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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때 공군 수송기, 김해로 ‘시체’ 옮겼다

5·18 때 공군 수송기, 김해로 ‘시체’ 옮겼다
육군본부 ‘3급 비밀문건’ 단독 입수
5월 25일자 김해행 비행기록 첫 확인
행방불명자 가능성…“진상 규명을”

경향신문 입수, 5·18 관련 비밀문건 속 수송품 ‘시체’
문건 모두 오기·허위 가능성 없어…당시 공군 조사 시급
이후 발간 자료의 5월 25일 수송 기록, 고의로 은폐한 듯

[경향신문] 강현석 기자 | 입력 : 2019.04.08 06:00:06 | 수정 : 2019.04.08 08:53:27


▲ 경향신문이 입수한 5·18 당시 공군 수송기 관련 비밀문건들. 1981년 6월 육군본부가 작성한 3급 비밀문건 ‘소요진압과 그 교훈’(왼쪽)에는 5월 25일 ‘김해∼광주’ 수송기 기록 옆에 ‘시체’라고 적혀 있다. 8개월 뒤인 1982년 2월 육군본부가 편찬한 ‘계엄사’(가운데)에 실린 5월 25일 수송기 기록에는 ‘김해∼광주’ 운항 기록이 삭제됐다. 공군이 1980년 5월21일부터 29일까지 작성한 ‘5·18 광주소요사태 상황전파자료’(오른쪽)에는 5월 25일 만 운송 화물 목록이 없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계엄군이 공군 수송기로 ‘시체’를 운반했다고 기록한 비밀문건이 나왔다. 광주 외부로 시신이 옮겨졌다는 기록이 담긴 군 문건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7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이라는 군의 3급 비밀문건에는 5·18 기간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시체’를 옮긴 기록이 나온다. 이 문건은 육군본부가 5·18민주화운동 1년 뒤인 1981년 6월 ‘광주사태의 종합분석’이라는 부제로 243권만 만들었다.

문건 110쪽에는 5·18 당시 공군의 수송기 지원 현황이 ‘공수지원(수송기)’이라는 제목의 표로 작성돼 있다. 일자와 내용(수송품목), 수량, (운항)구간, 비고란으로 나눠 공군이 수송한 물품 등이 적혀 있다. 1980년 5월 25일 공군 수송기의 운항구간은 3개였다. 첫 줄의 광주~서울(성남) 구간에선 11구(軀)의 환자를 후송했다고 적혀 있다. 둘째 줄의 김해~광주 구간에서는 의약품과 수리부속 7.9둔(屯·t를 의미), 서울~광주 구간에는 특수장비와 통조림 3둔(屯·t)을 수송한 것으로 기록됐다.

주목할 점은 비고란이다. 둘째 줄 ‘김해~광주’를 운항한 수송기 기록 옆에 ‘시체(屍體)’라고 적혀 있다. 공군 수송기가 김해로 나른 화물 중에 시체가 포함됐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5·18 당시 공군이 작성한 ‘5·18 광주소요사태 상황전파자료’에 따르면 공군의 C-123 수송기는 당일 김해에서 출발해 광주비행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김해로 돌아갔다.

김해로 옮겨진 ‘시체’는 군인 사망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중 영남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5·18 당시 계엄군 간 오인 사격 등으로 사망한 군인 23명은 모두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성남비행장으로 옮겨졌다. 군은 임무 수행 중 사망한 군인은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영현(英顯)’으로 기록하며 ‘시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5·18 연구자인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이 문건은 5·18 당시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시신을 광주 외부로 옮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군인이든, 민간인 사망자든 김해로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반드시 규명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5·18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은 현재까지 76명에 이르지만 1997년부터 광주지역에서 진행된 11번의 암매장 발굴에서는 단 한 구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군 사망자는 ‘영현‘으로 표기···‘시체‘는 일반 시민 가능성

공군 수송기가 5·18민주화운동 기간인 1980년 5월 25일 광주 외부로 ‘시체’를 운송한 기록이 확인된 육군본부 3급 비밀문건(소요진압과 그 교훈)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다.

