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말은 다 생거짓말…왜 그러고 산답니까?”
[토요판] 뉴스분석 왜?
원정화 동생의 폭로
[한겨레] 연길/허재현 기자 | 등록 : 2014.07.25 18:55 | 수정 : 2014.07.26 14:57
“이야. 그게 다 우리 언니가 한 말입니까? 그거 암송하느라 언니가 고생이 많았겠구만요. 언니는 남한서 대체 왜 그러고 산답니까?”
‘탈북 여간첩 1호’ 원정화(40)씨가 검찰 조사에서 털어놓은 간첩 활동 내용을 기자가 김지혜(가명·35)씨에게 설명하자, 그는 시종일관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워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원씨의 동생이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달라 성은 다르다. 원씨의 생부는 원석희(사망)씨이고, 김씨의 생부 김동순(69)씨는 2000년 탈북해 한국에서 살고 있다.
김지혜씨는 지난해 12월 탈북했다. 그는 2008년 9월 2일 북한 보위부에 체포된 뒤 4년4개월가량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의 체포 사유는 ‘언니 원정화’였다. 원씨는 2008년 한국 경찰에 간첩 혐의로 체포된 뒤 ‘동생 김씨가 아버지 김동순씨와 함께 북한 보위부 요원’이라고 고백했다. 북한 당국은 원씨의 진술 내용을 알게 된 뒤 김씨를 체포해 ‘왜 보위부 행세를 하고 다니느냐. 남한 간첩 아니냐’고 추궁했다고 한다. 원씨의 말대로 김지혜씨가 보위부 요원이라면, 보위부 요원이 보위부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 황당한 상황이다.
탈북 여간첩 1호 원씨의 아버지 다른 여동생 김씨
지난해 12월 탈북해 중국행
“언니는 대학을 간 적도 탈북자를 색출한 적도 없다”
원씨가 동생이 보위부라고 진술하는 바람에
북한에서 왜 보위부 행세했냐며 옥살이
언니한테 전화해 따지니 “검찰이 딸을 데리고 있어서…”
“언니는 금성정치대학 다니지 않았다”
김동순씨는 원씨가 ‘아버지도 간첩’이라고 주장한 탓에 2008년 9월 구속기소 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2009년 2월 무죄로 풀려났다. (다만, 지난 3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원씨는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말한 건 거짓 자백이었다’고 털어놓았다.(<한겨레> 3월 22일치 1·3·4면 참조)) 김씨는 원씨의 검찰 진술이 모두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제 원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가족이 원씨 동생과 양아버지 김씨까지 두명으로 늘었다.
원정화씨는 2008년 8월 27일 당시 합동수사본부(검경·기무사·국정원)가 발표한 간첩이다. 합동수사본부 수사 결과를 보면, 원씨는 집안 성분이 좋아 열다섯살 때인 1989년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중앙위원회에 발탁돼 간부 양성 교육을 받고, 북한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로 통하는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했다.
합동수사본부 수사 결과에 따르면, 원정화는 1998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 공작원으로 선발된 뒤 2001년 탈북자로 위장해 한국으로 잠입했다. 안보 강사로 활동하며 군부대 정보를 북에 넘기고, 황장엽 암살 지시를 받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게 ‘한국판 마타하리-원정화 사건’의 핵심 내용이다. 원씨는 5년형 복역을 끝내고 지난해 7월 출소했다. 그러나 ‘간첩 원정화’는 앞뒤가 맞지 않는 간첩 활동 내용으로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겨레>는 원정화씨의 동생 김지혜씨를 지난 1월 중국에서 만났지만 그의 신변 안전이 우선이기에 인터뷰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화 간첩 조작 논란’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선 이해 당사자들의 주장이 함께 소개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김지혜씨 쪽의 양해를 구하고 뒤늦게 인터뷰 내용의 핵심 부분만을 공개한다.
