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 혼외자식만 4남 2녀
족벌언론과 그 사주들의 ‘맨얼굴’ 드러내는 탐사기획 보도 시작
[미디어오늘] 탐사기획팀 | 입력 : 2013-09-11 09:49:34 | 노출 : 2013.09.12 06:29:56
방일영(方一榮: 1923~2003) 전 조선일보 대표이사 회장.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의 부친이다. 작고할 때까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떵떵거리며 호방하게 살다 간 인물이다.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과의 잦은 술자리를 통해 ‘밤의 대통령’으로 불린 바 있고, 권번(券番: 일제 강점기의 기생들의 조합)의 기생들에게 ‘머리를 많이 얹어 준’ 것으로도 언론계 안팎에 소문이 나 있다.
고(故) 방 회장은 본부인 박 씨(1928~1986) 사이에 1녀 2남을 뒀는데, 그 중 둘째이자 장남이 조선일보 방상훈(1948년생) 사장이고, 차남이 코리아나호텔 방용훈(1954년생) 사장이다. ‘장자연 사건’에 등장하는 ‘조선일보 사장’은 바로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을 지칭한 것으로 미디어스와 본보(미디어오늘) 등이 보도한 바 있다. 방상훈 사장의 누나(1945년생)는 미국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호방하기로 유명한 고 방 회장의 ‘자식(아들) 욕심’은 유별났던 것으로 보인다. 본부인과 사이에 1녀 2남을 둔 상태에서 첫번째 혼외부인(첩) 사이에 아들만 셋을 두었다. 그 세 아들 중 2명은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해, 한 명은 서울에서 개인의원을 운영하고 있고, 나머지 1명은 서울대 의대 교수(정형외과 전문의)를 거쳐 이명박 정부에서 국립재활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일보사가 운영하는 인물DB에서 방일영 회장을 찾아보면, ‘자녀’ 항목에 ‘5남 1녀’로 나와 있으나, 정작 ‘가족’ 항목에는 조부(방응모: 1884-6.25때 납북)와 부친(방재윤: 1901~1940), 남동생인 방우영(1928년생) 조선일보 명예회장과 두 아들(방상훈, 방용훈)의 이름만 나와 있다.
고 방 회장이나 방상훈 사장 등 가족 입장에서 볼 때, 도의적, 윤리적 논란을 떠나,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됐다.
2003년 8월 8일. 방 회장이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사망했다. 서울대병원 빈소. 아버지를 잃은 두 딸과 한 아들이 상복도 입지 못한 채 빈소 모퉁이에서 울고 있다. 친인척이 아닌 일반 문상객들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나흘 뒤 발인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유와 배경이야 어찌됐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당당히 아버지라고 목 놓아 부르지도 못하는 ‘어린 자식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들은 이듬해 서울가정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유전자 검사를 거치지 않고, 친자로 인지확정 판결을 받아 아버지 방일영 회장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이복오빠이자 이복형인 방상훈 사장 등을 상대로 아버지 방일영 회장으로부터 상속 혹은 증여받은 조선일보사 주식의 일부를 반환하라는 청구소송과 유류분(상속금품) 반환 청구소송을 각각 제기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960년대 말, 방 회장은 시내 모 한정식 집에서 근무하던, 자신보다 25살이나 아래인 20대 초반의 여성과 두 번째 혼외관계에 들어가, 2녀 1남을 낳자 살림을 차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흑석동 대저택(대지 및 임야 합쳐 3,800여평)에는 본부인 사이에 난 1녀 2남과 살면서, 두명의 혼외부인과 자식들에게 각각 살림을 차려줘 사실상 ‘세집살림’을 시작한 셈이다.
