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만든 복수노조제, 노동기본권 침해한다
복수노조, 오히려 사용자에 유리
사측 친화 ‘어용노조’ 설립으로 기존 노조의 투쟁력 약화
[경향신문] 반기웅 기자 | 입력 : 2019.03.30 14:56:04 | 수정 : 2019.03.30 15:39:43
현행 복수노조 제도가 노동기본권 향상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복수노조제 도입 이후 오히려 ‘어용노조’가 득세하고 노조의 교섭력이 약화하는 등 부작용이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자의 결사·단체교섭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허용한 복수노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교섭 창구 단일화를 비롯해 사용자에게 교섭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제도가 노동자의 교섭권을 침해한다고 보고 있다. 복수노조제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복수노조의 역사는 길지 않다. 국내 사업장에 복수노조가 들어선 시기는 2011년 이명박 정부 때였다. 1987년 민주노조 운동 활성화 이후 노동계는 자유롭게 노조 활동을 할 권리 가운데 하나로 복수노조제 도입을 요구해왔다. 국제노동기구(ILO)도 한국 정부에 복수노조 허용을 권고했다. 1997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정으로 복수노조 금지조항이 삭제되긴 했지만, 법은 부칙을 통해 기업 단위 노조의 복수노조 설립을 5년간 금지했다. 복수노조를 통해 노동계에 힘이 실릴 것을 우려한 재계는 지속해서 반발했다. 재계는 이름뿐인 ‘페이퍼노조’를 만들고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통해 노조 설립을 막아왔다.
2003년 호텔신라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 시도를 무산시킨 것도 사 측이 만든 페이퍼노조였다. 사 측은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신고 직전에 2명의 조합원이 만든 노조 설립신고서를 서울지방노동청에 접수했다.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따라 노조를 설립하려던 노동자들은 신고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복수노조제는 유예를 거듭했다. 기업들은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이용해 무노조 경영을 유지했다. 그러던 복수노조제가 예상과 달리 친기업·반노동 정책을 펼치던 보수 정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왜 복수노조를 허용했을까. 당시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복수노조 도입 명분은 ‘노동선진화’였다. 2011년 대통령실에서 발간한 <정책소식(98호)>은 “복수노조 허용으로 국제사회에서 노동 후진국이라는 불명예를 털어낼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복수노조 허용 이후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는 증가했다. 2011년 8903개에 달하던 노동조합(30인 이상 사업체 기준)은 2015년 1만819개까지 늘었다. 노동 조합원 수도 132만명에서 136만명으로 증가했다. 노조 수와 조합원 수를 놓고 보면 ‘자유롭게 노조할 권리’가 생긴 듯 보인다.
하지만 현장에서 나타난 복수노조 효과는 노동자가 아닌 사용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기업별 복수노조와 단체교섭’ 보고서에 따르면 노조조직률은 2005년 26%에서 2015년 21.8%로 떨어졌다. 복수노조 합법화 이후 전체 노조원 수는 증가했지만 늘어난 임금노동자 수에 견주어 보면 노조원 증가 폭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는 의미다.
사용주들이 기존 노조의 투쟁력을 약화하고 적대적인 노사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복수노조를 활용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노동연구원이 복수노조 설립 사업체를 분석한 결과 사용주의 노조에 대한 반감이 크고 노사관계가 적대적일수록 복수노조가 생길 확률이 높았다. 대규모 파업이 있었던 사업장에도 새 노조 설립이 잦았다. 복수노조를 통해 기존 노조를 분열시켜 교섭권을 박탈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금속산업계를 들여다보면 현행 복수노조 제도의 문제점을 이해하기가 쉽다.
금속산업은 강성으로 분류되는 민주노총의 금속노조와 온건 성향의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의 금속노련으로 나뉘어 있다. 복수노조 도입 이후 금속노조 소속 조합원 수는 1년 만에 전년 대비 4034명이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금속노련의 조합원 수는 1만5400명 증가했다. 복수노조의 설립 비율은 양대 노총 조합원 수 증감 추이와 반대로 나타났다. 2017년 기준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업체의 복수노조 설립 비율은 사업장 대비 26.7%까지 확대됐다. 270개 금속노조 사업체 가운데 72개 사업체에 복수노조가 설립된 것이다. 반면 한국노총 금속노련의 경우 복수노조 비중은 6.2%에 그쳤다.
