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이승만 그 노인네 배신행위 힘들고 쓰라린 경험” 비난
⑪ 이승만 ‘방미외교’의 실상
‘외교에는 귀신, 내정에는 등신’
이승만에 대한 통념 사실일까
우익단체의 ‘민족대표’ 자격으로
46년 말~47년 초 방미한 이승만
목적지 유엔엔 폐막 때까지 안 가
의제상정보다 정치계획 선전 초점
단독정부 주장하며 미군정 비판
[한겨레]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등록 : 2019-05-25 11:48 | 수정 : 2019-05-25 12:13
이승만을 역사적으로 평가할 때 흔히 듣는 말이 “외교에는 귀신, 내정에는 등신”이다. 그러나 그런 통념적 평가가 올바른 것인지 사실에 입각한 검증이 필요하다. 언론의 조작과 왜곡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곳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검증을 소홀히 할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전도된 역사 인식과 왜곡된 역사관, 역사적 허무주의뿐이다.
이승만 외교의 ‘성공 신화’에서 그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1946년 12월에서 1947년 4월 사이의 방미 활동이다. 이승만 쪽은 “국제사회에 조선의 실정을 알리고 유엔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도미한다”는 선전을 출국 이전부터 펼쳤으며, 그의 방미는 사후적으로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커다란 외교적 성공으로 포장되었다. 그의 방미 활동이 어떤 측면, 어떤 기준에서, 또 무엇에 성공한 것인지 그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려면 미국 쪽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1946년 12월 1일 이승만이 미국행 배를 탄다며 인천으로 향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물론 우익단체들이 동원한 수십 대의 자동차가 긴 행렬을 이루었고, 경찰과 청년단체 회원들이 이를 경호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이승만의 미국행은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대표적 우익단체들은 11월 28일 이승만을 ‘민족대표’로 임명했고, 그의 방미 활동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민족대표외교사절후원회를 구성했다.
이승만은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인천으로 향했고, 인천에서 요란한 환송식을 마친 뒤 그날로 서울로 돌아와서 12월 4일 미군이 제공하는 비행기로 출국했다. 신문마다 비행기로 떠난다느니 배편으로 떠난다느니 설왕설래했지만, 민족대표외교후원회는 그가 배편으로 떠난다고 발표했다.
한 이승만 전기는 그가 12월 2일 출발하려 했으나 하지 장군이 비행기를 내주지 않자 맥아더 장군에게 연락하여 가까스로 4일에 떠났다고 그의 출국을 극적으로 묘사했으나, 미군 보고서를 보면 2일은 기상이 나빠 출국하지 못했을 뿐이다.
“왕이 되려는 과도한 집착 때문”
“안 만나겠다는 맥아더 귀찮게 해
겨우 몇분 본 뒤 계속 떠벌려”
이승만 밀어줬던 하지, 맹비난
여행경비, 동회에 할당 강제징수
환송식을 지켜보면서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승만의 한 추종자는 “사려있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반응하였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일까? ‘민족대표’라는 화려한 외관과 미국 도피라는 인식 사이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들이 감추어져 있을까? 이승만에게 우호적인 신문들이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퍼 나른 건가, 아니면 ‘사려있는 사람들’이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 한 것일까? 어떻게 당대에조차 이렇게 상반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지 장군이 자신의 정치고문이었고 이승만과도 친밀했던 굿펠로 대령에게 쓴 1947년 1월 28일 자 편지가 이와 관련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지는 이 편지에서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과 불쾌감을 육두문자까지 섞어 가며 원색적으로 토로했다. 그는 지난 1년간 이승만을 우익 통합의 중심인물로 내세워 그의 세력을 확대해 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미국행을 주선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기대와 달리 미국에서 하지를 제물로 삼아 그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선전 캠페인에 분주했다.
하지 장군은 완고한 반공주의자이자 ‘냉전의 용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태평양전쟁에서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한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그런 하지가 자신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이승만에게 분노했을 거 같지는 않다. 편지는 하지가 1947년 1월의 시점에서 지난 1년간 그와 이승만의 관계를 총평하고 있고, 양자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배경과 이유를 보여준다.