첫번째 혼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은 방일영 회장이 살아있을 때 호적에 등재했고, 명절이나 방 회장의 생일 등 집안 행사 때는 흑석동 집을 방문하는 등 ‘친자(親子)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두 번째 혼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과의 관계였다. 방일영 회장이 살아있을 때는 방상훈 사장 등 본부인 자식들에게 이복동생들임을 인식시킨 것으로 보이나, 방 회장이 사망한 후 방상훈 사장이 사실상 이들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홀대함으로써 이복동생들이 친자확인 소송과 상속재산(유류분) 분할청구 소송 등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3년여의 재판 끝에 결국 두 번째 혼외부인 사이에 태어난 2녀1남의 원고들은 재판부의 조정 권고를 받아들여 2010년 초 상당액의 금품을 받고(혹은 받기로 하고) 방상훈 사장 측과의 조정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일보사 1대주주인 방상훈 사장은 4남2녀의 이복형제들에게 조선일보사 주식은 한 주도 내주지 않았지만, 호방했던 부친이 남긴 ‘씨앗들’은 알게 모르게 부담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방일영 회장이 작고한 다음날인 2003년 8월 9일자 조선일보 5면에 방 회장을 회고하는 글에서 강천석 논설주간은 이렇게 썼다.
[그가 56년 신문사 생활 동안 편집국에 얼굴을 보인 예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그는 “맡기면 간섭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얻는다”고 믿었다. 그가 편집국장들에게 당부한 말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기사나 남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은 삼가라”는 것뿐이었다.]
강 주간의 글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방일영은 조선일보 마당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성장했고 조선일보와 함께 고난을 겪어냈다. 오랜 세월 조선일보를 앞에서 이끌고 또 그만큼의 세월을 뒤에서 밀면서 나중엔 조선일보와 조선일보 사람들에게 넉넉한 그늘을 드리워 주는 한 그루 느티나무로 만년을 보냈다. 방일영은 1999년 조선일보 고문직에서 물러나 은퇴하면서 “이제 걱정도 여한도 없다”고 했다. 그의 일생에는 조선일보밖에 없었다.]
과연 방 회장의 ‘이제 걱정도 여한도 없다’는 유언과도 같은 말은 그대로 실현된 것일까?
출처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 혼외자식만 4남 2녀
족벌언론과 그 사주들의 ‘맨얼굴’ 드러내는 탐사기획 보도 시작
[미디어오늘] 탐사기획팀 | 입력 : 2013-09-11 09:49:34 | 노출 : 2013.09.12 06:29:56
우리나라 족벌신문사와 사주들은 ‘권력 그 자체’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재벌과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는 입맛에 따라 선별적으로 하거나, 회사와 사주들의 이익(私益)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 전교조, 공무원노조처럼 공격의 대상으로 지목되면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특히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오보로 판결이 나도 좀처럼 지면을 통해 사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족벌언론과 사주들의 특징을 3가지만 꼽으라면, 거짓말, 뻔뻔함, 그리고 집요함을 든다. 목표가 정해지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이 이들에게 종합편성채널이라는 엄청난 ‘방송 무기’까지 안겨주었다. 이제 신문과 방송 모두를 가진 족벌언론과 사주들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됐다. 대법원에서 탈세 확정판결을 받아도 대통령이 사면해 준다. 대통령은 임기 5년이 끝나면 물러나지만, 족벌언론 사주들은 대물림으로 ‘족벌언론 왕국’을 영속적으로 지배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오늘은 한국의 지배세력이 우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그들의 ‘맨얼굴’을 드러내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혼맥으로 얽히고 설킨 지배세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족벌언론 사주들부터 살펴본다. 독자와 시민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편집자 주
방일영(方一榮: 1923~2003) 전 조선일보 대표이사 회장.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의 부친이다. 작고할 때까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떵떵거리며 호방하게 살다 간 인물이다.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과의 잦은 술자리를 통해 ‘밤의 대통령’으로 불린 바 있고, 권번(券番: 일제 강점기의 기생들의 조합)의 기생들에게 ‘머리를 많이 얹어 준’ 것으로도 언론계 안팎에 소문이 나 있다.