“2008년 9월 함경북도 청진시 제가 운영하던 상점 앞에서 갑자기 잡혀갔어요. 보위부가 ‘원정화가 왜 너를 보위부 요원이라고 하느냐. 조국을 배반한 네 언니를 위해 무엇을 도왔냐’고 계속 추궁했어요. 하루 종일 마룻바닥에 앉아 있는 벌을 서며 그렇게 감옥살이를 했어요. 우리 집안은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제가 감옥에서 나오니까 어머니는 거지가 다 되어 살고 있더라고요. 간나 새끼. 내가 정말 언니 하나를 잘못 두는 바람에….” 김지혜씨는 씩씩거렸다.
김씨는 원정화씨가 수사 과정에서 실토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자세한 내용을 김씨가 알 수 없기에, 기자가 먼저 설명을 하고 김씨의 입장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원씨의 아버지 원석희씨의 행적이다. 원씨는 아버지가 1973년 공작원으로 남파된 뒤 숨졌고 원씨는 그래서 ‘혁명열사 유자녀’로 대우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씨가 어린 나이에 사로청에 뽑혀간 이유도 이런 배경 덕분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언니는 소학교 4학년 때(1986년께) (김동순씨와 어머니 최아무개씨 밑에서 자라다가) 원석희에게 보내진 적 있어요. 원석희가 언니를 보고 싶어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보냈어요. 원석희는 모르핀 중독자였어요.”
김씨의 말대로라면 원씨 아버지는 1973년 숨진 사람이 아니다. <한겨레>는 지난 3월 원씨를 병원에서 치료한 적 있는 한 익명의 탈북자(83·의사)를 만나 ‘원석희는 모르핀 중독자이고 남파 간첩으로 선발되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김씨와 이 탈북 의사의 증언은 일치한다.
원정화씨가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김씨는 주장했다.
“언니는 도둑질을 많이 해서 매일 부모님께 혼나면서 살았어요. (1991년께) 언니가 속도전 청년 돌격대를 가게 됐는데 일이 힘들어서 얼마 못 가 그냥 돌아왔어요. 돌격대는 그냥 군대식으로 막노동하는 곳이에요. 그러고 나서 청진시 고무산 시멘트공장에서도 일했는데 거기서도 얼마 일 못했고요. (1993년께) 장사하면서 사기를 쳐서 교화소에 잡혀가 살기도 했어요. 행실이 영 안 좋았어요. 게다가 언니는 이혼자 가정(원정화 생모는 1974년께 원석희씨와 이혼해 1978년 김동순씨와 결혼)이란 집안 배경 탓에 금성정치대학에 갈 수가 없어요. 언니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못했어요.”
인터뷰 도중 원씨와 휴대전화로 통화
원정화씨는 1998년 12월 평양의 의부 고모집에 머물다가 5촌 아저씨뻘인 방광철의 소개로 북한 보위부 요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 갑자기 보위부에서 원씨를 요원으로 선발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김지혜씨는 반박했다.
“언니가 평양 고모집에 가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고모의 사위가 중앙당 간부여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배경 안 좋은 사람들을 집에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도 고모집에 머물 수 없었고요. (김지혜씨 큰아버지는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적 있다.) 또 평양은 사전에 허가받은 사람만 평양역에서 신분증 검사 받은 뒤 들어갈 수 있어요. 언니가 가고 싶다고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1998년 당시 김지혜씨는 함경북도 나진시 식당에서 일하며 지내고 있었고 원씨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원정화씨는 1998년 12월 말 보위부 요원이 된 뒤 중국 연길시 등에서 약 2년간 탈북자를 색출해 북송시키는 등의 일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씨는 박미혜, 김성애라는 탈북자의 실명까지 언급하며 이들을 보위부에 신고해 북송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남한 사람 7명(윤익훈·47살 등)을 잡아 북으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연길에서는 역시 보위부 요원으로 중국에 나와 있던 동생 김지혜씨 집에서 동거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 주장 역시 반박했다.
(황당한 듯 웃으면서) “그때는 그냥 언니(원정화)랑 다방에서 음식 날라주고 그런 일 하면서 보냈어요. 다방 밑에 노래방이 있었는데 노래방 도우미도 했고요. 언니가 박미혜, 김성애를 북송시켰다고 그래요? 거짓말 좀 하지 말라고 하세요. 박미연과 전성애라는 제 탈북자 친구가 있었어요. 한족 동무가 공안에 신고해서 미연이는 그렇게 잡혀간 거고요. 성애는 나돌아다니면서 일하다 탈북자인 게 탄로나서 잡혀간 거예요.”