이승만은 방미 목적으로 대(對)유엔 외교를 내걸었지만,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 12월 8일에는 유엔총회가 이미 더 이상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한 상태로 폐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정의 한 보고서는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이 일부러 유엔총회가 폐막할 때까지 개최지인 뉴욕에 가는 것을 피했다고 분석했다. 이승만 진영의 유엔 외교는 의제 상정보다는 미국과 남한 언론을 향해 그의 정치적 계획을 선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의 또 다른 방미 목적에도 주목했다. 이승만의 여행경비를 빌미로 한 정치자금 모금이 더 주요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민족대표외교후원회 재정부장인 한민당의 김양수는 20억원 조성 계획을 미군 정보원에게 언급했고, 시중에는 이승만이 약 1억~2억원을 모금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 모금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영수증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도미 외교 후원금 조성액은 약 1470만원이었다.
이승만의 도미를 빙자한 정치자금 모금은 무리한 할당식 강제징수로 사회문제가 되었다. 우익단체들이 후원비 명목으로 동회(洞會)를 통해서 가구당 100원 또는 50원씩 기부할 것을 강요하고, 기부에 응하지 않으면 쌀 배급을 중지한다고 협박한 사건들이 12월 내내 도하 신문을 장식했다. 영수증철에 이름을 올려놓은 저명한 정치가들과 경제인들이야 그들이 기부한 후원금이 보험료이자 투자였겠지만 쌀 한 됫박이 아쉬운 민초들에게도 보험료가 필요한 세태가 된 것인가?
1946년 봄 식량 위기가 절정에 달하자 한국인들이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양곡 수집과 배급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점령군 당국에 요청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거절했고, 5월 이후 ‘쌀 요구 투쟁’을 조직적으로 주도했던 정회장(町會長)들을 교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과거 일제 식민통치의 말단 기구였던 정회를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주민자치 조직으로 개편하고, 진보적 인사들이 정회장 자리에 올라 쌀 요구 투쟁을 주도했던 것을 지켜보면서 미군정은 식량 요구 투쟁이 수그러들자 식민지기에 정회장을 했던 자들을 복귀시키거나 다른 보수적 인사들을 그 자리에 앉혔고, 정회를 우익단체들이 지배하게 했다.
1946년 말이 되자 이름이 동회로 바뀐 이 기구는 쌀 요구 투쟁 대신 이승만의 방미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강요하는 조직이 되었다.
봄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1946년 가을에도 식량 위기는 계속되었고, 10월 항쟁의 배경과 원인으로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이 미군정 식량정책의 실패였다. 굿펠로가 하지 장군에게 보낸 1946년 10월 17일 자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이승만과 하지 사이를 오가던 미국인 정상(政商)에게는 한국인들이 일으킨 ‘쌀 소동’이 그저 쌀값이 올라 한국인들이 과민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쌀값 폭등은 점령군의 경제정책 실패로 빚어진 결과였지 원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기와 빵은 식료품으로서 위상도 다르지 않은가.
편지에 언급된 빌보아(Bilboa)는 아마 빌보(Bilbo)의 오타가 아닐까 싶다. 비슷한 시기에 빌보아라는 성을 가진 정치인은 미국에 없었지만 대신 시어도어 빌보(Theodore G. Bilbo)라는 상원의원이 있었다. 빌보는 미시시피주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노골적으로 인종분리정책을 지지했다.
굿펠로는 10월 항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하지를 위로한답시고 유머를 섞어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비교했다. 미군정의 양곡 정책을 한국인들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을 미국에서 육류와 관련된 정부 정책에 사람들이 잘 따라주지 않는 데 견주고, 한국에서 여운형 같은 이들이 미군정의 골치를 썩이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미국에선 빌보 같은 이들이 정부의 골치를 썩이고 있지 않으냐고 비유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2차대전 중 식량 배급정책이 시행된 적이 있고, 1946년 말까지 일부가 시행되었던 만큼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 비유였을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에게 민생이란 개인의 정치적 야심이나 당리당략을 위해 동원되는 수사와 비유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민초들에게 민생이란 그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자 당면한 먹거리의 문제였고, 또 정치였다. 민초들이 일상의 정치로부터 퇴출당하자 동회가 정치인의 정치자금이나 갹출하는 조직으로 변했다.
출처 하지 “이승만 그 노인네 배신행위 힘들고 쓰라린 경험” 비난
⑪ 이승만 ‘방미외교’의 실상
‘외교에는 귀신, 내정에는 등신’
이승만에 대한 통념 사실일까
우익단체의 ‘민족대표’ 자격으로
46년 말~47년 초 방미한 이승만
목적지 유엔엔 폐막 때까지 안 가
의제상정보다 정치계획 선전 초점
단독정부 주장하며 미군정 비판
[한겨레]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등록 : 2019-05-25 11:48 | 수정 : 2019-05-25 12:13
▲ 이승만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1947년 4월)한 직후 하지 미군정사령관과 만나는 모습. 앞서 하지는 미국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이승만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토로하는 편지를 자신의 고문인 굿펠로에게 보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승만을 역사적으로 평가할 때 흔히 듣는 말이 “외교에는 귀신, 내정에는 등신”이다. 그러나 그런 통념적 평가가 올바른 것인지 사실에 입각한 검증이 필요하다. 언론의 조작과 왜곡 행위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곳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검증을 소홀히 할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전도된 역사 인식과 왜곡된 역사관, 역사적 허무주의뿐이다.
