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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노동과 삶

[단독] KEC, 손가락 다쳐 산재 신청한 노동자 징계

[단독] KEC, 손가락 다쳐 산재 신청한 노동자 징계
산재 신청 뒤 징계 4명 중 3명꼴… 회사 측 “통상 관례다”
발암물질 20여개 사용 불구 안전교육도 서면 대체 일쑤

[경향신문] 이영경 기자 | 입력 : 2013-04-19 06:00:05 | 수정 : 2013-04-19 11:47:03


경북 구미의 반도체업체 KEC는 일하다 다친 노동자들이 산재를 신청하면 징계를 내리는 대응을 해왔다. 비메모리 반도체를 제조하면서 유해화학물질을 다량 사용하면서도 회사가 지켜야 할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교육은 서류로 대체하기 일쑤인 허점투성이였다.

지난 1월 기계에 끼여 손가락을 다친 박모씨는 회사에 산재 신청을 문의했지만 “공상처리를 하면 치료비를 지급하고 치료기간 결근을 인정해주지만, 산재처리를 하면 징계위원회에 올라간다”는 답변을 들었다. 박씨는 “회사는 ‘통상 관례’라는 말만 했다”며 “손가락이 잘리거나 했으면 임금을 삭감한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외려 법을 지키지 않아온 쪽은 회사였다. 박씨는 “2011년 파업이 끝나고 복귀한 뒤 업무가 바뀌었지만 한번도 안전교육과 작업 시 준수사항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원래 그 설비에는 손가락 끼임 방지를 위한 아크릴판이 설치돼 있었으나 작업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철거됐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박씨가 다친 후 아크릴판은 다시 설치됐다.

▲ 경북 구미의 반도체업체 KEC가 지난 3일 기계에 손가락이 다쳐 산업재해를 신청한 박모씨에게 회사 대표 명의로 발표한 징계공고문. 징계 사유로 ‘안전사고의 1차적 책임’ ‘회사 이미지 상실 초래’ 등이 적혀 있다. | 금속노조 KEC지회 제공

회사는 박씨 탓을 했다. 박씨는 분명 정지버튼을 눌렀는데도 기계가 오작동해 사고를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회사는 설비업체를 불러 검사한 결과 기계에 이상이 없었다며 박씨 책임으로 몰았다. 박씨는 “회사가 기계 오작동이란 걸 나에게 증명해보라고 했다”며 “일하다 다쳤는데 내 잘못으로 몰아가는 건 말도 안된다”고 말했다.

산재 신청을 이유로 징계당한 것은 박씨뿐이 아니다. 권모씨는 2008년 설비를 청소하던 중 손가락이 끼어서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산재를 신청해 인정받았지만 당시 회사는 권씨의 과실로 일어난 사고라며 감봉 3개월에 인사고과 C등급의 징계를 내렸다. 권씨는 “내가 부주의한 탓도 없지 않겠지만 회사가 설비 도어를 잠그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과 청소를 해 회사의 잘못도 있고 산재로 인정받았다”며 “설비 도어를 잠갔다면 기계가 돌아가지 않아 손가락을 다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속노조 KEC지회가 조합원 146명을 조사한 결과 산재를 입은 비율은 9.1%였으며, 이 중에서 산재를 신청한 비율은 28.6%에 불과했다. 57.1%는 공상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재 신청 후 징계를 받은 비율은 78.6%에 이르렀다.

KEC가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업안전교육을 실시한 것처럼 조작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정기적으로 안전보건교육을 실시토록 했지만 회사는 노동자들로부터 서명만 받아 한 것처럼 꾸몄다는 것이다. KEC 노동자 이모씨는 “안전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유해물질교육, 안전교육, 근골격계교육 등을 실시했다는 확인서에 서명만 받아가고 있다”며 “몇 년간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서명을 해왔는데, 얼마 전 구미에 불산사고 등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서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황모씨는 “불산, 질산, 초산, 황산 등 약품 조성을 수작업으로 하는데 관리자가 안전교육을 하지 않고 인쇄물로 읽어보라고 한 뒤 사인만 받아갔다”며 “현장에서는 바쁘다보니 읽어보지 못하고 사인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황씨는 “약품에 손가락이 노출돼 부상을 입어도 대부분 개인치료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KEC지회가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KEC에서 208개 약품과 가스 등이 사용됐으며, 산화에틸렌·황산 등 1급 발암물질 5개 성분이 17개 제품에, 2급 발암물질 2종류가 9개 제품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산재예방 조치와 교육은 형식적으로 이뤄졌다. 조합원 설문조사 결과 82%가 귀마개, 마스크 등 보호구를 필요로 하는 업무에서 일했지만 이 중 36%는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일한다고 응답했다. 산업안전교육을 받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67%였으나 대부분 서면과 서명용지로 대체돼 실시되고 있다고 응답했다.

김은미 산업보건연구회 사무국장은 “KEC의 산재는 사업주가 의무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발생한 것인데 노동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사업주들이 산재가 많이 발생하면 산재보험료가 인상되고, 노동부 감독도 받아야 하는 이유로 산재 신청 자체를 꺼린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KEC가 징계사유로 ‘무재해일수 달성 실패’를 들었는데 무재해 사업장의 경우 정부 관리감독에서 벗어나 자율관리를 할 수 있다”며 “정부가 자율관리에 맡기지 말고 관리감독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KEC 관계자는 “산재를 신청했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 징계한 것”이라며 “박씨뿐 아니라 관리자 2명도 견책 징계를 내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조사 결과 기계결함이 없었기 때문에 본인 과실로 징계한 것”이라며 “안전교육은 문서로도 하고 교대근무할 때 관리자를 통해 매번 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출처 : [단독] KEC, 손가락 다쳐 산재 신청한 노동자 징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