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94주기
과거를 기억하자는 이들과 지우자는 이들
[경향신문] 글·사진 도쿄|김진우 특파원 | 입력 : 2017.09.01 17:19:00
늦여름 뙤약볕이 내리 쬐는 1일 오전 11시. 도쿄 스미다(墨田)구 도립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은 무거운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공원 입구에는 ‘고이케 지사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책동을 그만하라’ 등의 글이 쓰인 손팻말을 든 시민들이 서 있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과 도쿄도청 공무원들이 공원 안팎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요코아미초 공원은 94년 전인 1923년 일본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를 강타한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피난 온 시민들이 화염 돌풍에 휘말려 3만8000명이 희생됐다는 곳이다. 희생자를 기리는 도쿄도위령당(慰靈堂)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방화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자 일본인 자경단, 경찰, 군인 등이 재일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이 추모비 앞에선 매년 9월 1일 일·조(日·朝)협회 등 일본 시민단체들이 주관해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을 열었다. 올해로 44년째다.
하지만 이번 추도식은 좀 달랐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 지사는 전례를 깨고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스미다 구청장도 이에 동조해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조선인 학살 사실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비등했다. 여기에 편승해 추도식이 열리는 같은 시간 극우단체인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 관련 그룹은 ‘맞불’ 추도식을 열겠다고 예고했다.
실제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서 있는 곳에서 1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진실의 간토대지진 이시하라(石原) 희생자 위령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조선인 6,000명 학살이 사실인가. 일본인의 명예를 지키자’ 등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일본 극우들은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 적힌 ‘희생자 수 6,000여 명’이 근거가 희박하다면서 학살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 하고 있다.
주최 측은 추도사에서 “지금은 역사전쟁의 시기”라면서 “중국 난징대학살, 위안부 강제연행,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까지 하지도 않은 일로 일본인이 비난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행사가 시작되기 전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항의하면서 경찰과 짧은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20명 정도가 참여한 ‘맞불 집회’는 반향을 얻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날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는 예년보다 많은 500여 명이 참여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관련 뉴스를 보고 추도식에 처음 참석했다는 한 50대 여성은 “이번 일은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눈으로 봤다는 사람이 있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 눈을 감는 것은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머는 것’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손수 만들어왔다.
추도식 현장은 숙연했다.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경문 낭독과 진혼무가 이어졌다. ‘조선인 학살 국가 책임을 묻는 모임’ 사무국장인 다나카 마사타카(田中正敬)센슈대 교수는 보내온 추도문에서 “일본은 배외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을 걸어왔다”면서 “과거에서 배워 미래로 나가기 위해선 희생자를 마주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일본에서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는 ‘역사 지우기’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숫자를 삭제하거나 관련 사실을 두루뭉술하게 기술하는 교과서가 늘고 있다. 도쿄도교육위원회는 2013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 대해 ‘대지진의 혼란 속에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됐다’고 기술돼 있는 도교 도립고교용 일본사 부교재의 표현을 ‘조선인이 귀중한 생명을 빼앗겼다’로 바꿨다. 군마현 의회는 도내에 있는 조선인 징용 희생자 추도비 철거를 결의했다. 일조협회 고지마 스스무(小島晉) 스미다구 지부장은 “지진 희생자와 사람 손에 학살된 희생자가 다르지 않으냐”면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고 재발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날 행사는 희생자에 대해 1분 간 묵도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행사가 끝난 뒤에도 추도비 앞에는 헌화하려는 시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미야카와 야스히코(宮川泰彦) 추도식 실행위원장은 “망각은 또다시 악몽을 났는다. 비참한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역사적 사실을 계속 전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학살의 역사적 사실, 그리고 가해의 역사를 은폐하고 싶어하는 권력을 고발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9월 1일은 바로 그런 날이다.
출처 [현장에서] 간토 조선인 학살 94주기...과거를 기억하자는 이들과 지우자는 이들
과거를 기억하자는 이들과 지우자는 이들
[경향신문] 글·사진 도쿄|김진우 특파원 | 입력 : 2017.09.01 17:19:00
▲ 일본 간토대지진 94주년인 1일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 내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열린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위령비에 헌화하고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 일본 간토대지진 94주기인 1일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올해 처음 참가했다는 일본 여성이 ‘과거에 눈을 감는 것은 현재에도 눈이 머는 것’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직접 만들어왔다.