이승만 외교의 ‘성공 신화’에서 그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이 1946년 12월에서 1947년 4월 사이의 방미 활동이다. 이승만 쪽은 “국제사회에 조선의 실정을 알리고 유엔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도미한다”는 선전을 출국 이전부터 펼쳤으며, 그의 방미는 사후적으로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커다란 외교적 성공으로 포장되었다. 그의 방미 활동이 어떤 측면, 어떤 기준에서, 또 무엇에 성공한 것인지 그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려면 미국 쪽 반응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1946년 12월 1일 이승만이 미국행 배를 탄다며 인천으로 향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물론 우익단체들이 동원한 수십 대의 자동차가 긴 행렬을 이루었고, 경찰과 청년단체 회원들이 이를 경호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이승만의 미국행은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대표적 우익단체들은 11월 28일 이승만을 ‘민족대표’로 임명했고, 그의 방미 활동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민족대표외교사절후원회를 구성했다.
이승만은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인천으로 향했고, 인천에서 요란한 환송식을 마친 뒤 그날로 서울로 돌아와서 12월 4일 미군이 제공하는 비행기로 출국했다. 신문마다 비행기로 떠난다느니 배편으로 떠난다느니 설왕설래했지만, 민족대표외교후원회는 그가 배편으로 떠난다고 발표했다.
한 이승만 전기는 그가 12월 2일 출발하려 했으나 하지 장군이 비행기를 내주지 않자 맥아더 장군에게 연락하여 가까스로 4일에 떠났다고 그의 출국을 극적으로 묘사했으나, 미군 보고서를 보면 2일은 기상이 나빠 출국하지 못했을 뿐이다.
“왕이 되려는 과도한 집착 때문”
“안 만나겠다는 맥아더 귀찮게 해
겨우 몇분 본 뒤 계속 떠벌려”
이승만 밀어줬던 하지, 맹비난
여행경비, 동회에 할당 강제징수
이승만과 맥아더의 만남?
환송식을 지켜보면서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승만의 한 추종자는 “사려있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반응하였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일까? ‘민족대표’라는 화려한 외관과 미국 도피라는 인식 사이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들이 감추어져 있을까? 이승만에게 우호적인 신문들이 가짜뉴스를 만들어서 퍼 나른 건가, 아니면 ‘사려있는 사람들’이 사태 파악을 제대로 못 한 것일까? 어떻게 당대에조차 이렇게 상반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지 장군이 자신의 정치고문이었고 이승만과도 친밀했던 굿펠로 대령에게 쓴 1947년 1월 28일 자 편지가 이와 관련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전략) 그 노인네가 작년에 한 배신행위는 내게는 힘들고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곳에서 미국의 노력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다녔지만 나는 지난 몇 달씩 그가 뭔가 의심스러운 일을 크게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충분히 신임을 주었고 심지어 미국에 가서 한국의 정세, 그리고 통일된 한국 독립을 이루기 위해 뭔가 결정적 행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주의 깊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러주었습니다.