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복수노조 사업체 내 금속노조는 소수 노조일 가능성이 높다. 복수노조가 있는 기업 내 금속노조 조합원은 모두 1만1362명으로 전체 금속노조 조합원 수의 6.7%에 불과하지만, 복수노조 설립 사업체 내 금속노련 조합원 수는 전체 금속노련 조합원 수 대비 14.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강성인 금속노조가 복수노조 설립 허용 이후 사업장 내 소수 노조로 전락했다는 의미다. 연구를 담당한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존 노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용자들이 기존 노조를 와해하는 데 복수노조 제도를 악용하고 있다”며 “노조 간 경쟁을 유도하고 사용자에게 일방적으로 교섭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제도의 부작용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를 보면 사용주들은 복수노조 설립 허용 이후 노조 파괴로 유명한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의 지원을 받아 복수노조 설립에 개입하기도 했다. 발레오전장과 갑을오토텍, 보쉬전장, 유성기업 등이 창조컨설팅의 손을 거쳐 복수노조를 만든 대표적인 사례다. 업계에서는 이들 사용주가 창조컨설팅의 자문을 받아 기존 노조 무력화 작업을 벌인 것으로 보고 있다. 복수노조 설립을 빌미로 컨설팅을 통해 기업노조를 만들고 금속노조 지위를 약화하는 전형적인 전략이다.
금속노조 지회로 전투적 조합주의를 표방해온 충북 소재 자동차부품 제조업체인 ㄱ 사의 경우 복수노조 설립 허용 이후 새로 생긴 기업노조가 1노조로 올라서면서 금속노조는 소수 노조로 내려앉게 됐다. ㄱ 사는 2012년 7월 기업노조 설립 시기에 창조컨설팅 관계사에 2억9150만원을 송금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ㄱ 사 직원은 “교섭 창구 단일화로 다수 노조만 교섭에 참여하는 건 불합리하다”며 “단체교섭을 못 하는 노조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교섭 창구 단일화를 전제로 도입한 복수노조제도는 노동계의 발목을 잡았다. 사용자들은 교섭 창구 단일화제도를 악용해 계획적으로 복수노조를 만들고 기존 노조를 무력화시켰다. 조합의 규모는 커졌지만, 소수 노조의 교섭권은 축소됐고 되레 사용자의 교섭 선택권과 영향력이 강화됐다. 노조는 기대하던 결사의 자유 대신 분열의 확산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규철 금속노조 서울지부 사무국장은 “요즘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노조 만들면 다수 노조가 될 가능성이 있느냐’다”라며 “사 측에서 교섭 창구 단일화를 악용하면서 노조의 목소리가 더 약해졌다”고 말했다.
출처 [단독] 잘못 만든 복수노조제, 노동기본권 침해한다
복수노조, 오히려 사용자에 유리
사측 친화 ‘어용노조’ 설립으로 기존 노조의 투쟁력 약화
[경향신문] 반기웅 기자 | 입력 : 2019.03.30 14:56:04 | 수정 : 2019.03.30 15:39:43
▲ 일러스트 김상민
현행 복수노조 제도가 노동기본권 향상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 복수노조제 도입 이후 오히려 ‘어용노조’가 득세하고 노조의 교섭력이 약화하는 등 부작용이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자의 결사·단체교섭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허용한 복수노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교섭 창구 단일화를 비롯해 사용자에게 교섭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제도가 노동자의 교섭권을 침해한다고 보고 있다. 복수노조제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MB정부에서 도입한 복수노조
복수노조의 역사는 길지 않다. 국내 사업장에 복수노조가 들어선 시기는 2011년 이명박 정부 때였다. 1987년 민주노조 운동 활성화 이후 노동계는 자유롭게 노조 활동을 할 권리 가운데 하나로 복수노조제 도입을 요구해왔다. 국제노동기구(ILO)도 한국 정부에 복수노조 허용을 권고했다. 1997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정으로 복수노조 금지조항이 삭제되긴 했지만, 법은 부칙을 통해 기업 단위 노조의 복수노조 설립을 5년간 금지했다. 복수노조를 통해 노동계에 힘이 실릴 것을 우려한 재계는 지속해서 반발했다. 재계는 이름뿐인 ‘페이퍼노조’를 만들고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통해 노조 설립을 막아왔다.
2003년 호텔신라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 시도를 무산시킨 것도 사 측이 만든 페이퍼노조였다. 사 측은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신고 직전에 2명의 조합원이 만든 노조 설립신고서를 서울지방노동청에 접수했다.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따라 노조를 설립하려던 노동자들은 신고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복수노조제는 유예를 거듭했다. 기업들은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이용해 무노조 경영을 유지했다. 그러던 복수노조제가 예상과 달리 친기업·반노동 정책을 펼치던 보수 정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왜 복수노조를 허용했을까. 당시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복수노조 도입 명분은 ‘노동선진화’였다. 2011년 대통령실에서 발간한 <정책소식(98호)>은 “복수노조 허용으로 국제사회에서 노동 후진국이라는 불명예를 털어낼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복수노조 허용 이후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는 증가했다. 2011년 8903개에 달하던 노동조합(30인 이상 사업체 기준)은 2015년 1만819개까지 늘었다. 노동 조합원 수도 132만명에서 136만명으로 증가했다. 노조 수와 조합원 수를 놓고 보면 ‘자유롭게 노조할 권리’가 생긴 듯 보인다.
