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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거길 왜 갔냐고요? 세 아이의 아빠라서요

거길 왜 갔냐고요? 세 아이의 아빠라서요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이진순의 열림 | 고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
[한겨레] 글 이진순 풀뿌리실험실 ‘와글’ 대표,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녹취 심지연 | 등록 : 2016-10-07 19:08 | 수정 : 2016-10-07 20:16


▲ 안방 벽면에 붙은 가훈 ‘참 향기로운 가족’ 앞에 김혜연씨와 세 자녀가 손을 맞잡고 서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참 향기로운 가족

‘세월호의 의인’ 민간잠수사 고 김관홍
아내 김혜연이 말하는 ‘세월호의 기억’


잠수사들이 일당 백만원을 받고 시신 한 구당 500만원의 인센티브를 받는다”는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이 보도되었을 때에도, 잠수사들은 산소를 공급하는 생명줄에 목숨을 매달고 수심 40미터 아래의 외로운 주검을 찾아 검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인터넷도, 신문, 방송도 닿지 않는 바지선에서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고 새우잠을 자면서 그들은 잠수의 기본규칙도 어겨가며 하루 네댓번씩 아이들을 찾아 심해로 내려갔다. 차가운 물속에서 공포에 질려 뒤엉킨 시신을 더듬어 품에 안아 올리는 동안, 그들도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잠수병으로 인한 심각한 후유증과 ‘돈 벌러 갔다’는 주변의 오해, 법적인 문책뿐이었다. 결국 지난 6월 17일 세월호의 의인으로 불리던 김관홍 잠수사는 오랜 트라우마와 후유증에 시달리다 심장 쇼크로 세상을 떴다. 그에겐 38살의 아내와 11살(라은), 9살(다은), 7살(효)짜리 세 자녀가 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묻는다. “다른 데선 사고 나도 거의 다 구조하던데 우리나란 왜 그래? 우리나라엔 그렇게 사람이 없어?”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뭐라고 답할 것인가. 안방 벽면에 붙은 가훈 ‘참 향기로운 가족’ 앞에 김혜연씨와 세 자녀가 손을 맞잡고 서 있다. 지난달 28일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씨를 만났다.

▲ 불이 난 원룸에서 사람들을 깨우고 미처 피하지 못해 희생당한 학생 이야기를 뉴스에서 본 딸이 말했다. “아빠도 의인이라고 그러던데. 나 의인이 되기보다는 가족들이랑 함께 오래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김혜연씨는 아빠가 한 일로 292명의 가족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으니 아빠가 좋은 일을 한 거라고 얘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저는 잠수사이기 이전에 국민입니다. 국민이기 때문에 달려간 거고, 제 직업이, 제가 가진 기술이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간 것일 뿐이지 (제가) 애국자나 영웅은 아니에요…. 고위 공무원들한테 묻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지도층이신 고위 공무원께서는 왜 모르고 기억이 안 나는지….” (김관홍 잠수사의 증언.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 2015년 12월 16일)

살려달라고 창문을 두드리던 아이들을 품고 세월호가 뒤집어졌을 때, 우리 사회 부패와 무능의 치부도 적나라하게 밑장을 드러냈다. 배에 버리고 나온 304명 가운데 단 한 명도 살려내지 못한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은 ‘사상 최대의 사기극’으로 끝났다. 그나마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민간잠수사들의 공이었다. 참사가 나고 7월 10일 일방적인 수색중단 통지를 받을 때까지 희생자 292명의 시신을 수습해 올린 것은, 해경도, 해군도 아닌 단 25명의 민간잠수사들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지난 6월 17일, ‘세월호의 의인’으로 불려온 김관홍 잠수사가 숨진 채 쓰러져 있는 걸 가족들이 발견했다. 11살, 9살, 7살 삼남매가 학교에 가려고 엄마와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전날 밤 아버지가 삼남매에게 주려고 사온 초콜릿 세 개가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할까? 장하고 자랑스런 일을 한 아버지가 팽목항 앞바다를 다녀온 뒤 점점 폐인이 되어간 이유를, 이 뻔뻔하고 치졸한 세상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을, 그래도 끝까지 가슴에서 내려놓지 않았던 사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그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김관홍 잠수사의 부인 김혜연(38)씨를 찾아볼 용기를 낸 건, 김관홍을 모델로 한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가 출간되고, 부인이 운영하는 꽃집의 상품권과 책을 한데 묶어 파는 패키지 상품이 출시되었단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누군가 올린 블로그에, 부인이 운영하는 화원 ‘꽃바다’(fbada.com)의 명함이 실려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한 번도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유가족인데, 인터뷰를 청하는 게 무례는 아닐까? 인터뷰 요청은 조심스러웠다. 망설임 끝에 부인은 인터뷰를 허락했다. 남편을 대신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지난달 28일, 그녀가 알려준 주소지로 찾아갔다.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의 아담한 빌라였다.


