 1만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 제주 다랑쉬굴은 4·3사건 당시 주민 11명이 집단희생을 당한 곳이지만 현재 안내판만 있을 뿐 입구는 수풀에 가려 흔적도 찾기 힘들다. 박미라 기자
올해도 어김없이 4월 3일이 찾아왔습니다. 최근 제주도교육청이 4·3사건의 의미를 축소 서술한 국정 역사교과서에 맞서 자체적으로 4·3사건 관련 교재를 개발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보도됐습니다. 4·3사건 당시 주민 11명이 피신했다 집단희생을 당한 장소인 다랑쉬굴 등 4·3사건 유적지들이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방치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 [관련기사] 제주, 국정교과서 4.3왜곡 자체 교재로 맞선다…제작완료 학교보급
▶ [관련기사] 불탄 집터엔 풀만 무성…방치된 제주 4·3유적지
▲ 4·3사건 때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가량 집단으로 은신 생활을 했던 천연동굴인 동광 큰넓궤 입구. 박미라 기자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비(白碑)가 누워있습니다. 4·3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이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봉기도 항쟁도 아닌 ‘사건’으로 임시 규정된 4·3사건이 역사적 이름을 얻는 날, 비석에는 비문이 새겨질 것입니다.
출처 [정리뉴스] 제주 4·3사건 69주년···사진으로 보는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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