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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정부의 방역 협조 요청이 ‘종교탄압’?

정부의 방역 협조 요청이 ‘종교탄압’?
예배의 의미마저 가짜뉴스로 물들인 한국교회, 부끄럽다
[민중의소리] 권지연 평화나무 뉴스진실성검증센터장 | 발행 : 2020-03-29 11:27:28 | 수정 : 2020-03-29 11:27:28


▲ 3월 22일 오전 대구의 한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신도들이 교회를 나오고 있다. ⓒ뉴시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유난히 어릴 때부터 예배를 사모했던 내게는 자연스럽게 교회와 예배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는 사건들이 많다. 모두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닐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 그 사건들은 내에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내가 가져야 할 신앙을 고민해보는 계기가 된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몇 가지 사건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 목사는 왜 예배시간 그 아이의 가방을 열었을까

청소년기 시절 출석하던 교회에서 부흥회(특별기도집회)가 열렸다.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하는 나를 보며, 강사 목사님께서 예배 도중 “너는 누군데, 이렇게 하나님을 사모하니?, 예배를 사모하니?”라고 물으셨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강사 목사님은 뭔가 투시력을 가졌다는 듯, 저쪽 편에 앉아있던 다른 청소년의 가방을 뒤졌다.

그 안에서는 담배가 나왔다. 교인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당시 그 아이를 문제아처럼 바라보던 어른들의 시선을 잊지 못한다.

사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와 매우 절친했던 내 친구였다. 이후 그 사건에 대해 서로 아무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한참 동안 그 친구에게 이유 없이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스스로 영험함을 자랑하던 그 목사님은 그 친구 가방 속 담배는 찾아내면서 왜 그 친구가 몸에도 좋지 않은 담배를 끊게 하는 기적은 일으키지 못했을까.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일찍 담배까지 배웠던 그 친구가 다른 곳에 가 있지 않고 정규 예배시간도 아닌 부흥회 시간에 교회에 와 있던 모습을 기특하게 여길 수는 없었을까. 마음은 복잡했고, 마음속 숙제는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예배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여전히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목사님들에게 예쁨받던 이유 정도는 알게 됐다. 수년 후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한 후에야 말이다. 목사님 말씀이라면 집도 땅도 아낌없이 바치며 교회를 섬기셨던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업채가 부도난 후, 우리 가족이 더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았으면 하던 목사님의 마음은 어린 내게도 느껴졌다. ‘저 집 이제 볼 것 없다’며 우리 가족을 부담스러워 했다”는 담임 목사님의 생각을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으며 우리 가족은 20년간 섬긴 교회를 떠났다.


교회는 왜 A군에게 ‘공정’의 잣대대며 교회를 떠나게 했을까

또 다른 이유로 교회를 떠나야 했던 청소년이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되면서 화제가 됐던 거제지역 학교폭력 피해자 A군이 그 주인공이다. 사실상 그 사건은 학교폭력 이전에 교회폭력 사건이었다. 거제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K교회 중직자(장로, 안수집사, 권사)의 자녀들이 A군을 일명 ‘기절놀이’라는 미명하게 수차례 기절시키고 바지를 벗겨 수치심을 주고, A군의 어머니에 대해 입에 담기도 어려운 패드립(패륜적 드립)을 하는 등 폭행을 일삼았던 사건이다.

A군은 거제 지역에서 두 평도 안 돼 보이는 작은 분식점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A군의 어머니는 A군이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낄까 늘 미안해하며 친구라도 많이 사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회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 교회에서 A군은 수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 자료사진. ⓒ뉴시스

죽음의 문턱 앞에서 A군은 “제발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폭행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는 A군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되어주지 못했다. 사건이 알려진 후 교회는 A군에게 친구들과의 화해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기계적 중립을 주장했다.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 앞에선 ‘교인 차별은 하지 않겠다’며 피해자를 외면한 것이다.

결국 A군은 세상과 담을 쌓았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사건 재판이 이어지는 지금까지도 K교회가 A군과 그 어머니의 마음을 진심으로 보듬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두 모자가 교회를 떠나는 일 따위도 개의치 않았다.


기도원 강사 목사는 왜 예배시간 ‘예언’기도를 해주었을까.