고(故) 방 회장은 본부인 박 씨(1928~1986) 사이에 1녀 2남을 뒀는데, 그 중 둘째이자 장남이 조선일보 방상훈(1948년생) 사장이고, 차남이 코리아나호텔 방용훈(1954년생) 사장이다. ‘장자연 사건’에 등장하는 ‘조선일보 사장’은 바로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을 지칭한 것으로 미디어스와 본보(미디어오늘) 등이 보도한 바 있다. 방상훈 사장의 누나(1945년생)는 미국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 2003년 8월 8일 방일영 전 조선일보 고문의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에서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조문객을 맞고 있다.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 joins 인물정보
조선일보사가 운영하는 인물DB에서 방일영 회장을 찾아보면, ‘자녀’ 항목에 ‘5남 1녀’로 나와 있으나, 정작 ‘가족’ 항목에는 조부(방응모: 1884-6.25때 납북)와 부친(방재윤: 1901~1940), 남동생인 방우영(1928년생) 조선일보 명예회장과 두 아들(방상훈, 방용훈)의 이름만 나와 있다.
고 방 회장이나 방상훈 사장 등 가족 입장에서 볼 때, 도의적, 윤리적 논란을 떠나,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됐다.
‘비극의 씨앗’
2003년 8월 8일. 방 회장이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사망했다. 서울대병원 빈소. 아버지를 잃은 두 딸과 한 아들이 상복도 입지 못한 채 빈소 모퉁이에서 울고 있다. 친인척이 아닌 일반 문상객들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나흘 뒤 발인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유와 배경이야 어찌됐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당당히 아버지라고 목 놓아 부르지도 못하는 ‘어린 자식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들은 이듬해 서울가정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유전자 검사를 거치지 않고, 친자로 인지확정 판결을 받아 아버지 방일영 회장의 호적에 이름을 올린다. 그리고 이복오빠이자 이복형인 방상훈 사장 등을 상대로 아버지 방일영 회장으로부터 상속 혹은 증여받은 조선일보사 주식의 일부를 반환하라는 청구소송과 유류분(상속금품) 반환 청구소송을 각각 제기한다.
두번째 혼외부인 사이에 2녀 1남
▲ ※. 그림을 누르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960년대 말, 방 회장은 시내 모 한정식 집에서 근무하던, 자신보다 25살이나 아래인 20대 초반의 여성과 두 번째 혼외관계에 들어가, 2녀 1남을 낳자 살림을 차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흑석동 대저택(대지 및 임야 합쳐 3,800여평)에는 본부인 사이에 난 1녀 2남과 살면서, 두명의 혼외부인과 자식들에게 각각 살림을 차려줘 사실상 ‘세집살림’을 시작한 셈이다.
첫번째 혼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은 방일영 회장이 살아있을 때 호적에 등재했고, 명절이나 방 회장의 생일 등 집안 행사 때는 흑석동 집을 방문하는 등 ‘친자(親子)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두 번째 혼외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과의 관계였다. 방일영 회장이 살아있을 때는 방상훈 사장 등 본부인 자식들에게 이복동생들임을 인식시킨 것으로 보이나, 방 회장이 사망한 후 방상훈 사장이 사실상 이들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홀대함으로써 이복동생들이 친자확인 소송과 상속재산(유류분) 분할청구 소송 등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방일영 회장 사후 호적 등재 후 민사소송 제기, 조정으로 끝나
▲ 지난 2008년 3월 28일 서울 성공회 성당에서 열린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왼쪽)의 차남 방정오씨의 결혼식에서 사회를 본 김동건 아나운서와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방상훈의 숙부)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방정오의 부인 이주연씨는 이인수 수원대 총장의 딸이다. 수원대학은 조선일보 종합편선채널에 50억원을 투자했다. 이치열 기자
3년여의 재판 끝에 결국 두 번째 혼외부인 사이에 태어난 2녀1남의 원고들은 재판부의 조정 권고를 받아들여 2010년 초 상당액의 금품을 받고(혹은 받기로 하고) 방상훈 사장 측과의 조정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일보사 1대주주인 방상훈 사장은 4남2녀의 이복형제들에게 조선일보사 주식은 한 주도 내주지 않았지만, 호방했던 부친이 남긴 ‘씨앗들’은 알게 모르게 부담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방일영 회장, 생전에 ‘남의 가슴에 못박는 기사 삼가라’ 강조
방일영 회장이 작고한 다음날인 2003년 8월 9일자 조선일보 5면에 방 회장을 회고하는 글에서 강천석 논설주간은 이렇게 썼다.