하지만 현장에서 나타난 복수노조 효과는 노동자가 아닌 사용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기업별 복수노조와 단체교섭’ 보고서에 따르면 노조조직률은 2005년 26%에서 2015년 21.8%로 떨어졌다. 복수노조 합법화 이후 전체 노조원 수는 증가했지만 늘어난 임금노동자 수에 견주어 보면 노조원 증가 폭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는 의미다.
사용주들이 기존 노조의 투쟁력을 약화하고 적대적인 노사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복수노조를 활용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노동연구원이 복수노조 설립 사업체를 분석한 결과 사용주의 노조에 대한 반감이 크고 노사관계가 적대적일수록 복수노조가 생길 확률이 높았다. 대규모 파업이 있었던 사업장에도 새 노조 설립이 잦았다. 복수노조를 통해 기존 노조를 분열시켜 교섭권을 박탈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금속산업계를 들여다보면 현행 복수노조 제도의 문제점을 이해하기가 쉽다.
금속산업은 강성으로 분류되는 민주노총의 금속노조와 온건 성향의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의 금속노련으로 나뉘어 있다. 복수노조 도입 이후 금속노조 소속 조합원 수는 1년 만에 전년 대비 4034명이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금속노련의 조합원 수는 1만5400명 증가했다. 복수노조의 설립 비율은 양대 노총 조합원 수 증감 추이와 반대로 나타났다. 2017년 기준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업체의 복수노조 설립 비율은 사업장 대비 26.7%까지 확대됐다. 270개 금속노조 사업체 가운데 72개 사업체에 복수노조가 설립된 것이다. 반면 한국노총 금속노련의 경우 복수노조 비중은 6.2%에 그쳤다.
▲ 유성기업 노동조합원들이 1월 24일 서울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조파괴활동을 벌인 유성기업 대표의 구속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강성 금속노조가 소수 노조로 전락
노동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복수노조 사업체 내 금속노조는 소수 노조일 가능성이 높다. 복수노조가 있는 기업 내 금속노조 조합원은 모두 1만1362명으로 전체 금속노조 조합원 수의 6.7%에 불과하지만, 복수노조 설립 사업체 내 금속노련 조합원 수는 전체 금속노련 조합원 수 대비 14.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강성인 금속노조가 복수노조 설립 허용 이후 사업장 내 소수 노조로 전락했다는 의미다. 연구를 담당한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기존 노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용자들이 기존 노조를 와해하는 데 복수노조 제도를 악용하고 있다”며 “노조 간 경쟁을 유도하고 사용자에게 일방적으로 교섭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현행 제도의 부작용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를 보면 사용주들은 복수노조 설립 허용 이후 노조 파괴로 유명한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의 지원을 받아 복수노조 설립에 개입하기도 했다. 발레오전장과 갑을오토텍, 보쉬전장, 유성기업 등이 창조컨설팅의 손을 거쳐 복수노조를 만든 대표적인 사례다. 업계에서는 이들 사용주가 창조컨설팅의 자문을 받아 기존 노조 무력화 작업을 벌인 것으로 보고 있다. 복수노조 설립을 빌미로 컨설팅을 통해 기업노조를 만들고 금속노조 지위를 약화하는 전형적인 전략이다.
금속노조 지회로 전투적 조합주의를 표방해온 충북 소재 자동차부품 제조업체인 ㄱ 사의 경우 복수노조 설립 허용 이후 새로 생긴 기업노조가 1노조로 올라서면서 금속노조는 소수 노조로 내려앉게 됐다. ㄱ 사는 2012년 7월 기업노조 설립 시기에 창조컨설팅 관계사에 2억9150만원을 송금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ㄱ 사 직원은 “교섭 창구 단일화로 다수 노조만 교섭에 참여하는 건 불합리하다”며 “단체교섭을 못 하는 노조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교섭 창구 단일화를 전제로 도입한 복수노조제도는 노동계의 발목을 잡았다. 사용자들은 교섭 창구 단일화제도를 악용해 계획적으로 복수노조를 만들고 기존 노조를 무력화시켰다. 조합의 규모는 커졌지만, 소수 노조의 교섭권은 축소됐고 되레 사용자의 교섭 선택권과 영향력이 강화됐다. 노조는 기대하던 결사의 자유 대신 분열의 확산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규철 금속노조 서울지부 사무국장은 “요즘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노조 만들면 다수 노조가 될 가능성이 있느냐’다”라며 “사 측에서 교섭 창구 단일화를 악용하면서 노조의 목소리가 더 약해졌다”고 말했다.
출처 [단독] 잘못 만든 복수노조제, 노동기본권 침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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