늦여름 뙤약볕이 내리 쬐는 1일 오전 11시. 도쿄 스미다(墨田)구 도립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은 무거운 공기에 휩싸여 있었다.
공원 입구에는 ‘고이케 지사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책동을 그만하라’ 등의 글이 쓰인 손팻말을 든 시민들이 서 있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과 도쿄도청 공무원들이 공원 안팎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요코아미초 공원은 94년 전인 1923년 일본 도쿄를 비롯한 수도권 일대를 강타한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피난 온 시민들이 화염 돌풍에 휘말려 3만8000명이 희생됐다는 곳이다. 희생자를 기리는 도쿄도위령당(慰靈堂)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방화한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자 일본인 자경단, 경찰, 군인 등이 재일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이 추모비 앞에선 매년 9월 1일 일·조(日·朝)협회 등 일본 시민단체들이 주관해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을 열었다. 올해로 44년째다.
하지만 이번 추도식은 좀 달랐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 지사는 전례를 깨고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스미다 구청장도 이에 동조해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조선인 학살 사실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비등했다. 여기에 편승해 추도식이 열리는 같은 시간 극우단체인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 관련 그룹은 ‘맞불’ 추도식을 열겠다고 예고했다.
▲ 일본 간토대지진 94주기인 1일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근처에서 극우단체들의 ‘맞불’ 집회가 열리고 있다.
실제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서 있는 곳에서 1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진실의 간토대지진 이시하라(石原) 희생자 위령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조선인 6,000명 학살이 사실인가. 일본인의 명예를 지키자’ 등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일본 극우들은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 적힌 ‘희생자 수 6,000여 명’이 근거가 희박하다면서 학살 사실 자체를 부인하려 하고 있다.
주최 측은 추도사에서 “지금은 역사전쟁의 시기”라면서 “중국 난징대학살, 위안부 강제연행,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까지 하지도 않은 일로 일본인이 비난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행사가 시작되기 전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항의하면서 경찰과 짧은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20명 정도가 참여한 ‘맞불 집회’는 반향을 얻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날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는 예년보다 많은 500여 명이 참여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관련 뉴스를 보고 추도식에 처음 참석했다는 한 50대 여성은 “이번 일은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눈으로 봤다는 사람이 있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 눈을 감는 것은 현재에 대해서도 눈이 머는 것’이라고 적힌 손팻말을 손수 만들어왔다.
▲ 일본 간토대지진 94주기인 1일 도쿄도 스미다구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에서 진혼무로 희생자의 넔을 위로하고 있다.
추도식 현장은 숙연했다.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경문 낭독과 진혼무가 이어졌다. ‘조선인 학살 국가 책임을 묻는 모임’ 사무국장인 다나카 마사타카(田中正敬)센슈대 교수는 보내온 추도문에서 “일본은 배외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을 걸어왔다”면서 “과거에서 배워 미래로 나가기 위해선 희생자를 마주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일본에서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는 ‘역사 지우기’ 움직임에 우려를 나타냈다. 실제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숫자를 삭제하거나 관련 사실을 두루뭉술하게 기술하는 교과서가 늘고 있다. 도쿄도교육위원회는 2013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에 대해 ‘대지진의 혼란 속에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됐다’고 기술돼 있는 도교 도립고교용 일본사 부교재의 표현을 ‘조선인이 귀중한 생명을 빼앗겼다’로 바꿨다. 군마현 의회는 도내에 있는 조선인 징용 희생자 추도비 철거를 결의했다. 일조협회 고지마 스스무(小島晉) 스미다구 지부장은 “지진 희생자와 사람 손에 학살된 희생자가 다르지 않으냐”면서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고 재발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날 행사는 희생자에 대해 1분 간 묵도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행사가 끝난 뒤에도 추도비 앞에는 헌화하려는 시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미야카와 야스히코(宮川泰彦) 추도식 실행위원장은 “망각은 또다시 악몽을 났는다. 비참한 일을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역사적 사실을 계속 전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학살의 역사적 사실, 그리고 가해의 역사를 은폐하고 싶어하는 권력을 고발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9월 1일은 바로 그런 날이다.
출처 [현장에서] 간토 조선인 학살 94주기...과거를 기억하자는 이들과 지우자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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