1981년 6월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이 만든 190쪽 분량 책자 형태의 이 문건은 5·18 당시 여러 군 기록을 바탕으로 “광주사태를 종합분석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군 출신인 이성춘 송원대 국방경찰학과 교수는 “5·18 1년 뒤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이 만든 이 문건에 실린 기록들은 모두 당시 군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잘못 기록됐거나 허위일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여러 번 진행된 5·18 조사에서는 공군 수송기의 역할이 주목받지 못했다. 1988년 국회 청문회와 1996년 검찰 수사,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은 모두 공군을 조사하지 않았다. 2018년 5·18 당시 헬기 사격과 전투기 출격 대기를 조사한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가 공군에 대해 첫 조사를 했지만, 전투기 출격 대기에 조사가 집중됐다.

■ 노영기 조선대 교수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관)

“김해로 시체가 옮겨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 사망자를 김해로 옮길 이유는 없다. 당시 공군 관계자들을 반드시 조사해야 한다.”


■ 이성춘 송원대 국방경찰학과 교수(육군 중령 출신)

“시체는 그 줄에 적힌 화물 의미하는 것. 1982년 발행 ‘계엄사’에 운항기록이 없는 것은 일부러 삭제한 것으로 봐야 한다.”


■ 정문영 전남대 5·18연구소연구원 (2018년 국방부 특조위 조사관)

“공군의 5·18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 해당 문제(시체 운송)는 밝혀야 할 필요성이 있다.”


■ 송선태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2018년 국방부 특조위 조사관)

“공군 조종사들은 ‘육군서 실은 대로 날랐다’고 주장한다. 관계자는 고령이고 사망자도 많다. 서둘러 조사해야 한다.”


공군기록 5월 25일 화물 ‘미기재’

경향신문이 확보한 공군의 ‘5·18 광주소요사태 상황전파자료’(이하 5·18 상황전파)에 따르면 공군은 1980년 5월 21일부터 5월 29일까지 C-123, C-54, VC-54 등의 수송기를 투입해 광주의 계엄군을 지원했다. 김해와 성남(서울)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공군 제5전술비행단과 제35전대는 광주와 성남·김해 구간을 100차례 넘게 운항했다.

‘비광(非光)’이라는 도장이 찍힌 공군의 비밀자료인 ‘5·18 상황전파’는 날짜별 수송기 운항 시간과 구간, 수송 품목, 요청 부대 등이 자세히 기록됐다. 5월 24일의 경우 ‘오전 7시 20분 공수요청(육군) 고체연료·의약품, C-54, C-123, 김해~광주’로 적었다. 공군이 수송기를 지원한 5월 21일부터 5월 29일까지 같은 방식으로 문건이 작성됐다.

그런데 5월 25일만 유일하게 수송기 운항구간만 있고 운송한 화물에 대한 기록이 없다.

공군은 이날 VC-54 수송기가 서울~광주~서울, C-123 수송기가 서울~광주~서울을 운항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C-123 수송기는 김해~광주~김해를 오갔다.

이날 공군의 수송기 운항 기록은 ‘시체’라고 적힌 육군본부의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 실린 공군 수송기 지원 표와 일치한다. 하지만 육군본부 기록에 적혀 있는 운송품목이 공군 기록에는 없다.


‘김해∼광주’만 사라진 육군기록

육군본부가 1982년 2월 편찬한 ‘계엄사’ 문건도 주목해야 한다. ‘시체’라고 기록한 1981년 6월 ‘소요진압과 그 교훈’을 만든 8개월 뒤 같은 육군본부가 만든 문건이고, 두 문건 모두 5·18 이후 각종 군 기록을 바탕으로 종합해 분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유독 5월 25일 공군의 수송 지원 내용만 다르다.

‘계엄사’는 5·18 당시 공군의 수송기 지원을 ‘항공수송(일자별)’이라는 표로 정리했다. 표에는 5월 25일 C-123 수송기가 ‘서울~광주’를 2회 운항한 것으로만 적혀 있다. 1981년 육군본부와 5·18 당시 공군의 기록에서 확인된 구간 중 ‘김해∼광주’ 구간 운항 기록이 아예 빠져 있는 것이다.