나는 그를 ‘한국의 위대한 애국자’로 적당히 키워주어서 미국의 시선을 끌면 그것이 한국에 우호적 영향을 줄 것이고, 또 이곳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행동에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그가 미국에서 하려는 주된 작업이 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승인받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그는 봉기와 혁명을 일으켜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남한 정부를 수립하게 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나는 특히 그에게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더는 통하지 않고 지금은 한국 독립을 위해 뭔가 전향적 조치를 해야 할 때임을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신탁통치’ 문제를 언급하거나 러시아인들과 모스크바 결정을 비난하지 않도록 자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 그와 그의 부인 사이의 암호화된 교신 전보들은 그의 행동과 의도를 보여주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입니다. 그의 거창한 계획은 1월 18~20일 사이에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막았습니다. 이제 봉기일은 3월 1일로 바뀌었고, 김구가 이승만의 혁명 계획을 이용해서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반탁’ 구호를 내걸 것이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공감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국인 몇 명이 피를 흘리게 만들어서 미국인들 사이에 미군 철수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승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가 한국인들을 향해서 했던 거창한 약속들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음으로써 체면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고, 더하여 왕이 되고야 말겠다는 과도한 집착 때문입니다. (…)
그가 도쿄에 갔을 때 맥아더 장군은 그를 만나기를 거절했고, 그의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그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노인네는 출발을 하루 늦추면서 계속 맥아더를 귀찮게 했고 맥아더는 몇분간의 알현을 허락했습니다. 그가 맥아더를 잠시 봤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자리를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맥아더를 인용하면서 맥아더가 지금 이곳에서 미국인들이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떠벌리며,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그들이 하려는 노력과 관련해서 본국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략)”
나는 그를 ‘한국의 위대한 애국자’로 적당히 키워주어서 미국의 시선을 끌면 그것이 한국에 우호적 영향을 줄 것이고, 또 이곳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행동에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그가 미국에서 하려는 주된 작업이 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승인받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그는 봉기와 혁명을 일으켜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포하고 남한 정부를 수립하게 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나는 특히 그에게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더는 통하지 않고 지금은 한국 독립을 위해 뭔가 전향적 조치를 해야 할 때임을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신탁통치’ 문제를 언급하거나 러시아인들과 모스크바 결정을 비난하지 않도록 자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 그와 그의 부인 사이의 암호화된 교신 전보들은 그의 행동과 의도를 보여주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입니다. 그의 거창한 계획은 1월 18~20일 사이에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막았습니다. 이제 봉기일은 3월 1일로 바뀌었고, 김구가 이승만의 혁명 계획을 이용해서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반탁’ 구호를 내걸 것이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공감을 얻을 것입니다. 그들은 미국인 몇 명이 피를 흘리게 만들어서 미국인들 사이에 미군 철수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승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가 한국인들을 향해서 했던 거창한 약속들이 제대로 성사되지 않음으로써 체면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고, 더하여 왕이 되고야 말겠다는 과도한 집착 때문입니다. (…)
그가 도쿄에 갔을 때 맥아더 장군은 그를 만나기를 거절했고, 그의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에 그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노인네는 출발을 하루 늦추면서 계속 맥아더를 귀찮게 했고 맥아더는 몇분간의 알현을 허락했습니다. 그가 맥아더를 잠시 봤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자리를 나오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맥아더를 인용하면서 맥아더가 지금 이곳에서 미국인들이 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떠벌리며,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이 그들이 하려는 노력과 관련해서 본국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략)”
▲ 1947년 4월 21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이승만(오른쪽부터)과 중국에서 귀국한 이청천(지청천)을 김구와 김규식 등이 나와 환영하고 있다. 이청천은 이날 이승만과 함께 장개석(장제스)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 독립기념관 소장
▲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자신의 고문이자 이승만과도 절친했던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1947.1.28)의 일부. 그는 이 편지에서 욕설(son of a bitch)까지 사용해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방미 목적 중 하나는 정치자금”
하지는 이 편지에서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과 불쾌감을 육두문자까지 섞어 가며 원색적으로 토로했다. 그는 지난 1년간 이승만을 우익 통합의 중심인물로 내세워 그의 세력을 확대해 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고, 미국행을 주선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기대와 달리 미국에서 하지를 제물로 삼아 그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선전 캠페인에 분주했다.
하지 장군은 완고한 반공주의자이자 ‘냉전의 용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태평양전쟁에서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한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그런 하지가 자신의 정치적 야심 때문에 이승만에게 분노했을 거 같지는 않다. 편지는 하지가 1947년 1월의 시점에서 지난 1년간 그와 이승만의 관계를 총평하고 있고, 양자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배경과 이유를 보여준다.
이승만은 방미 목적으로 대(對)유엔 외교를 내걸었지만,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한 12월 8일에는 유엔총회가 이미 더 이상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한 상태로 폐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정의 한 보고서는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이 일부러 유엔총회가 폐막할 때까지 개최지인 뉴욕에 가는 것을 피했다고 분석했다. 이승만 진영의 유엔 외교는 의제 상정보다는 미국과 남한 언론을 향해 그의 정치적 계획을 선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의 또 다른 방미 목적에도 주목했다. 이승만의 여행경비를 빌미로 한 정치자금 모금이 더 주요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민족대표외교후원회 재정부장인 한민당의 김양수는 20억원 조성 계획을 미군 정보원에게 언급했고, 시중에는 이승만이 약 1억~2억원을 모금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 모금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영수증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도미 외교 후원금 조성액은 약 1470만원이었다.