수년 전 경기도에 있는 한 기도원을 찾았다. 설교자로 나온 목사님께서 기도시간에 교인 몇 명의 기도제목을 읽어주며, 예언 비슷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000성도님, 자녀 학교 때문에 오셨네요. 좋은 곳에 입학하겠어요”, “000성도님, 병든 몸이 나을 줄 믿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강사 목사님께 기도 받고 싶은 사람은 예배 후 2층으로 올라오라는 말에, 나 역시 기도원 2층으로 올라갔다. 나 외에도 기도를 받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도원 측에서 “기도를 받고 응답받기 위해서는 최소 30만 원 이상은 헌금해야 한다”며 봉투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흔들리는 교인들의 눈빛을 보았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눠보진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 헌금을 하지 않으면 본인들의 신앙 없음이 될까 고민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응답이 안 되는 이유를 자신들의 신앙 없음에서 찾았을지도 모른다.

성경에는 기도제목을 이루려면 헌금을 많이 하라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헌금의 액수를 정해준 구절 또한 없다. 오히려 예수는 가난한 과부의 두 랩돈을 기뻐 받으셨다. 예배가, 그 목사의 기도가 헌금을 위한 낚시질에 불과했다고 생각하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 자리를 발칵 뒤집고 나왔다. 결국 마음의 위로를 얻기 위해 찾았던 기도원에서 답답함만 안고 나왔다.


매일 예배하는 선교방송국은 왜 A국장을 마녀사냥 했을까

아래 사건은 어떨까.

한 방송국에서 경영국장을 맡고 있던 A씨는 수년 전 회사의 최고 리더십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투서를 재단 이사장에게 보낸 인물로 지목돼 쫓겨났다. 회사는 발칵 뒤집혔고, 부팀장 이상의 리더급들이 모두 소집됐다.

회사가 투서를 낸 인물로 A씨를 지목한 이유는 첫째, 투서의 내용이 최고 리더십의 경영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둘째, 필적 감정을 해보았더니 투서의 글씨와 A씨의 글체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온 리더들이 모여 마치 A씨가 회사를 무너뜨리려 했다는 듯 몰아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A씨가 투서를 보낸 인물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했다. 지금은 투서를 보낸 인물을 찾을 때가 아니라, 왜 그런 투서가 날아갔는지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오해가 있다면 풀고, 해명할 일이 있다면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날아오는 건 국장들의 손가락질과 야유였다. ‘권지연 팀장 좀 어떻게 해’라는 모 국장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회사는 필적 감정을 위해 A씨를 억지로 휴가까지 쓰게 한 후 평소 A씨가 작성한 문서 또는 문자 메시지를 투서에 찍힌 컴퓨터 글씨체와 비교해 보았다고 한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필적감정 전문 기관 몇 군데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당연히 컴퓨터 글씨로는 필적 감정이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랬다. A씨는 투서를 보낸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단지 평소 총괄본부장의 지시에 ‘예’만 하는 국장들 사이에서 ‘아니오’를 외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수년 전 내가 몸담았던 개신교계 방송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선교’를 강조했던 방송국은 매일 아침 8시30분부터 1시간동안 예배를 드렸다. 직원과 회사가 각각 30분씩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회사 리더들은 예배시간 하나님의 방송국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A씨는 리더들 사이에서 선교방송국을 무너뜨리려는 사탄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는 생각은 지울 길이 없었다.

회사가 조직의 논리를 들이대며 내부 단속을 강화하는 동안 A씨는 자신의 퇴사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2개월간 도서관에서 구직 활동을 했다. 이유는 가족들이 선교방송국을 자처했던 방송국에 대해 안 좋은 시각을 갖게 되고, 혹여 가족들의 신앙이 흔들릴까 염려한 A씨의 착한 마음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 나는 매일의 예배를 통해 그 회사에 뉴스가 있어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입사하자마자 “네가 가진 저널리즘을 모두 버리라”는 명령을 들어야 했던 나는 저널리즘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선교적 관점에서라도 이 시대 가장 약하고 소외된, 아픈 이웃을 뉴스에 담겠다는 생각을 피력했고, 그때마다 번번이 리더와 부딪혔기 때문이다.

한 국장에게서 들은 말인데, 최고 리더였던 목사님께서는 예배는 열심히 드리면서 순종은 하지 않는 나를 매우 독특하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결국 나는 예배 때마다 꺾인 무릎을 묵상하며 조직의 논리를 이해하고자 애썼다. 괴로움이 독이 되어 내 마음을 잠식해 갈 때쯤 한 팀원의 퇴사 이유에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팀장님, 우리의 예배는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순종하게끔 세뇌하기 위한 도구인 것만 같아서 더는 못 버티겠어요

예배 때마다 그 방송사에게 주어진 보도의 사명을 찾기 위해 애쓰던 나는 A국장 사건 이후 그 회사에서 예배의 의미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예배의 중요성은 점차 강조돼 예배실 앞에는 지문인식기까지 설치됐지만 내게 더 이상 예배는 점수 따기 용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 예배의 감격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결국 나 역시 퇴사했다.

