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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통합진보당 탄압

[포커스] 말 보태고 꿰맞추고… ‘누더기 녹취록’

[포커스] 말 보태고 꿰맞추고… ‘누더기 녹취록’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34차 공판… 국정원 제시한 핵심 증거 곳곳에서 짜깁기 드러나
[주간경향 1060호] 백철 기자 | 2014 01/21


1월 10일 오전 10시,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 앞은 한산했다. 이날 이곳에서는 ‘내란음모 사건’ 34차 공판이 있었다. 보수단체는 지난해 11월 말까지 수원지법 앞에서 공판 때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에 질세라 반대편에서 진보단체 회원들도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무죄를 주장하는 집회를 펼쳤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경찰이 수백명씩 동원됐다고 하니 그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수원지법도 11월 25일 “확성기 등을 동원해 연설을 하고 구호를 외치는 등 심각한 소음으로 업무수행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며 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 작년 9월 5일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수원지방법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애초 이 의원은 간단한 입장표명을 할 예정이었으나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끌려 들어가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그런데 이날 오전에는 보수·진보단체 어느 쪽도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보수단체 회원들은 법정 안에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보수단체 쪽에서 3박4일 노숙투쟁까지 벌어가며 방청권을 얻으려 하자 수원지법은 내란음모 사건에 한해 방청권을 추첨으로 나눠주고 있다.

국정원 내란음모 정치공작 공안탄압 규탄대책위(이하 대책위) 공동상황실장인 윤용배 한국진보연대 대외협력위원장은 “원래는 대책위 차원에서 매회 재판을 모니터링하려 했는데 추첨제 때문에 못하게 됐다”며 “실제 법정에 다녀온 사람 말을 들어보면 방청권을 얻은 보수단체 회원들이 법정에 오지 않아 매회 법정이 썰렁하다더라”고 말했다.


내달 중순께 1차 선고 내려질 가능성

윤 위원장의 말처럼 법정은 썰렁했다. 취재기자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판사, 검사, 변호사가 하는 말을 노트북 컴퓨터에 타이핑하고 있었다. 진보당 당원 또는 이 의원의 지지자로 보이는 5~6명의 무리들이 뒤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재판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법정 오른편, 방청석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이석기 의원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전 공판 때와 마찬가지로 흰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을 입었다.

이날 공판에서 재판부는 진보당 내부제보자 이모씨와 홍순석(진보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한동근(전 진보당 수원시위원장)씨가 대화를 나눈 이른바 ‘3인 모임’ 녹취록에 대한 증거조사를 실시했다. 현장에서 녹취록을 직접 듣고 검사, 변호사 양쪽이 제시한 녹취록을 비교 분석하는 자리다.

녹취록 내용이 법정 내에 풀리자 이 의원은 최대한 의자를 뒤로 뺀 채 눈을 감고 심각한 표정으로 녹취록 내용을 듣고 있었다. 녹취록 내용 도중 심상정 의원, 강기갑 전 의원이 거론되는 대목에서 이 의원의 볼 근육이 살짝 움직였다. 이빨을 질끈 문 것 같았다. 잘 들리지 않는 대목에서는 피식 웃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오전 심리가 끝나자 이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 뒷좌석에 앉아있던 지지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지난해 11월 12일부터 시작된 ‘내란음모 사건’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재로선 설 연휴 전인 1월 24일까지 공판 일정이 잡혀 있다. 설 연휴 전에는 공판을 마무리하고 2월 중순쯤 1심 선고가 내려질 것이라는 게 현재까지의 관측이다. 선고까지 최소한 8차례는 더 공판이 진행돼야 한다. 1심 선고가 내려져도 6월 치러질 지방선거와 맞물려 내란음모 사건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이번 내란음모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는 바로 2013년 5월 10일(곤지암 모임)과 12일(합정동 마리스타 모임)에 있었던 소위 ‘RO모임’ 녹취록이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요구서에서도 이 녹취록에 나온 내용이 가장 핵심적인 증거로 되어 있다. 지난 7일 32차 공판에서도 재판부는 이 녹취록에 대한 현장조사를 가장 먼저 실시했다.

이미 지난해 11월 18일, 국정원이 애초 알려진 녹취록(한국일보 9월 2일, 3일 보도내용) 내용을 자체적으로 272곳 수정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로 알려졌다. 수정 내역의 대부분은 이석기 의원의 발언 내용이다.

예를 들면 ‘성전 수행’은 실제로는 ‘선전 수행’이었고, ‘이 전쟁에 관한 주제를 호소하고’라는 부분은 사실은 ‘이 전쟁의 반대 투쟁을 호소하고’였다. 애초 국정원은 이 의원이 ‘5월 12일 모임’ 장소를 “결전 성지”라고 말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절두산 성지”(합정동 마리스타 교육원 인근을 지칭하는 말)라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전 수행’을 ‘성전 수행’으로 왜곡

물론 국정원의 수정내용 중에는 이 의원에게 불리한 내용도 있었다. 국정원 수정본에 따르면 북부 권역모임 발표자의 발언 중 잘 안 들리는 부분이 실제로는 “후방교란” 발언이었다. 검찰은 뒤이은 공판에서 여러 차례 이 발언이야말로 5월 12일 모임의 성격이 내란모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예비검속(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 구금하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 때문에 ‘후방교란’이란 발언이 나온 것이라며 증인의 입을 통해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예비검속 사례를 재판정에서 밝혔다. 또한 국정원의 녹취록 수정본에는 이 의원이 “이민위천, 좋은 말 아니야?”라고 언급한 대목 뒤에 잘 안 들리는 부분이 실제로는 “이게 다 주석님의 어록에 나온 거고”로 되어 있다.

