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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손배소 재판, ‘국가면제론’ 뒤에 숨은 日정부

‘위안부’ 손배소 재판, ‘국가면제론’ 뒤에 숨은 日정부
국제재판소 판결 거부하고 ‘나치 피해자’ 손들어준 이탈리아
피해자 측 “한국 법정도 의무 다해야”

[민중의소리] 김백겸 기자 | 발행 : 2020-02-05 19:31:42 | 수정 : 2020-02-05 20:00:05


▲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13일 3년만에 개시된 일본정부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 첫 변론기일 재판에 앞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회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용수, 길원옥, 이옥선 할머니. 2019.11.13 ⓒ김철수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재판에서 ‘국가면제론’을 주장하는 일본 정부의 논리를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부장판사 유석동)는 15일 고(故) 곽예남 할머니 등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두번째 변론기일을 열었다.

이날 재판에서 일본 정부 측 대리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피고인석이 텅 빈 채 진행됐다. 지난해 11월 첫번째 변론기일에서도 일본 정부 측은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해당 소송에 대해 국제법 상 ‘국가(주권)면제론’을 내세워 각하돼야 한다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전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소송에 대한 송달 절차도 거부해왔다. 이 때문에 해당 소송이 제기된 것은 2016년이지만 3년이 흐른 지난해 11월에야 재판이 시작됐다.

일본 정부가 내세우는 ‘국가면제론’은 한 나라의 국내법으로 다른 국가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국제법상 원칙이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 또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국과 일본, 미국 등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해 왔지만 모두 ‘국가면제론’을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근 국내 법원에서 승소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소송의 경우에는 일본 정부는 제외한 채 신일본제철 등 일본 측 기업들만 포함해 진행돼 ‘국가면제론’ 논란을 비켜갔다.

‘위안부’ 피해자 측 대리인은 이날 재판에서 일본 정부 측이 방패로 삼고있는 ‘국가면제론’이 이번 소송에서는 적용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위안부 피해자 측 대리인은 “국가면제론은 불멸의 법리가 아니다”라며 “실제로 국가면제론은 국제적 상황에 맞춰 각국의 입법과 판례가 변화되는 등 점차적으로 그 면제의 폭이 좁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강조했다.

‘위안부’ 피해자 측은 인간의 사망 혹은 상해, 재산손실에 책임이 있는 경우’ 국가면제론을 인정하지 않도록 규정한 유엔국가면제협약, 유럽협약, 미국과 일본이 규정한 법률 등 근거로 제시했다.

실제로 ‘인권 침해 범죄까지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탈리아 법원의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페리니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지난 2004년 이탈리아 법원이 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의 불법행위에 대해 독일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한 사건이다. 원고였던 이탈리아인 루이키 페리니씨는 1943년 이탈리아가 독일에 점령당한 당시 독일에 강제로 끌려가 아파트 건설 노역자로 일한 데 대한 배상을 요구했다.

이탈리아 법원의 결정에 독일은 “이미 이탈리아에 배상 의무를 이행해 종료됐음에도 이탈리아 법원의 판결은 독일의 주권을 침해했다”며 ‘국가면제론’을 내세워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고, ICJ는 독일의 국가면제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중대한 인권침해에 국가면제를 인정하면 피해자들의 재판청구권이 침해된다”며 ICJ의 판결을 거부하고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탈리아 헌재는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배제할 경우 인권의 불가침성을 규정한 자국 헌법 2조와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재판받을 권리’를 규정한 24조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당시 이탈리아 헌재는 “결론적으로, 국가면제론은 전술한 헌법의 기본원칙과 충돌하는 한, 이탈리아의 법질서에 편입될 수 없고 그 안에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제법이라 하더라도 자국 헌법의 기본원칙을 위배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판단이다.

▲ 법원 자료사진. ⓒ민중의소리

‘위안부’ 피해자 측 대리인들은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결정의 취지와 같이, 우리의 헌법 질서 및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고려하면 이번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적용하는 것은 우리 헌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우리 헌법재판소도 헌법 제 10조에서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거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단지 재산권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또 헌재는 재판청구권을 규정한 헌법 27조에 대해서도 재판청구권을 ‘기본권 보장을 위한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이를 제한할 수 없다고 결론내기도 했다.

우리 헌법과 헌재의 판단을 고려했을 때 이탈리아 헌재의 판단처럼 우리 법원도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에서 국가면제를 반영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위안부 피해자 측은 “이번 소송은 헌법 10조에 근거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사후적인 회복’과 헌법 제27조에 근거한 ‘사법에의 접근을 통한 최후 수단’이라는 의미가 있다”면서 “따라서 피고에 대한 재판권 행사를 부인하고 원고들의 소를 각하하는 것은 우리 헌법 10조와 27조의 실효성과 가치를 훼손하는 일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제관습법을 국내 법원에 적용하는 기준에 비추어서도 국가면제를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제관습법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국제적 관행으로 성립되어 있고, 국제적 법적 확신이 확립되어 있는지, 우리 헌법 질서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면서 “이 소송에서 국가면제의 국제관습법을 적용하여 우리 법원의 재판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우리 헌법질서에 부합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설명했다.

‘위안부’ 피해자 측 대리인은 끝으로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한 故 김학순 할머니의 마지막 증언을 인용해 법원이 재판권을 포기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김학순 할머니는 최초 증언부터 마지막 증언까지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말하고 있다”면서 “고령인 원고들이 삶의 끝자락에서 이번 소송을 제기한 것은 일본의 국제적 전쟁범죄를 확인하고 역사에 기록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계속되는 전쟁범죄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법원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변론을 모두 들은 뒤 이에 대해 반론조차 없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일본정부가 어떠한 반박논리가 있는지 밝히면 좋겠는데 아무런 답변이 없어서 아쉬움이 많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오는 4월 1일에 3번째 변론기일을 열기로 했다. ‘위안부’ 피해자 측 대리인들은 이후 변론기일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의 위법성과 피해사실을 중심으로 구두변론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우려로 재판에 참석하지 못했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다음 기일에는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위안부’ 손배소 재판, ‘국가면제론’ 뒤에 숨은 日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