굵고 짧게 살고 싶다던 남편

“이렇게 굵고 짧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이 화분은 자기 거라고, (화원 할 때) 어디 팔지 말라고 했죠.”

인삼 모양이지만 그보다 훨씬 굵고 튼실하게 생긴 뿌리가 흙을 뚫고 솟아올라 있었다. 남편이 특별히 좋아했다는 ‘와인쥐손이’ 화분을 바라보며 김혜연이 말했다. 아이들 장난감으로 가득한 앞 베란다 창틀에 작은 화분들이 오종종하니 진열되어 있었다. 남편이 애지중지했던 ‘좀백자단’이며 ‘꿩의다리’ 같은 낯선 야생화 이름이 적힌 화분이 아이들 점프하며 뛰어노는 트램펄린 옆에 놓여 있었다.

- 인터뷰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 언론 접촉은 피하셨던 것 같아요. 장례식 기사에 실린 사진에도 얼굴은 가리고 나오셨던데요.

“지금 큰애가 사춘기거든요. 4학년 딸이요. 엄청 예민할 때라, 아이들도 인터넷을 다 보니까 조심스러웠어요. 지금은 많이 안정이 돼서 제가 인터뷰하는 거, 자기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 아, 그래요?

“꿈이 기자로 바뀌었대요.(웃음) 사회부 기자를 하고 싶대요.”

▲ 다섯 식구의 세월호 기억목걸이. 강재훈 선임기자


안방에는 삼남매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남편은 아이 욕심이 많았다. 두 살 터울로 삼남매를 낳고도 더 낳자고 해서, 부인의 타박을 받기도 했다. 삼남매와 함께한 가족사진 속의 김관홍은 다부지고 옹골찬 체격이 그가 좋아하던 야생화 뿌리를 닮았다.

- 고양시에 사시는 줄 알았는데, 거긴 화원만 있는 건가요?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한 달쯤 돼요. 전에 살던 집은, 야생화 키우는 하우스 안에 살림집을 겸한 거였는데, 신랑이 거기서 안 좋은 일을 겪고 보니 계속 살기가 어려웠어요. 아이들이 안 봤으면 모르겠는데 아침에 아빠 쓰러진 걸 거기서 다 같이 봤고. 여자 혼자서 야생화 관리하는 것도 힘에 부치고요. 보안도 허술하고….”

- 장례 치르고 이리 옮긴 거군요.

“네. 화원도 정리하고 지금은 인터넷 주문받는 일만 해요.”

얘기를 나누는 중에도 그에게 화환을 주문하는 전화가 간간이 걸려왔다. 어린 아이들을 두고 엄마 혼자 밖에 나가 일하기가 힘들어, 집에서 인터넷으로 화환이나 꽃바구니를 주문받고 중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 원래 화원은 부인이 하시던 건가요?

“둘이 같이 했죠. 시아버지가 야생화 농장을 하세요. 애기아빠가 원체 꽃 만지고 분재 만지는 걸 어려서부터 좋아해서 일찌감치 ‘난(蘭) 자격증’도 따두었대요. 난 재배하는 전문가 자격증. 전 야생화에 대해서 하나도 몰랐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남편한테 배웠지요.”

- 그럼 화원은 남편이 열자고 한 거예요?

“막내 태어나고 나서 시아버지가 권하셨어요. 이젠 아이도 셋이나 되니 바다에 나가서 위험한 일 하지 말라고.”

- 그래서 잠수사 그만두고 화원만 하려고 했나요?

“그건 아니고요.(웃음) 바다를 버리지는 못하죠. 어차피 겨울에는 바다 일도 없으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꽃이나 분재를 키우자 생각했던 것 같아요.”