원씨는 동생이 보위부 요원임을 설명하며 김씨가 자신과 함께 2007년 5월 19일, 21일 두차례에 걸쳐 중국 길림성 도문시를 통해 북한 남양에 다녀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가 보위부에게서 가짜 달러를 받아오거나 마약을 받아왔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김씨에게 이 내용을 설명하자 그는 화를 냈다.
“이런 생거짓말이 있나. 나는 도문으로 간 적이 없는데, 이야… (언성이 높아지며) 내가 지금 이 간나 새끼. ‘내 니하고 언제 도문 갔다고 오고 니 지금 정상이냐’고 내(가 원정화에게) 묻고 싶네요. 나는 마약이라는 건 절대 손 안 댑니다.”
원씨는 김창성이라는 이름의 조선족 사업가가 2002년 10월 중국 연길시 백산호텔 커피숍에서 “지혜의 도움으로 여권도 없이 평양까지 가서 친척들 만나고 왔다. 지혜가 중앙보위부까지 다 꿰고 힘이 세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이 또한 반박했다.
“그 사람은 평양에 간 게 아니에요. 친척이 평양에 있는데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그래서 김창성씨 친척에게 연락해서 함경북도 회령시(북-중 인접 도시)까지 오게 해서 그곳에서 만나게 한 겁니다. 김창성은 조선족이기 때문에 북한 방문이 가능하지만 평양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요. 친척에게 연락 정도 취하는 건 보위부 도움 없이도 하는 일이니까 그냥 그 정도 도와준 것뿐입니다.”
김씨는 그 자리에서 김창성씨를 연결해 기자와 통화를 하게 했다. 그는 “원정화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평양에 간 적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관련 지역의 보위부 반탐부부장을 알고 지낸 적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역을 할 때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알고 지내는 것이고 북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원씨가 이것을 과장해 마치 김동순씨 가정이 보위부 요원인 것처럼 만들었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김씨는 원씨와 통화를 하고 싶어했다. <한겨레>는 원씨의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김씨는 자신의 전화로 기자가 보는 앞에서 원씨와 통화를 했다. 원씨는 갑자기 걸려온 동생의 전화에 당황해하며 처음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씨가 원씨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해서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냐’고 따지자, 원씨는 울먹이면서 “미안하다. 검찰이 내 딸을 데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답했다. 원씨가 2008년 구속됐을 때 그의 딸(당시 6살)은 수사기관이 보호하고 있었다.
내사 책임자 소아무개씨의 견해
원씨는 최근 ‘2004년께 대북 무역 업무차 드나들던 중국 단둥 주재 북한무역대표부의 김교학 부대표에게 북한에 남아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 북한에 돌아갈 방법이 없는지 문의한 적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김 부대표는 이후 원씨에게 몇 가지 ‘심부름’을 시키며 남한 정보를 캐내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김씨는 김교학 부대표의 사진을 원씨가 보여준 적 있다고 했다. “언니가 (2006년께) 연길에서 김교학의 사진을 내게 한번 보여준 적은 있어요. 그냥 일 보러 갔다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고 했어요.” 북한무역대표부 간부가 원씨의 사진 촬영에 응할 정도면 원씨와 일반적 관계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 때문에 원씨가 북한을 위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핵심은, 원씨가 주장하고 있는 자신의 간첩 활동 내용이 사실관계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원씨의 ‘간첩 스토리’ 일체가 조작인지, 일부가 조작인지 그 해답은 현재로서는 단정해 제시하기 어렵다.
<한겨레>는 최근 원정화 내사 책임자였던 소아무개(61·2012년 은퇴) 전 경기경찰청 보안수사대장을 만나 원씨의 간첩 혐의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는 2006년 말부터 2007년 3월까지 원씨 수사를 맡았다. 소 전 대장은 “원정화가 간단한 정보 심부름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도 “훈련을 받고 남파된 간첩으로 보긴 어렵다”고 단언했다.
