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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길바닥 보수의 광기

길바닥 보수의 광기
누가 우리시대의 노인들을 거리로 내몰았나?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발행 : 2017-02-21 11:26:45 | 수정 : 2017-02-21 11:26:45


“요즘 늙은이들은 끈기가 없어.”

“노오력을 더 했어야징! 세계로 나아가서 막막 노오오오력을 했어야징!”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뒤 터져 나온 SNS의 젊은이들의 반응은 이랬다. 자고이래로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노년 세대의 질타가 없었던 적이 없지만, 이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응 역시 이처럼 격렬했던 때가 또 있었나 싶다.

주말에 광화문 사거리 남쪽에서 촛불집회에 참여해 보면 이른바 탄기국 집회에서 울려 퍼지는 절규가 들린다. “우리 모두 박근혜 대통령님의 이름을 불러봅시다!”라는 사회자의 선동에 참가자들은 “박근혜~~” “박근혜~~~”라고 울부짖는다.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의 본질이 과연 무엇일까?

▲ 4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제11차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대회'에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회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충효사상에 입각한 훈계질도, “노인들은 원래 꼰대야”라는 익숙한 레토릭도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2만 원을 주잖아?”라는 간단한 해석도 충분치 않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단돈 2만 원에 광인(狂人) 코스프레가 가능하다면 그건 너무 훌륭한 연기 능력이다.

역사상 가장 분명해진 세대 간 투표 성향, 길바닥에 나부끼는 태극기와 성조기(그런데 성조기는 도대체 왜 들고 나오는 거지?), 보다 선명해진 탄기국 집회의 폭력성은 분명 현 시대의 노인문제에 대한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국가를 대신했던 ‘가족’이라는 생계유지 공동체 시스템

농경사회가 형성된 이후 우리사회의 가족은 일종의 생계유지 공동체였다. 물론 그 안에는 사랑도 있고 애정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가족의 뼈대는 생계유지를 전제로 형성됐다. 예를 들어 찢어지게 가난했던 조선시대 소작농들도 자식을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없었다. “자기 먹을 것은 다 타고 난다”는 신념 아래 다산(多産)은 늘 장려됐다. 자녀의 숫자가 농경사회에서는 또 다른 노동력의 확보 수단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생계유지 공동체인 가족은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일종의 보험 같은 금융상품의 성격으로 변질됐다. 자녀는 중요한 투자 대상이 됐다. 1960, 1970년대 독재정부의 악랄한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 사회가 붕괴되자 농민들은 자녀 교육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자녀 중 똘똘한 아이 한 명(대부분 장남)만 명문대에 진출하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극적인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불었던 것이 바로 교육 열풍이다. 부모 등골이 휘어도 자식 하나만큼은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는 우골탑의 정신이 발현된 것이다. 놀랍게도 교보그룹의 모태인 교보생명보험은 1958년 설립됐는데, 이때 만들어진 교육보험은 ‘세계 최초로 교육에 보험을 도입한 금융상품’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그렇게 해서 출세한 가족 구성원은 온 가족의 생계와 노후를 책임져야 했다. 국가적으로 전혀 갖춰지지 못했던 사회안전망을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책임지는 비정상적 사회가 구성됐다. 고향 마을에서 서울대에 한 명이라도 진학하거나 고등고시에 한 명이라도 합격하면, 마을 전체가 잔치를 열었다. 이 퍼포먼스에는 가족 공동체가 누릴 혜택을 마을 공동체가 누릴 수 있다는 희망 섞인 믿음이 깔려 있었다.

요즘이라고 다른가? 서울 강남에서 명문대를 가기 위한 조건이 네 가지라고 한다. 첫째가 할아버지의 재력, 둘째가 엄마의 정보력, 셋째가 아빠의 무관심, 넷째가 형제의 희생이다. 온 가족이 희생해 똘똘한 자녀 한 명만 집중적으로 밀어주는 시스템은 그 투자에 대한 보상을 당연히 기대한다.

이 투자가 성공하면 한 가정의 체계는 급속도로 출세한 자녀(보통은 장남) 중심으로 재편이 된다. 노년이 된 부모님과, 형과 오빠를 위해서 상고를 다니며(혹은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하며) 사회 최하층을 기꺼이 받아들인 형제들은 장남만 쳐다본다.