부인은 바다에 대한 남편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처음 그를 만난 것도 스킨스쿠버 교실에서였다. 김혜연은 실내 강습을 겨우 마친 초급생이었고 남편은 이미 스킨스쿠버 경력 10년 차의 전문가였다. 바다가 좋아서 같이 다니다가 정 많고 실속 안 차리는 그의 순수함에 마음이 끌렸다. 2005년, 만난 지 삼 년째 되는 날 둘은 결혼했다. 김혜연의 나이 스물여섯, 김관홍은 서른두살이었다.

카드회사에 다니던 남편이 산업잠수사로 전업하겠다고 했을 때도 김혜연은 반대하지 않았다. 레저스포츠로 하는 잠수가 아니라 바닷속에서 용접이나 교각 작업을 하는 일이라 고되기는 할 테지만, 잠수 경력이 오랜 남편이 위험을 피하는 데 있어서는 베테랑이니 믿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10년간 산업잠수사 일을 하면서 잠수후유증으로 크게 고생해본 적이 없었다. 세월호 희생자 수습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잠수경력 20년의 베테랑 남편
오랫동안 공들인 큰 계약 앞두고
4월이라 화원은 한창 바쁠 때인데
‘그렇게 원하면 가도 좋다’ 하니
말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가더라

해경들은 따로 밥해주는데
처음엔 컵라면 몇 개밖에 없다더라
잠수 도중 호흡 끊어져 병원 실려가
약속 안 지키는 사람들 지켜보며
현장에서 돌아와 더 힘들어해


▲ 안방에는 삼남매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남편은 아이 욕심이 많았다. 두 살 터울로 삼남매를 낳고도 더 낳자고 해서, 부인의 타박을 받기도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생업을 접고 왜 거기를 갔을까

- 잠수사 경력이 꽤 오랜 편이죠?

“한 20년 되죠. 산업잠수사를 한 것만도 10년이니까, 그 전부터 다 합치면….”

- 그 정도 경력이면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됩니까?

“이게 들쑥날쑥해서 매달 똑같지가 않아요. 일당제로 하는데, 보통은 하루 100만원쯤 하고요. 하루 한 시간만 들어갔다 나와도 기본이 50(만원)이에요. 큰 작업은 월 단위로 끊어서 계약을 맺어요. 그렇게 하고 다시 몇 달간 쉬면서 몸을 회복하는 기간을 가지죠.”

- 세월호 구조 현장에선 잠수사들한테 어떻게 일당을 지급해 줬어요?

“일당 받기로 하고 간 건 아녜요. 처음부터 자원봉사자로 간 거기 때문에 계약서를 쓰고 일당을 정하고 그런 건 없었대요. 아마 계약서 안 쓰고 일한 유일한 경우가 될 거예요. 그러다가 5월에 잠수사(고 이광욱 잠수사) 사망 사고가 난 뒤부터 계약서를 쓰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 세월호 현장으로 가기로 할 때 부인께 상의하던가요?

“그 무렵에 큰 공사 계약을 앞두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공들여온 장기 사업이었는데 그건 액수도 크거니와, 그 일을 하고 나면 그다음 일이 연결, 연결되기 때문에 굉장히 큰 사업이었죠. 근데 그 계약을 며칠 앞두고….”

- 거길 안 가고 세월호로 간 거예요?

“계속 전화가 왔었어요. 먼저 내려가 있는 아는 잠수사들한테서. 저는 물론 못 가게 하고 싶었죠. ‘거기 500명이 넘게 대기하고 있다는데 왜 꼭 당신이 가야 돼?’ 하니까, ‘500명이 있어도 직접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10명도 안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해경도 못 할 거라면서….”

- 그래서 동의하셨나요?

“며칠 동안 마음을 못 잡고, 뭘 해도 건성으로 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마음이 딴 데 가 있으니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눈치였어요. 마침 4월이라 화원은 한창 바쁠 때인데, 마음이 벌써 떠버렸으니 여기 있으나 없으나 똑같겠다 싶어서 ‘그렇게 원하면 가도 좋다’고 했죠.”

- 좋아하시던가요?

“그 말 떨어지자마자 당일로 바로 내려가던데요.(웃음)”

- 생업을 접으면서까지 세월호로 달려가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가 대체 뭘까요?

“애가 셋이잖아요.”

- 네?