이승만의 도미를 빙자한 정치자금 모금은 무리한 할당식 강제징수로 사회문제가 되었다. 우익단체들이 후원비 명목으로 동회(洞會)를 통해서 가구당 100원 또는 50원씩 기부할 것을 강요하고, 기부에 응하지 않으면 쌀 배급을 중지한다고 협박한 사건들이 12월 내내 도하 신문을 장식했다. 영수증철에 이름을 올려놓은 저명한 정치가들과 경제인들이야 그들이 기부한 후원금이 보험료이자 투자였겠지만 쌀 한 됫박이 아쉬운 민초들에게도 보험료가 필요한 세태가 된 것인가?
▲ 1946년 말에서 47년 초까지 이뤄진 이승만의 미국 방문을 위해 우익단체들은 외교후원금을 대거 거둬들였다. 이 때문에 미군정은 이승만의 방미 목적 중 하나는 정치자금 모금이라고 분석했다. 인촌 김성수가 낸 후원금 100만원에 대한 영수증. 연세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1946년 봄 식량 위기가 절정에 달하자 한국인들이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양곡 수집과 배급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점령군 당국에 요청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거절했고, 5월 이후 ‘쌀 요구 투쟁’을 조직적으로 주도했던 정회장(町會長)들을 교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과거 일제 식민통치의 말단 기구였던 정회를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주민자치 조직으로 개편하고, 진보적 인사들이 정회장 자리에 올라 쌀 요구 투쟁을 주도했던 것을 지켜보면서 미군정은 식량 요구 투쟁이 수그러들자 식민지기에 정회장을 했던 자들을 복귀시키거나 다른 보수적 인사들을 그 자리에 앉혔고, 정회를 우익단체들이 지배하게 했다.
1946년 말이 되자 이름이 동회로 바뀐 이 기구는 쌀 요구 투쟁 대신 이승만의 방미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강요하는 조직이 되었다.
봄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1946년 가을에도 식량 위기는 계속되었고, 10월 항쟁의 배경과 원인으로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이 미군정 식량정책의 실패였다. 굿펠로가 하지 장군에게 보낸 1946년 10월 17일 자 편지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당신이 쌀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유사한 일이 이곳에서는 고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결과는 똑같습니다. 가격이 올라가면 농장에 고기가 남아돌아도 소유자들은 정부가 정한 가격으로 팔려고 하지 않고, 소비자는 가게로 몰려가서 정부와 소동을 일으킵니다. 한국인을 평가할 때 너무 엄격하게 굴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여운형이 있다면 우리에겐 빌보아가 있습니다.”
▲ 하지 미군정사령관의 고문이었던 굿펠로가 하지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에서 굿펠로는 한국의 쌀값 폭등을 가벼운 문제로 여겼다. 정용욱 교수 제공
“1억~2억원 모았다” 소문 돌아
이승만과 하지 사이를 오가던 미국인 정상(政商)에게는 한국인들이 일으킨 ‘쌀 소동’이 그저 쌀값이 올라 한국인들이 과민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쌀값 폭등은 점령군의 경제정책 실패로 빚어진 결과였지 원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기와 빵은 식료품으로서 위상도 다르지 않은가.
편지에 언급된 빌보아(Bilboa)는 아마 빌보(Bilbo)의 오타가 아닐까 싶다. 비슷한 시기에 빌보아라는 성을 가진 정치인은 미국에 없었지만 대신 시어도어 빌보(Theodore G. Bilbo)라는 상원의원이 있었다. 빌보는 미시시피주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노골적으로 인종분리정책을 지지했다.
굿펠로는 10월 항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하지를 위로한답시고 유머를 섞어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비교했다. 미군정의 양곡 정책을 한국인들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을 미국에서 육류와 관련된 정부 정책에 사람들이 잘 따라주지 않는 데 견주고, 한국에서 여운형 같은 이들이 미군정의 골치를 썩이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미국에선 빌보 같은 이들이 정부의 골치를 썩이고 있지 않으냐고 비유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2차대전 중 식량 배급정책이 시행된 적이 있고, 1946년 말까지 일부가 시행되었던 만큼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 비유였을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에게 민생이란 개인의 정치적 야심이나 당리당략을 위해 동원되는 수사와 비유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민초들에게 민생이란 그들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자 당면한 먹거리의 문제였고, 또 정치였다. 민초들이 일상의 정치로부터 퇴출당하자 동회가 정치인의 정치자금이나 갹출하는 조직으로 변했다.
출처 하지 “이승만 그 노인네 배신행위 힘들고 쓰라린 경험”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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