이밖에도 고민의 출발점을 제공한 예배에 대한 애피소드는 수없이 많다.

코로나19로 정부가 방역에 협조해달라며 좀처럼 말을 듣지 않을 경우 행정력을 발휘하겠다고 하자, 교회들은 ‘종교탄압’을 들고 나왔다. 평소 예배란 무엇인지, 교회란 무엇인지를 조금도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방증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웃픈 억지인지 상식을 지닌 교인은 다 알 것이다. 더군다나 “일제강점기 총칼 앞에서도 예배했다”느니, “민주화 운동 당시에도 공권력이 교회에는 들어오지 못했느니”하는 주장은 썩은 미소를 짓게 한다.


일제강점기 총칼 앞에서도 예배했다?

“우리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 되지 않는다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아래 후방의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한 발언이다. 신사참배를 찬성한다는 내용이 담긴 ‘긴급 동의안’은 이날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처럼 보수 장로교는 일제강점기에 국권을 침탈한 일본 천황에게 절하는 ‘신사참배’에 굴복하고 말았다.

▲ 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이 신궁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CBS-TV

일제의 총칼 앞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백번 이해하더라도 한국교회가 자발적인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교회들은 교회 종을 떼어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 쓰라고 바쳤고 ‘조선장로호’라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교회 헌금으로 헌납했다.

심지어는 교회를 통폐합한 후 교회 건물과 부지까지 일제에 상납했다. 예배시간에는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동방요배’를 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기미가요(일본국가)도 불렀다. 일제가 불편해할 ‘출애굽기(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인들의 탈축기)’ 등도 철저히 배제했다. 그러고도 해방 후 참회는 없었다.

해방 후 이승만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초대대통령으로 등극하면서 한국을 미국과 같은 기독교국가로 만들겠다며 종교와 정치를 일체화했다.


예장합동의 ‘민주화운동’ 드립이 웃픈 이유

미군정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남한에 정착한 북한 개신교인들은 반공을 매개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과 유착관계를 형성해 나갔다. 반독재를 부르짖으며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고초를 겪는 동안 설교 강단에서는 독재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들끓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설교와 강연이 이어졌고, ‘국가’의 자리에 ‘독재자’를 앉히고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덕분에 개신교 지도자들은 온갖 특권을 누렸고, 교회는 성장 가도를 달렸다.

독재에 맞선 눈물겨운 움직임도 물론 있었다. 1969년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시도하자, 목사 김재준, 박형규 목사와 사상가 함석헌 선생 등 에큐메니컬 진영의 개신교계 지도자들이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한국기독교교회혐의회(NCCK)는 ‘3선 개헌을 반대하는 교회의 성명’을 발표해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NCCK를 중심으로 1988년 2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소위 88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처럼 평화와 통일을 위해 나설 것을 다짐하는 움직임이 거세지자 보수 성향의 원로 목사들이 박정희 정권 비호에 앞장섰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전광훈이 사유화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출발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혐의회가 삼선개헌에 반대할 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에서는 백남조 총신대 이사장을 중심으로 삼선개헌에 대한 지지성명을 54회 총회 이름으로 내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합동 교단은 당시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백남조 장로(백홍섬유)와 김인득 장로(벽산그룹)와 같은 기독교인 자본가들을 총신대 이사회로 끌어들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무인가로 운영되고 있던 총신대학교는 1967년 설립 인가를 받게 된다.

당시 총신의 교장으로 시무하며 교무부와 긴밀히 협조를 맺고 대학인가를 위해 노력하던 박형룡 목사는 ‘삼선개헌 지지’는 학교를 위한 불가피한 일이라 여겼다. 그는 1969년 박정희의 삼선개현에 관한 ‘개헌문제와 양심 자유선언’이라는 성명에 이름을 올렸을 뿐 아니라, ‘개헌문제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라는 성명을 통해 박정희를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자’로 추어올리며 군부독재 정권을 옹호했다.