“우리도 애를 셋 키우는 부모니까요. 처음에 제가 말렸던 것도 애가 셋이라 위험한 걸 하지 말라고 그런 거였는데, 하루 이틀 지나고 보니, 안타까운 부모 마음은 우리도 (세월호 유가족과) 똑같은 거더라고요. 처음엔 애들 때문에 말리다가 결국 애들 때문에 가라고 했어요.”

▲ “애들이랑 사이사이 껴서 같이 잤는데, (세월호 이후로) 방에서 식구들이랑 안 자고 거실에서 따로 자더라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정말 힘들어서 피했던 거예요.” 큰딸이 아빠 핸드폰을 갖고 싶다고 해서, 번호만 바꿔서 물려주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흔치 않은 큰일거리도 포기하고, 한창 바쁜 꽃집도 아내한테 맡겨두고, 김관홍은 맹골수도 세월호 현장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4월 23일 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예상대로, 작업 가능한 현장의 잠수인력은 7~8명에 불과했고 5월 10일이 넘어서야 25명이 겨우 채워졌다. 말로는 민·관·군 합동 작전이었지만, “해경 잠수부는 선체에 진입할 능력도, 장비도 없는 상태라” 선체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는 건 온전히 민간잠수사들의 몫이었다. 산소탱크를 메고 갈 만큼 통로가 확보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표면공급식’(바지선에서 수중의 잠수사에게 호스를 통해서 공기를 전달하는 방식) 잠수를 했다. 공기를 전달하는 생명줄이 꼬이거나 걸려도 안 되고, 바지선 위의 스태프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정교한 작업이라 능숙한 산업잠수사에게도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 5월 6일에 이광욱 잠수사가 사망하는 사고도 있어서 걱정 많이 하셨겠어요?

“매일 전화를 했는데 처음에는 먹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어요. 먹을 거라곤 컵라면 몇 개밖에 없다고, 보급품이라고 왔는데 여자 팬티가 왔다고 그러더라고요. 필요한 물건은 택배로 부쳐주기도 했어요.”

- 체력소모가 극심한 일을 하면서 식사도 제대로 못했단 말이에요?

“해경들은 따로 밥해주는 데가 있었는데, 그걸 같이 먹지 못했대요. 4월 30일 지나서야 정상적인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얘기하는데 자기 쓰러져서 죽을 뻔한 거 아냐고, 잠수 도중 호흡이 끊어져 병원에 실려가서 입원도 3일간 했었다고 하더군요. 퇴원하곤 바로 또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 처음부터 못 내려가게 할걸, 후회하지 않았어요?

“후회하죠. 왜 가라고 했을까…. ‘다른 잠수사들도 있는데 왜 당신이 하냐?’는 소리도 했어요. 팀 짜서 같이 갔던 잠수사들도 며칠 못 견디고 돌아왔는데, 당신도 다른 분들한테 맡기고 그냥 나오라고.”

- 그러니 뭐라던가요?

“자기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그러죠.(웃음) 모든 일에 자신감이 있던 사람이라, 다들 자기처럼 할 거라고 사람을 믿었던 거죠. 오히려 거기(세월호 수색 현장) 있을 때보다 나와서 더 힘들어했어요. 그렇게 앞뒤가 바뀌고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들 보면서….”

남편은 7월 10일 정부가 일방적으로 수색 작업을 변경하기로 하고 현장 작업 종료를 문자 한 통으로 통지한 것에 격렬히 분노했다. 292명을 꺼낸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현장에서 나가라고 하고 그 뒤 3개월간 2구밖에 인양하지 못하는 걸 보면서, 자원활동 하러 내려간 민간잠수사들을 돈 벌러 온 언딘 소속 사설업체 잠수사라고 오도하는 걸 보면서, 해경의 무리한 지시로 이광욱 잠수사가 목숨을 잃었는데 그 법적인 책임을 민간잠수사 공우영(현재 1심 무죄 선고, 2심 계류 중)씨에게 떠넘기고, 정작 책임져야 할 해경 관계자는 승진하는 걸 보면서, 사람에 대한 김관홍의 믿음, 세상에 대한 김관홍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는 해양경찰청장 명의로 우편 배달된 감사장을 이로 뜯어 찢어버렸다.