이성춘 교수는 “육군본부가 1981년 만든 문건에 ‘시체’가 적혀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이후 만든 문건에서는 이를 삭제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공군 수송기가 수송한 ‘시체’는 군 사망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3·7·11공수, 20사단이었다. 당시 주둔지는 3공수와 20사단은 수도권, 7공수는 전북, 11공수는 강원도 화천이었다. 숨진 군인을 김해로 옮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계엄군 사망자 23명은 5월 25일과 5월 28일 모두 성남비행장으로 옮겨졌다.

군은 또 임무 중 사망한 군인을 ‘시신’이나 ‘시체’ 등으로 적지 않고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영현(英顯)’으로 표기한다.

공군의 ‘5·18 상황전파’ 문건의 5월 28일 자에는 군 사망자를 수송기로 광주∼서울로 운송한 기록이 있는데 ‘영현 수송’이라고 적었다. 5·18 당시 계엄사령부가 작성한 ‘상황일지’에도 ‘영현 11구’ 등으로 군 사망자를 기록했다.


광주비행장, 사실상 특전사령부

공군 수송기가 ‘시체’를 운송한 5월 25일 광주비행장에는 5·18 당시 유혈진압에 앞장섰던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했던 공수부대는 잠시 광주 외곽으로 철수했다. 3공수는 광주교도소, 7·11공수는 광주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에 머물렀다.

흩어져 있던 공수부대는 5월 24일 시 외곽 차단을 20사단에 넘기고 모두 광주비행장으로 집결했다. 비행단 부단장실이 특전사령관실로 제공됐고 3명의 공수여단장도 별도의 사무실이 있었다. 광주비행장 전투기들이 5월 21일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 공수부대는 격납고를 사용했다.

공군 수송기로 ‘시체’가 옮겨졌던 5월 25일 광주비행장은 사실상 특전사령부였던 셈이다.

광주비행장에 주둔하면서 공수부대는 ‘특공조’를 구성해 5월 27일 전남도청 무력진압작전을 준비하고 실행했다.


출처  [단독]5·18 때 공군 수송기, 김해로 ‘시체’ 옮겼다





암매장 추정지 발굴 실패의 원인?
‘시신 광주 밖 운구’ 피해자들 주장 뒷받침
[경향신문] 강현석 기자 | 입력 : 2019.04.08 06:00:03 | 수정 : 2019.04.08 06:01:01



5·18민주화운동 기간 공군 수송기가 ‘시체’를 운반했다는 기록은 5·18 행방불명자 문제와 닿아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는 현재 76명에 이른다. 이는 242명의 행방불명 신고가 있었지만, 심사를 통해 공식 인정된 규모다. 광주시와 5·18기념재단 등은 1997년부터 ‘5·18 행불자 소재 찾기’를 통해 행불자 찾기에 나섰다. 특히 대다수의 행불자가 당시 사망한 뒤 계엄군에 의해 암매장됐을 것으로 보고 발굴을 시도했다.

제보와 전문가들의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시와 5월단체는 지난 22년 동안 암매장 의심지역 11곳을 파헤쳤지만 단 1구의 유골도 찾지 못했다. 발굴은 모두 광주지역에서 진행됐다. 그러는 사이 5·18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계엄군이 광주 외부로 시민들의 시신을 옮겨 처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왔다.

1980년 5월 25일 광주비행장과 김해비행장을 오간 공군 수송기 운항을 기록한 군 문건에 ‘시체’라는 단어가 쓰여 있는 것은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단서일 수 있다.

5·18 연구자들은 조사를 통해 반드시 문건에 적힌 ‘시체’가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그동안의 조사와 연구에서 공군의 역할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김해로 무엇을 옮겼는지, 해당 문건의 작성 경위와 ‘시체’가 무엇인지 당시 관계자들을 상대로 반드시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 국방부 특조위에서 공군을 조사했던 송선태 조사관은 “특조위 조사에서 공군 수송기 조종사들은 ‘우리는 비행기 조종만 했지 육군이 어떤 화물을 실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면서 “5·18 당시 공군 측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고 역할에 대한 조사도 부족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수송 목록에 ‘시체’라고 적혀 있는 만큼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단독]암매장 추정지 발굴 실패의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