[그가 56년 신문사 생활 동안 편집국에 얼굴을 보인 예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그는 “맡기면 간섭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얻는다”고 믿었다. 그가 편집국장들에게 당부한 말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기사나 남의 가슴에 못 박는 일은 삼가라”는 것뿐이었다.]
강 주간의 글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방일영은 조선일보 마당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 성장했고 조선일보와 함께 고난을 겪어냈다. 오랜 세월 조선일보를 앞에서 이끌고 또 그만큼의 세월을 뒤에서 밀면서 나중엔 조선일보와 조선일보 사람들에게 넉넉한 그늘을 드리워 주는 한 그루 느티나무로 만년을 보냈다. 방일영은 1999년 조선일보 고문직에서 물러나 은퇴하면서 “이제 걱정도 여한도 없다”고 했다. 그의 일생에는 조선일보밖에 없었다.]
과연 방 회장의 ‘이제 걱정도 여한도 없다’는 유언과도 같은 말은 그대로 실현된 것일까?
방일영 혼외자녀 상속소송서 ‘조정 합의’
2008년 1심 패소 후 항소했지만 2010년 조정성립… 일부 합의금 받고 끝나
2008년 1심 패소 후 항소했지만 2010년 조정성립… 일부 합의금 받고 끝나
고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의 혼외 자녀 방아무개씨 등 3명이 방상훈(65) 조선일보 사장과 아들 준오씨(40), 방용훈(59) 코리아나호텔 사장을 상대로 낸 방 전 회장의 상속재산 반환청구소송은 1심 패소 후 항소심에서 조정성립으로 끝났다.
원고 방씨 등이 방상훈 사장 등을 상대로 걸었던 소송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 2005년 1월 방 사장 등 피고들이 방 전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이 법정상속권을 초과해 원고들이 받아야 할 상속권을 침해했다며 침해한 만큼을 돌려달라고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11부에 신청한 ‘유류분 반환청구소송’이다.
또 하나는 2006년 8월 방용훈 사장(방 전 회장의 차남이자 방상훈 사장의 동생)과 방준오(방상훈 사장 장남)씨 등 18명의 주주가 보유한 조선일보사 주식 가운데 자신들의 몫을 돌려달라고 같은 재판부에 낸 ‘주식명의개서절차 이행청구소송’이다.
두 소송을 함께 맡은 1심 재판부는 지난 2008년 8월20일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 측이 반환을 요구한 유류분은 방상훈 사장에게 30억 원, 준오씨에게 3억원이며 방용훈 사장 등 18명에게 명의신탁한 조선일보의 주식과 그에 따른 주식 배당금 3억850여만 원이었다.
원고 측은 1심 패소 후 즉시 항소 절차를 밟았지만 2009년 10월 재판부의 중재로 조정 절차에 들어가 2010년 1월 4일 양자가 조정안에 최종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원고 측은 방상훈 사장 등 피고인으로부터 일부 합의금을 받았지만 당초 요구했던 상속재산 반환금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 전 회장과 혼외부인 박아무개(65)씨 사이에서 태어난 2녀1남의 방씨 남매는 지난 2004년 9월 서울가정법원에서 친자로 확인됨에 따라 방 전 회장의 호적에 올라가게 됐다. 하지만 친자 인지(認知) 소송 때부터 방상훈 사장은 이들을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2003년 8월 방 전 회장이 별세했을 때 방 사장은 “세간의 눈이 있으니 발인에는 오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현재 미국 국적으로 어렸을 때 방 전 회장에게 학비와 용돈 등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방 전 회장 별세 당시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고 이에 따라 친자 확인소송과 상속재산 반환소송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만약 이들이 상속재산 반환소송에서 승소했다면 현재 조선일보 전체 주식의 7.7%를 보유한 방준오씨(현 조선일보 이사대우)보다도 많은 7.74%를 갖게 돼 조선일보 지배구조가 달라질 수 있었다.