생계유지 공동체의 유지는 풍족한 분배를 전제로 한다

한국에서 이런 종류의 생계유지 공동체가 빠르게 형성됐던 때는 1960~1970년대였다. 지방에서 젊은 고등학생 자녀를 서울로 유학 보내면서 이 공동체는 더욱 강화됐다. 그리고 이 투자를 받은(!) 자녀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전성기를 보냈던 때가 1980년대였다.

그런데 1980년대는 이른바 한국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국제적으로 3저 현상이 한국 경제를 도왔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소득분배율이 급속도로 개선됐다. 1987년 이후 노조조직률이 20%까지 치솟았다. 이 시기 연 평균 실질 경제성장률은 무려 8.3%였다. 일자리는 매년 약 50만 개가 늘어났고 고용률도 역사상 최고치인 61%에 근접했다.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표 중에 지니계수라는 게 있다. 이 지표는 1990년대 초반 역사상 최저점을 찍었다. 노동소득분배율, 즉 국가의 부(富)가 노동자에게 얼마의 비중으로 돌아가느냐를 따졌던 수치도 역사상 이때가 제일 높았다. 한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소득이 가장 평평하게 분배가 됐던 때가 이 시기였다는 이야기다.

1980년대의 풍요로움은 비정상적인 생계유지 공동체를 떠받쳤다. 물론 이 시기 40대 가장들의 등골은 휘었지만, 어떻게든 가족 전부를 떠먹이는 일을 감당해 냈다. 가족 사이에 불화도 생기고 충돌도 있었지만, 장남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고 용돈도 드렸다.

이 시기를 기억해 보라. 결코 지금처럼 세대 갈등이 격렬하지 않았다. 아주 성기게 얽혀있긴 했지만 어찌됐건 노년세대와 장년세대는 경제공동체였다. 그리고 그 경험을 한 40대들은 똑같은 일을 자녀들에게 원했다. “우리도 너희들 교육 열심히 시킬게. 여유가 생겼으니 장남 뿐 아니라 딸들도 대학 다 보내줄게.” 그리고 그들은 그런 투자를 통해 가족이라는 생계유지 공동체가 유지되기를 원했다.


신자유주의 30년, 무너진 생계유지 공동체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김영삼이 ‘세계화’를 부르짖은 뒤 도입된 신자유주의는 이 엉성한 생계유지 공동체를 박살냈다. 시스템이 무너진 이유는 하나다. 1%의 기득권층 외에 온 국민이 모조리 가난해 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노년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우리도 부모님한테 용돈 드리고 마지막까지 생계를 지켜드렸다.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했다고 가정해보자. 지금의 자녀들이 효심이 부족해서 그걸 못하겠는가? 아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못 한다.

수많은 30, 40대들은 해고 직전에 놓여 있다. 일자리가 없어서 치킨집을 차렸는데 대부분 망했거나 망하기 일보 직전이다. 자기 먹고사는 것도 해결이 안 됐는데 무슨 수로 부모세대를 모실 수 있나?

길바닥 보수는 바로 여기서 탄생한다. 세대를 막론하고 국민소득이 급속도로 하락하면서 생계유지 공동체로 연결됐던 가족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일자리를 두고 세대끼리 서로 치고받기 시작했다. 부모 세대가 자식 세대를 비난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해외로 나가서 고생을 해 봐야지, 그걸 몰라. 고생이 부족해!”라고 말이다. 봉양 받고 봉양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살았는데 그게 깨지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버렸다.

▲ 박근혜의 65번째 생일인 2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 회원들이 농성을 하고 있다. ⓒ정병혁 기자


길바닥 보수의 문제는 2017년 한국의 노인들이 역사상 최고로 괴팍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국민의 생존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사회 안전망이라는 공적인 문제로 해결하지 않고, 느슨하고 허술한 가족경제 공동체에 맡겨온 한국 사회의 복지 시스템에 있다. 이 시스템이 그나마 유지되려면 가족경제 공동체가 생존할 만큼의 소득 분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분배마저 완전히 박살이 난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탄기국 집회에 참가한 노인들의 눈에는 광기가 있다. 자본은 늘 민중들을 그렇게 분열시켰고, 민중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세상을 이용했다. 그래서 탄기국 집회에서 “박근혜에~~~”를 외치는 노인들의 광기를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라는 교훈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인이건 어린이건, 여성이건 성소수자건, 청년이건 장년이건,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생존 자체를 걱정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과제의 자각이어야 한다. 위대한 촛불혁명이 단지 대통령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정권이 아니라 시대를 교체해야 하는 역사적 변곡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출처  길바닥 보수의 광기, 누가 우리시대의 노인들을 거리로 내몰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