“저희는 돈을 벌러 간 게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도우러 간 것이지. 양심적으로 간 게 죕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타인한테 벌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김관홍.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국정감사. 2015년 9월 15일)


한 구씩 달래서 가슴에 품고 나온 아이들

현장에서 나온 뒤 그의 몸과 마음은 한없이 허물어져 갔다. 불면증으로 잠을 못 이루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생전 처음으로 아이에게 매를 들고, 매일 밤 술을 마셨다. 목과 허리에 디스크가 오고, 어깨 회전근막이 파열되고, 잠수사에게 가장 무서운 병이라는 골괴사(뼈에 혈액 공급이 되지 않아 뼈조직이 죽어가는 잠수병의 일종) 진단도 받았다. 다시 잠수사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대리운전 기사가 되었고, 정부에서 약속한 치료비가 나오지 않아 집에는 빚이 쌓여갔다.

- 프로 잠수사로 잠수병의 위험을 잘 아시는 분이….

“다른 데서 일할 때는 30분 일하고 6시간 쉬고, 안전규정에 따라서 일을 하니까 몸에 해가 될 게 없죠. 여기서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에 하루에 네댓 번씩 잠수를 했으니까요.”

세월호 선체에 내려가 희생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 그들이 작업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배가 가라앉고 물이 들이치는 아수라장 속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그 끔찍한 비극의 현장을 목도한 유일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은 극심한 공포와 낮은 수온과 수압에 의해서 아주 고통스럽게 사망했습니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한 구 한 구 얽혀서, 저희 손으로 한 구 한 구 달래가면서, 한 구 한 구 안아서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관홍.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국정감사. 2015년 9월 15일)

시신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부둥켜안고 있는 경우도 있고 손을 꼭 잡고 얽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좁은 통로와 장애물들을 통과해서 나오려면 그 어깨와 손을 억지로 떼어내야 했다.

“얘들아, 조금만 기다려줘. 한 명만 데리고 나가고 곧 돌아올게. 엄마아빠 보러 같이 가야지.”


잠수사들은 아이들을 그렇게 달래가면서 한 구씩 인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 몸에 최대한 밀착해서 꼭 끌어안고 나오는 방식으로.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낸 292명의 희생자들은 모두 그렇게 인도되었다.

“선내에서 발견한 실종자를 모시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채 모시고 나온다! … 산 사람끼리 껴안을 때보다 다섯 배 이상 힘을 줘야 해…. 끝까지 포옹을 풀어선 안 되는 건 기본이고, 이동 중에 실종자의 몸이 장애물에 부딪쳐 긁히거나 찢긴다면 여러분은 평생 그 순간을 후회할 거다.” (김탁환, <거짓말이다> 33쪽)

- 남편이 그런 얘긴 안 하던가요?

“몰랐어요. 저도 책을 읽기 전까진 ‘애들을 안고 나왔다’는 걸 몰랐어요. 제게 밖에서 있었던 얘길 많이 하는 편인데, 제가 충격받을까봐 그랬는지 시신 수습하는 과정에 대해선 일체 얘기하지 않았어요. 이따금씩 길에서 아디다스 줄무늬 추리닝 입은 아이들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어요. 거기 아이들 3분의 2가 저 추리닝을 입어서 자긴 학교 체육복인 줄 알았다고 농담식으로 얘기했는데… 늘 수습하지 못한 9명이 눈에 밟힌다고 했죠.”

- 김관홍씨가 다른 데서 인터뷰하신 것 보니까, 그 일 이후로 ‘아내나 아이를 포옹할 수 없었다’고 하셨던데.

“그것도 전혀 몰랐어요. 원래 아이들을 잘 안아주고 몸으로 놀아주는 사람이었어요. 애들이랑 사이사이 껴서 같이 잤는데, (세월호 이후로) 방에서 식구들이랑 안 자고 거실에서 따로 자더라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정말 힘들어서 피했던 거예요.”

문자 한 통으로 수색 종료 통지
‘돈 벌러 왔다’ 오도하기도
생전 처음 아이들에게 매질하고
매일 밤 고통 속에 술 마시기도
해경청장 감사장 찢어버렸다

‘애들 안고 나왔다’는 것 몰라
평소 몸으로 놀아주던 남편은
아내·아이 안아주지 않았다
아빠 핸드폰 갖고 싶다는 큰딸
아내는 남편 번호 지우지 못해



엄마는 의인이 되는 게 좋아?

- 남편이 세상 뜬 지 석 달이 넘었네요. 남편이 없다는 걸 실감하시나요?

