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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박정희·박근혜

박근혜 권력에 어른거리는 `친일`의 그림자

박근혜 권력에 어른거리는 '친일'의 그림자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40] 김태효와 하태경, 박효종... 다시 '친일'을 묻는다
[오마이뉴스] 정운현 | 12.07.09 20:59 | 최종 업데이트 12.07.10 09:26


▲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 (자료사진) ⓒ 남소연
한일군사정보협정 파문으로 지난 5일 사표를 낸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교수 시절 친일성향이 농후한 논문을 여럿 써 물의를 빚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후 한 트위터리안은(@saladm***)은 자신의 트위터에 "뼛속까지 친미, 핏속까지 친일이 확인된 셈"이라고 올렸습니다. '뼛속'이 이명박 대통령을 두고 한 말이라면, '핏속'은 아마 김 기획관을 두고 한 말일 겝니다. 오싹하다 못해 섬뜩하기조차 합니다.

한일군사정보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하려다 들통이 나 나라 안팎에 파문을 일으킨 김태효 전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은 미국에서 석-박사를 딴 '미국파'이면서 일본과도 인연이 없지 않습니다.

그는 일본 게이오대 방문교수를 지냈으며, 2009년엔 제5회 '나카소네상(賞)'을 수상한 바도 있습니다. 이 상은 40세 전후의 차세대 지도자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김 비서관은 '동아시아 안보에 관한 연구와 한-미-일 관계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했다고 합니다.

항간에서 한일군사정보협정을 '매국협정'으로, 김태효 전 기획관을 '친일파'로 지칭하는 데는 그가 쓴 일본 자위대 관련 논문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5일 자 언론에는 그가 2001년, 2006년 한국전략문제연구소가 발간하는 학술지 <전략연구>에 실은 논문 두 편이 공개돼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들 논문에서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의 개입을 공공연히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김태효, 한일 간 과거사 도외시한 채 자위대 '교전권' 운운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우선 신아세아연구소 외교안보연구실장 시절에 쓴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역할 : 미·일 신방위협력 지침을 중심으로' 라는 논문에서 김 기획관은 "일본이 한반도 유사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로 되는 것은 평상시 대북 억지력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쟁 상대국은 종전 2개국(한·미)에서 3개국(한·미·일)으로 확대되는 꼴이 되며,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의도를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억제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본의 개입을 적극 옹호했습니다.

이어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시절에 쓴 '한일관계 민주동맹으로 거듭나기'라는 논문에서도 "자위대가 주권국가로서의 교전권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 영원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대단히 편협하다"고 주장하고는 "과거사 문제는 한일 안보협력 관계를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는 데 제약요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양국 간 기본적으로 추진해야 할 협력의 당위성을 해치는 파괴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한일 간의 과거사는 도외시한 채 자위대의 '교전권' 운운하고 있는 그의 국적은 대체 어디일까요?

김 기획관의 논문 두 편이 언론이 소개돼 논란이 된 날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6·25 때 이승만조차도 '일본군이 개입한다면 먼저 일본군을 축출하고 그 다음에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고 했다"며 "농민군과 의병, 독립군이 피로 써내려간 '피의 역사'를 모르는 자는 이 나라의 안보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썼습니다. 그는 또 "일본군을 한국에 들일 게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자를 일본에 보내야 할 것"이라며 "그들(자위대)을 '한반도 유사사태'에 개입시키자는 한국인도, 한국인이라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전씨는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개입을 주장한 김 기획관을 두고 '한국인이라 볼 수 없다'고 했는데 이것이 지나친 표현일까요? 제 나라 제 땅에 외세를 불러들이는 행위라면 이건 한국인이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구한말 조선의 주권을 일본에 건네주고 그 결과 이 땅에 일본을 불러들인 매국노들과 진배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들을 '친일파'라고 부르는데 김 기획관 같은 사람을 '신판 친일파'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현실론을 펴면서 외세를 불러들였고, 그러고는 '뼛속까지', '핏속까지' 외세의 주구노릇을 하였지요.

중국 침략과 큰 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조선인들을 황군(皇軍)으로 만들어 전쟁터에 내보낼 요량으로 조선인의 일본인화(化)를 시도했습니다. 미나미(南) 총독은 '내선일체'라는 미명하에 신사참배,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봉창, 동방요배 등을 추진하였으며, 급기야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습니다. 흔히 굳은 맹세를 할 때 '내 성(姓)을 갈겠다'고 할 정도로 한국인들은 가문과 성씨를 목숨처럼 중시해왔습니다. 그래서 일제의 강요로 창씨개명이 시행되자 실지로 목숨을 내던진 사람도 있습니다.

전남 곡성의 류건영(柳健永)은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엄중한 서한을 보낸 후 자결하였습니다. 또 전북 고창의 의병 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아이가 학교에서 창씨개명을 해오라는 얘기를 듣고 아이에게 창씨개명을 해준 후 돌을 안고 마당의 우물로 뛰어들었습니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앞장서서 창씨개명을 선전해댄 자가 있었으니 그는 우리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춘원 이광수였습니다. 춘원은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후 이렇게 외쳤습니다.

