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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고(故) 백남기 농민의 삶

고(故) 백남기 농민의 삶
민주주의와 민족농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쳐
[민중의소리] 권종술 기자 | 발행 : 2016-09-25 16:33:07 | 수정 : 2016-09-25 16:44:41


경찰 물대포에 의해 사경을 헤매다 25일 세상을 떠난 고 백남기 농민은 농민이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농민운동 1세대다. 또한 대학시절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되는 등 민주주의를 지지기 위해 앞장서온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한 고 백남기 농민의 지난 삶을 돌아봤다.

고 백남기 농민은 1947년 전남 보성군 웅치면에서 태어나 광주서중학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중앙대에 입학했다.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 때 시위를 벌이다 1차 제적됐고, 1973년 10월에는 교내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2차 제적됐고, 이후 가르멜 수도원 등에서 생활했다.

▲ 87년 고흥 해창만 염수피해 보상투쟁에서 농성 중인 백남기 농민(가운데) ⓒ가톨릭농민회 제공

1980년 복학 해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재건하는데 앞장서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을 지냈다. 1980년 5월 15일 학생 4천여 명이 중앙대 흑석동 캠퍼스에서 서울역까지 행진 진행할 때 이를 앞장서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이틀 뒤인 5월 17일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 확대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됐다. 이로 인해 퇴학 처분을 받았고, 1980년 8월 계엄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1981년 3.1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고 백남기 농민은 가석방된 이후 전남 보성군 웅치면으로 내려갔다. 이곳은 그의 집안이 9대째 내리 살아온 고향이다. 그의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을 지낸 뒤, 웅치면 면장을 지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꾸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 2005년 징을 들고 있는 백남기 농민(앞에서 두번째) ⓒ가톨릭농민회 제공

1987년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을 지냈고,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1989~1991),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1992~1993) 등을 지냈다. 1992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에 나서, 1994년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을 지냈다.

2014년엔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을 역임했고, 2015년엔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을 지내는 등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뒤에서 지원해왔다. 그는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여 왔다.


출처  민주주의와 민족농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고 백남기 농민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