변호인단은 녹취록 오류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변호인단은 국정원이 고친 것 외에 추가로 찾아낸 녹취 오류가 414건에 이르며, 이 중 237건이 없는 말을 집어넣거나, 원래 말을 바꿔버린 중대 오류라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이석기 의원 강연내용 중간에 국정원, 군, 검찰, 경찰 등 국가기관의 탄압이 자행될 수 있음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검찰 녹취록에 따르면 이 의원은 뒤이어 “테러는 다양하게 이뤄지는 거예요. 만약 작년 한 해 그런 차원이라면 비대위는 체제세력입니다”라며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변호인단에 따르면 원래 발언은 “테러는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옛날 장준하만 해도 그거랑 차원이 다르다고. DJ는 체제세력이라고”라며 장준하, 김대중의 예를 들어 진보당이 국가의 심한 탄압을 받을 수 있음을 설명하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이 외에도 변호인단은 검찰과 국정원이 “통일적인 대응”을 “폭력적인 대응”으로, “실천연대 친구들 참 가슴 아프다고”는 “가드투쟁을 안 해서 그래. 가드 확보라고”라는 식으로 당시 모임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녹취록을 고쳤다고 밝혔다. 그 외에도 11월 14일 2차 공판 때는 검찰이 제출한 47개의 녹취록 중 35개가 원본이 없는 사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녹취록 자체의 신빙성에도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국정원 정치공작 대책위 상임 집행위원장인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국정원과 검찰의 핵심 증거인 녹취록 내용만으론 내란음모 입증이 어렵고, 녹취록이 왜곡·조작된 사례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며 “내란음모는 무죄가 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내란음모 사건의 두 번째 쟁점은 국정원에 제보한 진보당 내부제보자 이모씨 증언의 신빙성 여부다.

내란음모 사건이 터진 직후 보수언론에서는 ‘비밀회합 녹취록으로 본 RO 실태’라며 RO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우두머리는 누구냐’는 질문에 ‘김정일’이라고 대답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보도했다. 또한 보수언론에 등장한 ‘공안당국 관계자’들은 RO조직이 이석기 의원을 수령으로 모셨다고도 주장했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이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요구서에도 이 같은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체포동의요구서에 따르면 RO는 지하 혁명조직이며, RO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학모(학습모임)와 이끌(주체사상을 공부하는 이념서클)을 거친 뒤 일종의 사상훈련인 ‘성원화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내란음모 사건의 핵심 증거인 국정원 녹취록에는 이 같은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제보자 이씨와 일부 피고인들의 대화내용 중 ‘회비’가 언급되는 부분은 있지만, RO라는 조직명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정부와 공안당국 관계자들이 밝힌 RO의 실체는 사실 제보자 이씨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검찰 “이 의원 집서 이적물 143건 발견”

이씨는 11월 21일 6차 공판에서 처음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이씨는 정부와 공안당국이 밝힌 RO의 실체에 대해 되풀이 설명했다.

이씨는 국정원에서 채모씨가 자신의 지휘성원이었으며 그를 통해 RO라는 조직명을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에서는 불분명하다고 말을 바꿨다. 5월 모임 때도 채씨는 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5월 10일 곤지암 모임의 주최자가 이석기 의원이었다는 것은 자신의 추측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자신의 지휘성원으로 지목한 채씨는 12월 23일 24차 공판에 출석해 자신과 이씨는 대학 선후배 사이일 뿐이며 나이가 같기 때문에 서로 지시를 내릴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북한산에서 RO 가입식을 했다는 이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채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씨의 증언은 RO모임의 실체를 파악하는 유일한 증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검찰과 국정원이 추가 증거를 발견하지 못할 경우 RO모임의 존재 자체가 의문시될 수 있다. 실제 검찰은 이 의원과 피의자들에게 국가보안법 상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검찰과 국정원이 내란음모의 ‘증거’로 제시한 여러 가지 사안들이 재판과정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은 곤지암 모임과 합정동 모임이 비밀모임이기 때문에 당일에 장소를 예약했다고 밝혔지만 12월 26일 26차 공판에서 실제로는 1~2일 전에 예약한 것으로 확인됐다. 12월 2일 12차 공판에서는 전직 남파공작원이 출석해 RO모임처럼 13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모임은 지하당 건설수칙에 맞지 않는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새롭게 등장한 쟁점도 있다. 12월 26일 26차 공판에서 검찰은 이석기 의원 자택에서 143건의 이적표현물이 담긴 CD를 발견했다며 이 의원을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추가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 CD에는 김일성 회고록, 주체사상 총서 등이 담겼다. 변호인단은 “이 의원이 해당 파일의 존재는 물론 소지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파일을 소지하고 보관함으로써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성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박래군 소장은 국가보안법 혐의까지 무죄가 될 수 있으리라고 섣불리 전망하진 않았다. 박 소장은 “진보당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처벌될지 여부와는 별개로 이 사건의 핵심은 내란음모 혐의에서 무죄를 받느냐 여부다. 국가보안법이 무죄가 나지 않는다면 이후 대책위는 국가보안법 자체의 부당성과 압수수색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부분을 끊임없이 지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포커스] 말 보태고 꿰맞추고… ‘누더기 녹취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