합동교단의 기관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교단 자체 내의 근래에 일들을 열거하여 자성해 보고자 한다. 오늘의 보수교회는 너무나도 현실과 잘 타협한다. (중략) 본 교단 저명인사들이 개헌안에 서명나열을 하고 얻은 것은 총신대학부 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소중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 사건 자체를 예의 비판했던가. 아니면 내가 얻을 것만 크게 보고 그 결과적 영향을 덜 생각하지는 안 했는가. 다시 말해서 많은 교인들이 자유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어른들이 먼저 찬성서명을 선포해놓았으니 이것이 독재적 선포였던가 아니면 자체의 분열의 선포였던가

박형룡 목사는 국가가 종교에 간섭하고 박해할 때는 저항해야 하나, 정치 또는 인권의 문제는 세속의 문제로 치부하고 교회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철저히 독재 정권을 위한 나팔수를 자처했던 보수 교회를 정부가 탄압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반공사상으로 국민을 총화 단결시키기에 보수 개신교만큼 좋은 파트너는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충무공 이순신 리더십을 부각시키며 추앙한 것은 지금까지도 역사적 논란거리다. 박정희는 현충사를 성역화하고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

여기에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데다 일본 관동군 장교 출신이라는 친일 논란을 무마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순신이 가진 반일 이미지를 통해 박정희의 친일 이미지를 희석하고, 이순신의 구국 영웅적 이미지를 통해 구 출신 인사의 집권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

그런데 합동교단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박형룡 목사는 이순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충무공이야말로 죽도록 충성해 나라를 건지고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고 충성의 상징으로 이 민족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어 충성의 광채를 찬란히 비추어주는 이 민족의 태양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전술은 후대에 길이 남을 교훈을 남긴 것은 틀림이 없다. 그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명장이요, 영웅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형룡 목사가 박정희 영웅화 작업을 위해 이순신 칭송에 협력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 역시 지울 길이 없다.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

“민주화운동 당시 수배령에 의해 도피하여 잠입한 현행범(당시의 보안법 등에 의거)이 명동성당에 수십 명이 칩거할 때조차도 검찰과 경찰 등 일체의 공무원이 체포·구금·감시·조사를 위해서 출입하고자 했을 때도 허용하지 않았다”면서 ‘전국교회 예배당 출입 확인서 시행의 건’ 공문을 교단 산하 소속 교회들에 발송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김종준 총회장)의 공문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이유다.

▲ 1968년 대통령 조찬 기도회라는 열린 첫 공식 국가조찬기도회. 이날 기도회에서 김준곤 목사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 박정희를 칭송했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이뿐이겠는가. 군부독재 시절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의 망령은 한국개신교를 집어삼킨 듯 했다. 이들은 ‘국가’의 자리에 ‘독재자’를 앉혔다. 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인 김준곤 목사를 필두로 1966년 박정희 정권을 위한 ‘대통령조찬기도회’가 열렸다. 개신교 거물 목사들이 모여 박정희를 위해 기도하며 그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다. 김준곤 목사는 제1회 조찬기도회 때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기도하고, 2회 때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 찬양했다. 군사쿠데타를 노골적으로 찬양하며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1976년 ‘대통령조찬기도회’의 명칭은 ‘국가조찬기도회’로 바뀌었고,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으나, 독재정권에 대한 보수 개신교의 기생은 계속됐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직후 8월 6일과 9월 30일 두 차례에 걸쳐 전두환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때 참석하였던 목사들의 명단은 한경직, 김준곤, 정진경, 조향록, 김지길, 문만필, 지원상, 유흥목, 이봉성, 신현균, 김창인, 장성철, 김신명, 박정근, 김용도, 김종식 등이다.

이후 사건 사건마다 개신교 흑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교회가 잘한 일도 있는데, 왜 잘못한 일만 들추어내느냐는 불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독재정권 하에서 기득권 옹호에 앞장서온 흑역사 앞에서는 선행을 베풀어 온 진정성마저 훼손되기 마련이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가 방역을 우려하는 상황에서 교회가 선제적으로 ‘모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웃사랑과 나눔에 ‘올인’해도 그간 잃은 신뢰를 회복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터인데, “왜 교회만 가지고 그러냐”며 어울리지 않는 앙탈을 부리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이유다.

최근 여전히 모이는 예배를 강행한 서울의 한 목사는 “교인들이 대체 뭘 잘못했냐”며 “성도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자. 떳떳하자”고 설교했다.

이 주장에 나는 이렇게 응답하고 싶다. 공명선거감시단 활동의 일환으로 평화나무가 설교를 모니터링해야 하는 현실. 모니터링 요원들이 목사들의 망언과 정치적 선동, 뻔뻔함에 지쳐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해야 하는 현실에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시인과 같은 예민한 감수성은 없더라도 우리는 지금 부끄러움이라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출처  [평화나무 리포트] 정부의 방역 협조 요청이 ‘종교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