원정화에 대한 내사를 비밀리에 진행하며 사생활을 캐내었지만 원씨를 남파 간첩으로 볼 만한 근거가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 소 전 대장의 판단이었다. 경찰은 원씨 몸의 근육 상태 등까지 확인했지만 전문 훈련을 받은 사람의 근육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한겨레>는 자세한 수사방식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설명을 들었다.
소 전 대장은 2007년 3월 이후 원정화 수사를 맡은 경기청 대공수사팀이 원정화 사건을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키우려 한다는 느낌을 받고 내부에서 항의를 많이 했다고 전했다. 소 전 대장은 그 일로 내부 감찰을 받기도 했다.
소 전 대장은 “간첩 한명을 잡으면 승진이 보장되고 경찰 인생에서 탄탄대로를 걷게 되기에 보안 수사팀은 늘 여러 유혹에 시달린다”고 설명했다. 당시 ‘원정화 수사팀’의 구성은 청와대에 보고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탈북 여간첩 1호’ 원정화의 검거를 합동수사본부가 발표한 것은 2008년 8월 27일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에 따른 성난 민심의 잔불이 남아 있을 때였다.
소 전 대장은 “지금 원정화 진술 내용들이 사실관계가 안 맞는 부분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원정화 사건은 특검이 도입되거나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필요한 사안이다”고 주장했다.
출처 : “언니 말은 다 생거짓말…왜 그러고 산답니까?”
[토요판] 뉴스분석 왜?
원정화 동생의 폭로
[한겨레] 연길/허재현 기자 | 등록 : 2014.07.25 18:55 | 수정 : 2014.07.26 14:57
▲ 18일 와 모처에서 만난 원정화씨는 인터뷰 내내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검찰의 조사 과정을 밝힐 때는 화난 표정을 지었고 목소리가 커졌다. 아버지 김동순씨 이야기를 할 때는 한참을 울먹이기도 했다. 원씨는 2008년 당시 자신이 했던 검찰 진술을 뒤집으면 위증죄로 고소당하는 것 아니냐며 걱정했다. 더는 아버지에게 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
▶ ‘탈북 여간첩 1호’ 원정화는 정말 남파 간첩이 맞을까요. 그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원정화씨의 의붓아버지 김동순씨 혼자서만 원씨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런데 원씨의 여동생도 최근 탈북해 언니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한겨레>는 올해 1월 원씨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그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보도하지 않는 조건으로 만났습니다. 최근 재협의를 하여 인터뷰 내용을 공개합니다.
“이야. 그게 다 우리 언니가 한 말입니까? 그거 암송하느라 언니가 고생이 많았겠구만요. 언니는 남한서 대체 왜 그러고 산답니까?”
‘탈북 여간첩 1호’ 원정화(40)씨가 검찰 조사에서 털어놓은 간첩 활동 내용을 기자가 김지혜(가명·35)씨에게 설명하자, 그는 시종일관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워했다.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원씨의 동생이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달라 성은 다르다. 원씨의 생부는 원석희(사망)씨이고, 김씨의 생부 김동순(69)씨는 2000년 탈북해 한국에서 살고 있다.
김지혜씨는 지난해 12월 탈북했다. 그는 2008년 9월 2일 북한 보위부에 체포된 뒤 4년4개월가량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의 체포 사유는 ‘언니 원정화’였다. 원씨는 2008년 한국 경찰에 간첩 혐의로 체포된 뒤 ‘동생 김씨가 아버지 김동순씨와 함께 북한 보위부 요원’이라고 고백했다. 북한 당국은 원씨의 진술 내용을 알게 된 뒤 김씨를 체포해 ‘왜 보위부 행세를 하고 다니느냐. 남한 간첩 아니냐’고 추궁했다고 한다. 원씨의 말대로 김지혜씨가 보위부 요원이라면, 보위부 요원이 보위부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 황당한 상황이다.
