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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이 영상을 삼성 이재용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이 영상을 삼성 이재용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다큐 ‘클린룸 이야기’ 국회서 상영회
당신이 쓰는 전자제품 뒤에 숨겨진 노동자들의 죽음

[민중의소리] 권종술 기자 | 발행 : 2017-06-21 00:07:28 | 수정 : 2017-06-21 00:07:28


▲ 다큐 ‘클린룸 이야기’ ⓒ기타

그곳은 철저히 밀폐돼 있다. 먼지 하나 용납되지 않는다. 하얀 마스크와 방진복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그곳, 바로 ‘클린룸’이다.

먼지하나 없이 철저히 통제된 ‘클린룸’은 첨단전자산업의 상징이다. 하지만 그곳은 전혀 ‘클린’하지 않다. 그곳에서 보호받는 건 노동자들이 아니라 전자부품들이다.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정밀한 전자제품을 끊임없이 생산하기 위해 수많은 독성물질과 방사선에 노출되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이미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전자제품 뒤에는 이렇게 수많은 노동자들의 죽음과 이를 감추려는 기업들의 추악함이 숨어있다.


“클린룸은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 아니라, 반도체를 위한 것이다”

20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클린룸 이야기’ 상영회에선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소개됐다. 전자제품 뒤에 숨겨진 노동자들의 죽음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날 상영회에서 SK하이닉스에서 일하다 악성림프종에 걸린 김성교 씨는 “클린룸은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 아니라, 반도체를 위한 것이다. 반도체가 중요하지 사람의 안전은 우선시 되지 않는다. 유해 가스를 뽑아내는 장비가 막히니깐 장비를 잠그고 일하기도 했다. 적정량 이상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작업대에 유해 화학물질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가스가 채 빠지기도 전에 다시 문을 열어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고 ‘클린룸’이라는 기만적인 단어 뒤에 가려진 현실에 대해 증언했다.

▲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고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한지 10주기가 되는 날인 지난 3월 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 있는 반올림 농성장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양지웅 기자

다큐멘터리 ‘클린룸 이야기’는 반올림이 IPEN(유해물질 없는 미래를 위한 국제 네트워크)의 제안을 받아 첨단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 영상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엘지디스플레이 등 첨단전자산업의 대표 기업들에서 일하다 백혈병, 뇌종양, 희귀 난치성 질환 등 직업병 피해를 입은 20여 명의 젊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소중한 증언이 담겨있다.

클린룸에서 노동자들은 수많은 독성물질에 노출돼 있었지만 기업들은 독성물질과 관련한 어떠한 진실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들 노동자들은 옆에서 동료가 쓰러져 죽는 광경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했다. 화학물질이 누출되는 사고가 벌어졌지만 노동자들은 제품을 먼저 안전하게 옮긴 뒤에야 대피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명은 무시당했고,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내몰렸다.


“여전히 기업들은 ‘영업비밀’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유해 화학물질 정보를 은폐하고 있다”

다큐 제작을 지원한 IPEN의 과학 전문 상임 고문으로 있는 조 디간지 씨는 이날 상영회에 앞서 화학물질과 관련해 노동자들의 알권리에 대해 강조하면서 재해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기업의 태도를 비판했다.

독성물질 때문에 노동자들이 병들고 죽어갔다는 사실이 계속 밝혀지고 있지만, 여전히 기업들은 ‘영업비밀’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유해 화학물질 정보를 은폐하고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병과 직업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는 한국의 잘못된 산재보험제도 속에서, 기업의 이런 행태는 직업병 피해자들의 정당한 보상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클린룸 이야기’ 국회 상영회에서 증언하고 있는 피해 노동자들과 부모들 왼쪽부터 피해 노동자 한혜경 씨, 한혜경 씨의 어머니인 김시녀 씨,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인터뷰를 진행한 김유경 노무사, 피해 노동자 박민순 씨, 피해 노동자 김성교 씨, 간담 사회를 맡은 반올림 활동가이자 산업의학 전문의 공유정옥 씨. ⓒ민중의소리

조 디간지 씨는 “한국을 비롯해 많은 기업이 계속 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 노동자들의 알권리는 화학물질 안전의 기본이다. 대한민국이 서명한 여러 국제 협약에도 포함된 내용”이라며 “안전보건에 관련된 정보는 영업 비밀이 될 수 없다는 게 국제적 상식”이라고 강조했다.

삼성LCD에서 일하다 뇌종양을 얻어 거동조차 힘들어진 한혜경 씨는 “유해화학 물질에 대해 제대로 알리지 않고 노동자들을 일하게 하고, 병에 걸리게 했다. 그런데 회사는 이제 와서 발뺌을 한다. 진짜 이거는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거다. 나쁜 사람들 없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이 진정 쇄신하려면 이재용 등 인적 쇄신이 먼저 되어야 한다
거짓말만 해왔던 이들을 그대로 두고 쇄신할 수 없다”

기업은 정보를 숨길 뿐 아니라 책임조차 외면하고 있다.