“아니요.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신랑이 바다로 가면 서너 달 떨어져 있다가 한 달에 한두 번 왔다 가고, 그렇게 10년을 살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어디 장비 메고 나간 것만 같아요. 며칠 전까지도 남편 핸드폰을 갖고 있었거든요. 핸드폰의 번호를 정리하다가 문득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이리 전화해줄 사람이 이젠 없구나.”

큰딸이 아빠 핸드폰을 갖고 싶다고 해서, 번호만 바꿔서 물려주었다. 부인은 아직 자신의 핸드폰에 있는 남편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다.

- 아빠의 죽음에 대해서 아이들한텐 뭐라고 하셨어요?

“있는 그대로 얘기해줬어요. 언론에서는 자살이다 뭐다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건 아니고요. 워낙 오랫동안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해서 심장 기능이 무척 약해진 상태였어요. 원래 술을 잘 못하는 체질인데 괴로우니까 술 먹고 잠을 청하고, 안 되면 수면제도 먹고 했기 때문에… 조그만 충격에도 심장이 버티질 못하는 거죠. 그날 밤도 ‘4·16 연대’ 사람들 만나고 와서 곧바로 잠들지 못하고 술을 많이 마셨나 봐요. 그래도 잠을 못 자니까 수면제도 두 알 먹은 거죠. 요즘 한 알로 안 돼서 양을 늘렸거든요. 약물중독은 아니고 경찰 부검 결과도 심장이 안 좋아 생긴 쇼크사래요.”

- 김탁환 작가가 김관홍 잠수사를 모델로 한 소설 <거짓말이다>를 내놓으면서 이례적으로 긴 작가의 말을 썼는데, 그 이유가 “고인의 자녀들이 이다음에 커서 아버지가 얼마나 멋진 의인이었는지 알게 하고 싶었다”고 밝히셨어요. 아이들은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고 있나요?

“대략은… 더 자세히는 아직 얘기하지 않았어요.”

- 애들이 자라서 그 책을 읽고 여러 가지 전모도 알게 되고 나서, ‘아빠가 그렇게까지 하실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며칠 전에 불이 난 원룸에서 사람들 다 깨우고 미처 피하지 못해서 희생당한 학생 있었잖아요. 뉴스에서 그분 어머니 인터뷰하는 거 보면서 저희 딸이 묻더라고요. ‘엄마는 저게 좋아?’ 하고요.”

- 엄마는 저게 좋냐…?

“아빠도 의인이라고 그러던데, 그게 좋냐고요. 자기는 의인이 되기보다는 가족들이랑 함께 오래 사는 게 더 좋은 것 같다고요.”

- (한숨) 그래서 뭐라 하셨어요?

“그건 아빠의 선택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네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누군가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아빠가 한 일로 292명의 가족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으니… 아빠가 좋은 일을 한 거라고 얘기했어요.”

- 끝으로, 제게 당부하고 싶으신 것 있으세요?

“너무 포장해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 단순 무식하지만 정이 많았던 사람이라고…. 그리고 애아빠 가까운 지인들 가운데도, 시체 수습하면서 돈 많이 벌었을 거라고 농담처럼 얘기 던지는 분들도 있고 그랬는데.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순수한 마음에 간 거라고 밝혀주세요.”

- 네. 그대로 쓰겠습니다. 애들은 어리고 아직 젊으신데….

울컥하는 마음에 가슴속 말이 뛰쳐나왔지만, 그 뒷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38살 아직 너무나 젊은 나이, 김혜연은 이제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맹골수도 해역보다 혼탁하고 거친 세상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짐을 나눠 지지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위로나 동정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한동안 이어갈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인사랍시고 겨우 찾아낸 말이 해놓고도 한심했다.

- 앞으론… 좋은 일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좋은 일이 많아질까요? 세상이 이런데… 우리 애들은 좀 살 만한 세상이면 좋겠어요.”

김관홍 잠수사가 세상을 뜬 뒤, 7월 1일자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강제 종료되었고 박주민 의원이 발의한 일명 ‘김관홍잠수사법’(세월호참사 피해지원특별법 개정안: 민간잠수사를 세월호 피해자로 포함시킴)은 아직 논의조차 안 된 채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출처  거길 왜 갔냐고요? 세 아이의 아빠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