탈북 여간첩 1호 원씨의 아버지 다른 여동생 김씨
지난해 12월 탈북해 중국행
“언니는 대학을 간 적도 탈북자를 색출한 적도 없다”
원씨가 동생이 보위부라고 진술하는 바람에
북한에서 왜 보위부 행세했냐며 옥살이
언니한테 전화해 따지니 “검찰이 딸을 데리고 있어서…”
“언니는 금성정치대학 다니지 않았다”
김동순씨는 원씨가 ‘아버지도 간첩’이라고 주장한 탓에 2008년 9월 구속기소 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2009년 2월 무죄로 풀려났다. (다만, 지난 3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원씨는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말한 건 거짓 자백이었다’고 털어놓았다.(<한겨레> 3월 22일치 1·3·4면 참조)) 김씨는 원씨의 검찰 진술이 모두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제 원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가족이 원씨 동생과 양아버지 김씨까지 두명으로 늘었다.
원정화씨는 2008년 8월 27일 당시 합동수사본부(검경·기무사·국정원)가 발표한 간첩이다. 합동수사본부 수사 결과를 보면, 원씨는 집안 성분이 좋아 열다섯살 때인 1989년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중앙위원회에 발탁돼 간부 양성 교육을 받고, 북한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로 통하는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했다.
합동수사본부 수사 결과에 따르면, 원정화는 1998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 공작원으로 선발된 뒤 2001년 탈북자로 위장해 한국으로 잠입했다. 안보 강사로 활동하며 군부대 정보를 북에 넘기고, 황장엽 암살 지시를 받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게 ‘한국판 마타하리-원정화 사건’의 핵심 내용이다. 원씨는 5년형 복역을 끝내고 지난해 7월 출소했다. 그러나 ‘간첩 원정화’는 앞뒤가 맞지 않는 간첩 활동 내용으로 조작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겨레>는 원정화씨의 동생 김지혜씨를 지난 1월 중국에서 만났지만 그의 신변 안전이 우선이기에 인터뷰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화 간첩 조작 논란’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선 이해 당사자들의 주장이 함께 소개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김지혜씨 쪽의 양해를 구하고 뒤늦게 인터뷰 내용의 핵심 부분만을 공개한다.
“2008년 9월 함경북도 청진시 제가 운영하던 상점 앞에서 갑자기 잡혀갔어요. 보위부가 ‘원정화가 왜 너를 보위부 요원이라고 하느냐. 조국을 배반한 네 언니를 위해 무엇을 도왔냐’고 계속 추궁했어요. 하루 종일 마룻바닥에 앉아 있는 벌을 서며 그렇게 감옥살이를 했어요. 우리 집안은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제가 감옥에서 나오니까 어머니는 거지가 다 되어 살고 있더라고요. 간나 새끼. 내가 정말 언니 하나를 잘못 두는 바람에….” 김지혜씨는 씩씩거렸다.
김씨는 원정화씨가 수사 과정에서 실토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자세한 내용을 김씨가 알 수 없기에, 기자가 먼저 설명을 하고 김씨의 입장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원씨의 아버지 원석희씨의 행적이다. 원씨는 아버지가 1973년 공작원으로 남파된 뒤 숨졌고 원씨는 그래서 ‘혁명열사 유자녀’로 대우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씨가 어린 나이에 사로청에 뽑혀간 이유도 이런 배경 덕분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언니는 소학교 4학년 때(1986년께) (김동순씨와 어머니 최아무개씨 밑에서 자라다가) 원석희에게 보내진 적 있어요. 원석희가 언니를 보고 싶어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보냈어요. 원석희는 모르핀 중독자였어요.”
김씨의 말대로라면 원씨 아버지는 1973년 숨진 사람이 아니다. <한겨레>는 지난 3월 원씨를 병원에서 치료한 적 있는 한 익명의 탈북자(83·의사)를 만나 ‘원석희는 모르핀 중독자이고 남파 간첩으로 선발되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을 보도한 바 있다. 김씨와 이 탈북 의사의 증언은 일치한다.
원정화씨가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김씨는 주장했다.