이날 상영회에서 삼성직업병 피해자인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기업이 노동자들의 죽음과 관련한 삼성의 태도에 대해 “삼성은 거짓말만 해왔다. 그러다 화약약품이 발견되니깐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그 다음엔 영업 비밀이라서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계속 지금까지 일관되게 거짓말만 해왔다. 그런 그들이 이제 쇄신한다고 한다. 하지만 삼성이 진정 쇄신하려면 이재용 등 인적 쇄신이 먼저 되어야 한다”며 “거짓말만 해왔던 이들을 그대로 두고 쇄신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거질말로 일관하는 기업의 태도는 삼성 뿐 아니라 많은 기업들이 닮아있다.

조 디간지 씨는 화학물질로 인해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으면 기업들이 취하는 태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업들은 해당물질이 유해하지 않다고 주장하다 다음엔 독성은 인정하지만, 당신이 앓고 있는 그 병의 원인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다음엔 그 물질이 당신이 걸린 병과 같은 그런 병도 일으키는 건 사실이지만 당신이 노출된 양으론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마지막엔 그 물질 때문에 질병을 일으킨 건 맞지만 법적인 책임을 물게 되면 경제적 타격이 있다면서 발뺌을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뺌과 부인의 과정 곳곳에서 그동안 정부는 철저하게 기업의 편을 들어왔다.

▲ 다큐멘터리 ‘클린룸 이야기’ 국회 상영회 ⓒ민중의소리

정부가 기업의 편을 들어주면서 직업병을 얻은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투쟁은 하염없이 길어만지고 있다.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 반올림 노숙농성은 600일을 훌쩍 넘기고 있다. 상호 합의했던 조정 절차를 무시하고 조정위원회의 권고도 저버린 채 독단적인 보상 절차를 만들어 문제를 봉합하려 한 삼성전자에게, 사회적 대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직업병 피해자들은 삼성의 ‘진실된 사과’와 ‘투명하고 배제 없는 보상’을 위해 싸우며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 삼성은 이들의 호소에 귀를 닫고 있다.

한혜경 씨의 어머니인 김시녀 씨는 “내 자식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게 주어진 몫은 또 다른 부모와 자식이 이런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삼성이 수많은 화학물질을 영업비밀이라며 숨겨왔다. 정부를 울타리 삼아 책임을 회피해온 삼성을 용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시녀 씨는 “이 영상을 삼성 이재용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기업이 산재신청을 방해하고,
근로복지공단은 소송으로 맞서고,
국가가 이를 비호하는 매듭을
풀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 매듭을 풀어야 한다”

기업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날 열린 상영회를 주최한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와 반올림은 정책협약을 맺었다.

△삼성의 자체 개별 보상에 대한 반올림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삼성과 반올림간 대화가 재개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중대재해와 산재다발 사업장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 강화와 산재은폐 사업주와 관련자 처벌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책 마련을 위해 노력한다.

△도급사업 시 안전·보건조치 규정 위반자에 대한 벌칙 강화로 원청사업주의 책임을 강화하는 등 위험의 외주화 방지를 위해 노력한다.

△산업안전을 위한 알권리 보장과 사업주 책임강화를 위해 유해화학물질 공개에 관한 투명한 절차를 마련하도록 노력한다.

4개항에 걸친 합의는 긴 투쟁을 이어온 이들에겐 희망으로 다가왔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유방암에 걸린 박민순 씨는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영상을 보며 동병상련을 느꼈다. 아픈 이가 소외받지 않고, 제대로 보상받는 사회가 될 수 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피지도 못하고 진 어린 꽃들을 위로해주시고, 지금도 병마와 싸우는 이들에게 힘을 보태 달라. 더 이상 진실이 가려져 노동자가 피해보지 않는 세상을 기대해본다”고 소망을 말했다.

이들의 기대가 이뤄지려면 어떻게 돼야 할까? 기업이 변화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기업을 비호해왔던 정부가 변해야 한다. 피해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문재인 정부를 향해 거는 기대에 정부가 행동으로 보여줘야만 한다.

다큐에 등장하는 24명의 피해 노동자와 부모들을 인터뷰한 김유경 노무사는 “인터뷰에 등장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다. 더 많은 이들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쓰러져서 사망하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도 있고, 불임 등등 피해를 보고 느낀 분들이 많지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왜 왜 드러나지 않을까? 기업이 산재신청을 방해하고, 근로복지공단은 소송으로 맞서고, 국가가 이를 비호하는 매듭을 풀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며 “그 매듭을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이 영상을 삼성 이재용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 다큐 ‘클린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