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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수송기 ‘시체 운송’ 전 ‘5·18 행불자’ 69명 있었다

공군 수송기 ‘시체 운송’ 전 ‘5·18 행불자’ 69명 있었다
행불자 인정 76명 ‘보상신청서’ 분석해보니
실종자 90%가 5월 24일 전 사라져…목격자 진술·장소 등 확인
집단 발포 5월 21일 19명 최다…“비밀문건 관련, 본격 조사를”

[경향신문] 강현석 기자 | 입력 : 2019.04.09 06:00:03 | 수정 : 2019.04.09 06:02:01


행불자 묘역에 놓인 국화 한 송이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행방불명자 묘역’의 한 비석 앞에 국화꽃 한 송이가 놓여 있다. 이 묘역에는 5·18 당시 사라진 뒤 유해를 찾지 못한 시민들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이준헌 기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로 인정된 76명 중 69명이 1980년 5월 24일 이전에 행방불명된 것으로 나타났다. 군 비밀문건에 공군 수송기를 이용해 광주에서 김해로 ‘시체’를 운송했다고 기록된 5월 25일 이전에 대부분의 행불자가 발생한 것이다. 나머지 7명 중 2명은 5월 25일 이후, 5명은 정확한 날짜가 확인되지 않았다.

경향신문이 8일 행방불명자로 인정된 76명의 ‘보상신청서’를 분석한 결과 이 중 69명이 5월 24일 이전에 실종됐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행불자는 최후 목격자 진술과 장소, 날짜 등이 중요한 심사 기준이 된다. 5·18 행불자는 242명이 신청됐지만, 심사를 통해 82명만 인정됐다. 이 중 2002년 구묘역에 묻혔던 무명열사 11구의 유해를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6명의 신원이 확인돼 현재 76명이 행불자로 남아 있다.

행불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날은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가 시민을 향해 집단발포를 했던 5월 21일이었다. 이날 19명이 무더기로 행방불명됐다. 3공수가 광주역 앞에서 시민을 향해 총을 쐈던 5월 20일에는 12명이 실종됐고, 5월 19일에도 역시 12명의 행불자가 발생했다. 5월 18일에도 10명이 행방불명됐다. 7공수와 11공수, 3공수가 차례로 광주에 투입돼 무차별적 진압 작전에 나선 5월18일부터 21일 나흘간 시민 53명이 사라졌다.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해 광주를 봉쇄하기 시작한 5월 22일에도 6명이 행방불명됐다. 5월 23일 3명, 5월 24일에는 1명이 실종됐다. 육군본부의 3급 비밀문건인 ‘소요 진압과 그 교훈’에 ‘광주∼김해’를 운항한 수송기로 ‘시체’를 운반했다고 기록된 5월 24일 이전, 행불자의 90%가 발생한 것이다.

군 수송기를 통해 ‘시체’를 운송했다는 기록 이후 행불자는 5월 26일과 27일 각각 1명씩 단 2명에 불과했다. 5명은 정확한 행방불명 날짜를 알 수 없었다. 행불자 76명 중 60명은 남자였다. 최후 목격 장소가 확인된 행불자 48명 중 항쟁의 중심이었던 옛 전남도청과 인근(금남로·충장로)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사람이 20명으로 가장 많았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그동안 구체적으로 확인을 못 해서 그렇지, 행불자 신청을 한 242명 중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실제 행불자가 더 있을 수 있다”면서 “군 수송기에 의한 시신 운반 가능성이 제기된 만큼 본격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단독]공군 수송기 ‘시체 운송’ 전 ‘5·18 행불자’ 69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