“언니는 도둑질을 많이 해서 매일 부모님께 혼나면서 살았어요. (1991년께) 언니가 속도전 청년 돌격대를 가게 됐는데 일이 힘들어서 얼마 못 가 그냥 돌아왔어요. 돌격대는 그냥 군대식으로 막노동하는 곳이에요. 그러고 나서 청진시 고무산 시멘트공장에서도 일했는데 거기서도 얼마 일 못했고요. (1993년께) 장사하면서 사기를 쳐서 교화소에 잡혀가 살기도 했어요. 행실이 영 안 좋았어요. 게다가 언니는 이혼자 가정(원정화 생모는 1974년께 원석희씨와 이혼해 1978년 김동순씨와 결혼)이란 집안 배경 탓에 금성정치대학에 갈 수가 없어요. 언니는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을 못했어요.”
인터뷰 도중 원씨와 휴대전화로 통화
원정화씨는 1998년 12월 평양의 의부 고모집에 머물다가 5촌 아저씨뻘인 방광철의 소개로 북한 보위부 요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왜 갑자기 보위부에서 원씨를 요원으로 선발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김지혜씨는 반박했다.
“언니가 평양 고모집에 가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고모의 사위가 중앙당 간부여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배경 안 좋은 사람들을 집에 들여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도 고모집에 머물 수 없었고요. (김지혜씨 큰아버지는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적 있다.) 또 평양은 사전에 허가받은 사람만 평양역에서 신분증 검사 받은 뒤 들어갈 수 있어요. 언니가 가고 싶다고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1998년 당시 김지혜씨는 함경북도 나진시 식당에서 일하며 지내고 있었고 원씨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원정화씨는 1998년 12월 말 보위부 요원이 된 뒤 중국 연길시 등에서 약 2년간 탈북자를 색출해 북송시키는 등의 일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씨는 박미혜, 김성애라는 탈북자의 실명까지 언급하며 이들을 보위부에 신고해 북송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남한 사람 7명(윤익훈·47살 등)을 잡아 북으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연길에서는 역시 보위부 요원으로 중국에 나와 있던 동생 김지혜씨 집에서 동거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 주장 역시 반박했다.
(황당한 듯 웃으면서) “그때는 그냥 언니(원정화)랑 다방에서 음식 날라주고 그런 일 하면서 보냈어요. 다방 밑에 노래방이 있었는데 노래방 도우미도 했고요. 언니가 박미혜, 김성애를 북송시켰다고 그래요? 거짓말 좀 하지 말라고 하세요. 박미연과 전성애라는 제 탈북자 친구가 있었어요. 한족 동무가 공안에 신고해서 미연이는 그렇게 잡혀간 거고요. 성애는 나돌아다니면서 일하다 탈북자인 게 탄로나서 잡혀간 거예요.”
원씨는 동생이 보위부 요원임을 설명하며 김씨가 자신과 함께 2007년 5월 19일, 21일 두차례에 걸쳐 중국 길림성 도문시를 통해 북한 남양에 다녀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가 보위부에게서 가짜 달러를 받아오거나 마약을 받아왔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김씨에게 이 내용을 설명하자 그는 화를 냈다.
“이런 생거짓말이 있나. 나는 도문으로 간 적이 없는데, 이야… (언성이 높아지며) 내가 지금 이 간나 새끼. ‘내 니하고 언제 도문 갔다고 오고 니 지금 정상이냐’고 내(가 원정화에게) 묻고 싶네요. 나는 마약이라는 건 절대 손 안 댑니다.”
원씨는 김창성이라는 이름의 조선족 사업가가 2002년 10월 중국 연길시 백산호텔 커피숍에서 “지혜의 도움으로 여권도 없이 평양까지 가서 친척들 만나고 왔다. 지혜가 중앙보위부까지 다 꿰고 힘이 세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이 또한 반박했다.
“그 사람은 평양에 간 게 아니에요. 친척이 평양에 있는데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그래서 김창성씨 친척에게 연락해서 함경북도 회령시(북-중 인접 도시)까지 오게 해서 그곳에서 만나게 한 겁니다. 김창성은 조선족이기 때문에 북한 방문이 가능하지만 평양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요. 친척에게 연락 정도 취하는 건 보위부 도움 없이도 하는 일이니까 그냥 그 정도 도와준 것뿐입니다.”