현재 조선일보 지분은 전체 360만4000주 중 방상훈 사장 30.03%, 방성훈 스포츠조선 부사장(방우영 명예회장의 장남) 16.88%, 방일영문화재단 15%,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12.08%, 방용훈 사장 10.57%, 방준오 조선일보 이사대우 7.7% 등을 차지하고 있어 전체 92.26% 지분을 사주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 이 외에 7.74%는 김대중 고문 등 조선일보 전현직 임직원 단체 ‘서중회’ 소속 13명이 보유하고 있다.
원고 방씨 등이 방상훈 사장 등을 상대로 걸었던 소송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 2005년 1월 방 사장 등 피고들이 방 전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이 법정상속권을 초과해 원고들이 받아야 할 상속권을 침해했다며 침해한 만큼을 돌려달라고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11부에 신청한 ‘유류분 반환청구소송’이다.
또 하나는 2006년 8월 방용훈 사장(방 전 회장의 차남이자 방상훈 사장의 동생)과 방준오(방상훈 사장 장남)씨 등 18명의 주주가 보유한 조선일보사 주식 가운데 자신들의 몫을 돌려달라고 같은 재판부에 낸 ‘주식명의개서절차 이행청구소송’이다.
두 소송을 함께 맡은 1심 재판부는 지난 2008년 8월20일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원고 측이 반환을 요구한 유류분은 방상훈 사장에게 30억 원, 준오씨에게 3억원이며 방용훈 사장 등 18명에게 명의신탁한 조선일보의 주식과 그에 따른 주식 배당금 3억850여만 원이었다.
원고 측은 1심 패소 후 즉시 항소 절차를 밟았지만 2009년 10월 재판부의 중재로 조정 절차에 들어가 2010년 1월 4일 양자가 조정안에 최종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원고 측은 방상훈 사장 등 피고인으로부터 일부 합의금을 받았지만 당초 요구했던 상속재산 반환금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 전 회장과 혼외부인 박아무개(65)씨 사이에서 태어난 2녀1남의 방씨 남매는 지난 2004년 9월 서울가정법원에서 친자로 확인됨에 따라 방 전 회장의 호적에 올라가게 됐다. 하지만 친자 인지(認知) 소송 때부터 방상훈 사장은 이들을 형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난 2003년 8월 방 전 회장이 별세했을 때 방 사장은 “세간의 눈이 있으니 발인에는 오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현재 미국 국적으로 어렸을 때 방 전 회장에게 학비와 용돈 등 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방 전 회장 별세 당시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고 이에 따라 친자 확인소송과 상속재산 반환소송을 진행하게 된 것이다.
만약 이들이 상속재산 반환소송에서 승소했다면 현재 조선일보 전체 주식의 7.7%를 보유한 방준오씨(현 조선일보 이사대우)보다도 많은 7.74%를 갖게 돼 조선일보 지배구조가 달라질 수 있었다.
현재 조선일보 지분은 전체 360만4000주 중 방상훈 사장 30.03%, 방성훈 스포츠조선 부사장(방우영 명예회장의 장남) 16.88%, 방일영문화재단 15%,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12.08%, 방용훈 사장 10.57%, 방준오 조선일보 이사대우 7.7% 등을 차지하고 있어 전체 92.26% 지분을 사주 일가가 소유하고 있다. 이 외에 7.74%는 김대중 고문 등 조선일보 전현직 임직원 단체 ‘서중회’ 소속 13명이 보유하고 있다.
탐사기획팀
출처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 혼외자식만 4남 2녀
'세상에 이럴수가 > 언론과 종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신문사상 최고 문제작” 동아일보 ‘채동욱 칼럼’ 파문 (0) | 2013.09.17 |
---|---|
최영해 아버지 前 上書 '개와 언론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0) | 2013.09.17 |
조선일보의 아전인수 ‘억울하면 입증하라’? (0) | 2013.09.12 |
'채동욱 의혹' 보도 위해 학생정보까지 공개한 <조선> (0) | 2013.09.11 |
‘추적60분’ 불방, 길환영 KBS사장 직접 지시 논란 (0) | 2013.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