창씨개명 '나팔수' 춘원 이광수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1939. 12. 12) ⓒ 자료사진
"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적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매일신보> 1940. 9. 4)

총독부 관료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헌(玄櫶)의 아들로 2대에 걸쳐 친일파로 이름을 날린 현영섭(玄永燮)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사회주의자에서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잠시 옥살이를 한 후 친일로 전향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편 미나미 총독을 따라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급기야 '조선어 전폐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조선적인' 것에 애착을 갖는 민족주의자들을 페스트에 비유하며 "자살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독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조선어를 존속하도록 허용하는 한 조선인적인 사상경향도 존속한다. 우선 조선어를 폐지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어를 폐지하라. 일본어로 사물을 생각하도록 노력을 시키라. 조선인은 조선어를 망각해야 한다... 조선 민족의 독립을 공상하는 돈키호테 같은 족속들에게는 조선어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전체로서 볼 때 한낱 조선어의 문제가 대체 무엇인가. 조선인이 정말로 일본인이 되려 한다면 우선 조선어부터 망각해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新生 朝鮮の出發>, 大版屋書店, 1939)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 선생이 '친일파 제1호'로 규정한 김인승(金麟昇). 그는 근대 이후 한일간에 체결된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일본측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민족반역자입니다. 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국 특명전권대사인 구로다((黑田淸隆)가 조선으로 가는 배편에 동행을 요구하자 그는 "이번 수행에서도 만약 머리를 깎지 않고 의복을 바꾸지 않으면 이는 제가 조선인을 자처하는 일이며, 일본인의 입장에서 처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황국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끓는 물, 타는 불 속이라도 어찌 고사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무렵 이미 '골수 친일파'가 생겨났을 정도로 친일의 역사는 오래됐습니다.

문제는 '친일파'의 맥이 150년 가까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구한말에는 주권을 파는 데 앞장섰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 통치를 선전, 미화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일제의 강압통치를 미화하거나 나아가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정책에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소위 '뉴라이트' 계열의 친일인맥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이명박 정권 탄생의 디딤돌 역할을 하였으며, 새누리당 내에서 '차기 정권'으로 불리는 박근혜 권력의 주변에도 상당수 포진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난 총선 때 친일발언으로 논란이 됐던 하태경 의원과 최근 박근혜 캠프의 정치발전위원으로 위촉된 박효종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친일발언 하태경· 박효종 교수, 박근혜 캠프 정치발전위원으로 위촉

"독도는 분쟁지역"이라는 망언으로 친일 논란에 휩싸인 하태경 당선자(해운대기장을)가 4월 3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19대 국회의원 당선자 '국민행복 실천 다짐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남소연

하태경 의원은 2004년에 쓴 글에서 "내가 볼 때 살아있는 노인들 99% 이상이 친일한 사람들"이라며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거의 50년간 지속하였는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친일 안 하고 배겼겠는가?"라고 쓴 바 있습니다. 그는 '친일'이란 "일제 말기에 한반도에 사는 민초들 대다수는 자기 국가가 일본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는데 이는 그 시절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애국선열과 민족 전체를 모독한 발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해 보겠습니다.

해방을 불과 20일가량 앞둔 1945년 7월 24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청사)에서 친일파 박춘금이 주도한 '아시아민족의 해방' 강연회장에 폭탄이 터져 대회장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 조선청년 셋이 죽음을 무릅쓰고 감행한 거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조선인 민초 대다수가 자신의 국가를 일본이라고 믿었다니 하 의원은 대체 제정신으로 한 얘긴가요? 하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은 일제의 지배가 축복이었다느니, 일제 때 한국경제가 성장했다느니 하는 식의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쏙 빼닮았다고 하겠습니다.

▲ 박효종 서울대 교수. (자료사진) ⓒ 권우성
'뉴라이트' 집단은 일제통치 미화에 이어 그들의 주구노릇을 한 친일파들을 공공연히 변호하거나 친일청산을 반대해 왔습니다. 대표적 인물로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박효종 서울대 교수('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보수논객인 소설가 복거일, 한승조 전 고려대 교수,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 창출에 기여함은 물론 MB정권이 왜곡된 역사관을 갖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바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박근혜 캠프에까지 연결돼 자칫 차기 정부로까지 맥을 이어갈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박근혜 캠프는 이달 초 박효종 서울대 교수를 정치발전위원으로 위촉했는데 그는 2006년 현대사 왜곡 논란을 일으켰던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 공동대표를 맡았던 인물입니다. 당시 교과서포럼이 펴낸 한국 근현대사 최종 편집본은 '5·16 군사쿠데타'를 '5·16혁명'으로 표현하였고,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친일 찬양'이 '독재 찬양'으로 승화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최근 이상돈 전 비대위원이 "5·16은 군사혁명으로, 쿠데타로 볼 수 없다"고 한 발언도 결국은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며, 그 '뿌리'는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규정한 박근혜 의원의 발언이라고 하겠습니다.

해묵은 주제, 또는 다 지나간 '옛날 얘기'라고만 치부해오던 '친일' '친일파'의 그림자가 21세기 대한민국을 배회하며 시대를 농락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권부의 상징인 청와대와 민의의 전당인 국회, 여권의 강력한 대선후보 캠프까지 점령하고 있는 형국임에랴. 한일군사협정 체결 논란 와중에서 돌출된 '친일' 문제는 진보-보수 간의 상투적인 이념논쟁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국익과 이명박 정권, 나아가 '박근혜 권력'의 정체성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현안입니다.

▲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2일 제19대 국회 개원식에서 동료의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출처 : 박근혜 권력에 어른거리는 '친일'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