김씨는 그 자리에서 김창성씨를 연결해 기자와 통화를 하게 했다. 그는 “원정화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평양에 간 적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중국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관련 지역의 보위부 반탐부부장을 알고 지낸 적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역을 할 때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알고 지내는 것이고 북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원씨가 이것을 과장해 마치 김동순씨 가정이 보위부 요원인 것처럼 만들었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김씨는 원씨와 통화를 하고 싶어했다. <한겨레>는 원씨의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주었고 김씨는 자신의 전화로 기자가 보는 앞에서 원씨와 통화를 했다. 원씨는 갑자기 걸려온 동생의 전화에 당황해하며 처음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씨가 원씨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해서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냐’고 따지자, 원씨는 울먹이면서 “미안하다. 검찰이 내 딸을 데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답했다. 원씨가 2008년 구속됐을 때 그의 딸(당시 6살)은 수사기관이 보호하고 있었다.
▲ 원정화씨가 주장하는 간첩 행적은 모순된 내용들이 많다. 원씨 동생의 새로운 반박에 대해 원씨에게 해명을 듣고자 하였으나 원씨는 <한겨레>의 인터뷰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 3월의 원씨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
내사 책임자 소아무개씨의 견해
원씨는 최근 ‘2004년께 대북 무역 업무차 드나들던 중국 단둥 주재 북한무역대표부의 김교학 부대표에게 북한에 남아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 북한에 돌아갈 방법이 없는지 문의한 적 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김 부대표는 이후 원씨에게 몇 가지 ‘심부름’을 시키며 남한 정보를 캐내도록 지시했다고 했다.
김씨는 김교학 부대표의 사진을 원씨가 보여준 적 있다고 했다. “언니가 (2006년께) 연길에서 김교학의 사진을 내게 한번 보여준 적은 있어요. 그냥 일 보러 갔다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고 했어요.” 북한무역대표부 간부가 원씨의 사진 촬영에 응할 정도면 원씨와 일반적 관계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 때문에 원씨가 북한을 위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핵심은, 원씨가 주장하고 있는 자신의 간첩 활동 내용이 사실관계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원씨의 ‘간첩 스토리’ 일체가 조작인지, 일부가 조작인지 그 해답은 현재로서는 단정해 제시하기 어렵다.
<한겨레>는 최근 원정화 내사 책임자였던 소아무개(61·2012년 은퇴) 전 경기경찰청 보안수사대장을 만나 원씨의 간첩 혐의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는 2006년 말부터 2007년 3월까지 원씨 수사를 맡았다. 소 전 대장은 “원정화가 간단한 정보 심부름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도 “훈련을 받고 남파된 간첩으로 보긴 어렵다”고 단언했다.
원정화에 대한 내사를 비밀리에 진행하며 사생활을 캐내었지만 원씨를 남파 간첩으로 볼 만한 근거가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 소 전 대장의 판단이었다. 경찰은 원씨 몸의 근육 상태 등까지 확인했지만 전문 훈련을 받은 사람의 근육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한겨레>는 자세한 수사방식을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설명을 들었다.
소 전 대장은 2007년 3월 이후 원정화 수사를 맡은 경기청 대공수사팀이 원정화 사건을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키우려 한다는 느낌을 받고 내부에서 항의를 많이 했다고 전했다. 소 전 대장은 그 일로 내부 감찰을 받기도 했다.
소 전 대장은 “간첩 한명을 잡으면 승진이 보장되고 경찰 인생에서 탄탄대로를 걷게 되기에 보안 수사팀은 늘 여러 유혹에 시달린다”고 설명했다. 당시 ‘원정화 수사팀’의 구성은 청와대에 보고되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탈북 여간첩 1호’ 원정화의 검거를 합동수사본부가 발표한 것은 2008년 8월 27일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에 따른 성난 민심의 잔불이 남아 있을 때였다.
소 전 대장은 “지금 원정화 진술 내용들이 사실관계가 안 맞는 부분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원정화 사건은 특검이 도입되거나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필요한 사안이다”고 주장했다.
출처 : “언니 말은 다 생거짓말…왜 그러고 산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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