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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기계적 보안관찰’ 제동…“재범 위험 판단 엄격해야”

법원, ‘기계적 보안관찰’ 제동…“재범 위험 판단 엄격해야”
‘보안법 위반’ 8년형 만기출소 40대
이적단체 집회·행사 참석 이유
보안관찰 처분에 행정소송 승소
고법 “형집행 뒤 사회활동 더 고려해야

[한겨레] 고한솔 기자 | 등록 : 2020-02-06 11:05 | 수정 : 2020-02-06 18:44


▲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이병진(48·대학 강사) 씨는 북한 이적단체와 접촉해 군사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2010년 징역 8년 형을 확정받고 2017년 9월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출소한 지 넉 달 만인 이듬해 1월, 대전지검에서 출석을 요구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조사 끝에 법무부는 그해 12월 보안관찰처분심의위원회 의결을 거쳐 이 씨에 보안관찰 처분을 내렸다.

보안관찰법에 따르면, 법무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3년 형 이상을 선고받은 사람의 재범을 방지하고 사회 복귀를 돕기 위해 보안관찰 처분을 내릴 수 있다. 이 처분을 받으면 주거지 이전이나 국외여행은 물론 3개월에 한 번씩 주요 활동 명세를 담당 경찰서에 보고해야 한다. 이 처분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2년마다 갱신된다.

법무부가 밝힌 사유는 이렇다. “(이 씨의) 범죄행위가 매우 중대한 데도 ‘정치학도로서 통일을 염원하는 자연스러운 교류’라고 주장하고 있고, 수형 중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들과 만남을 이어갔으며, 출소 후에도 이적단체가 주관하는 집회나 행사에 지속해서 참가하고, 국가보안법 폐지까지 주장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 씨가 수감 중에 주고받았던 편지나 접견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따진 뒤 대학 강사로 일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책을 출간하고 관련 집회나 강연에 참석했으며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실까지 문제 삼았다.

이 씨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조사받으러 오라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었다. 어떤 활동을 하는지 구체적 내용은 자세히 살피지 않고 마치 일제강점기 사상범 다루듯 기계적으로 재범의 위험성을 들이대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이 씨는 법무부 처분에 반발해 지난해 초 “보안관찰 처분을 취소하라”라며 서울고법에 행정소송을 냈다.

법원은 지난 4일 이 씨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 행정4부(재판장 이승영)는 이 씨가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낸 행정 소송에서 법무부에 “보안 관찰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보안관찰 처분은 이미 저지른 행위에 또 한 번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같은 범죄의 재발을 막고 대상자의 사회복귀를 돕기 위한 행정 조치로, 형 집행 이후의 사회적 활동이나 태도, 생활환경, 성행까지 종합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범죄 정황이 중하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이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를 다시 저지를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형 집행 기간에 이 씨가 보인 행태, 형 집행 이후의 사회적 활동 등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재범의 위험성’을 엄격하게 판단하지 않은 법무부의 기계적 처분에 제동을 건 것이다.

재판부는 구체적으로 이 씨가 교도소에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거나 접견했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친분 관계 이상의 접촉은 아니었다고 봤다. 또한 이 씨가 보안관찰처분 대상자에 주어진 신고 의무를 이행했고, 경찰 및 검찰 조사에 성실히 응했으며, 조사 내용을 살펴봐도 “특별히 재범의 우려를 인정할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 씨는 2018년 경찰과 검찰 조사 과정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질문을 받자 “한민족으로서 동포애를 가지고 있으며 분단의 아픔을 넘어서 평화적으로 공존하면 좋겠다”고 상식적인 수준의 답을 한 바 있다.

재판부는 형 집행 이후 이 씨의 행적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이 씨가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책을 펴내고 관련된 행사에 참석했다 하더라도 이는 “헌법상 보장되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활동”일 뿐, 대한민국 헌법 질서를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 씨가 생업을 가지고 안정된 사회생활을 하는 점, 해외를 다녀온 적이 있으나 지인과의 만남이나 학문교류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이 같은 사정들은 원고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보안관찰 처분 자체가 위헌적이라는 이 씨 쪽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간 보안관찰 기간 갱신 처분의 위법성을 다툰 경우는 있어도, 출소 뒤 내려진 보안관찰 처분 자체의 위법성을 다퉈 승소한 사례는 드물다.

이 씨를 대리한 오민애 변호사(법무법인 율립)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법무부는 국보법이 적용된 혐의 내용이나 수형 생활 당시 사정을 주된 이유로 보안관찰 처분을 내렸는데, 이는 제도 취지에 맞지 않아 위법하다고 재판부가 판단한 것이다. 재범의 위험성을 판단할 때 과거 범죄에 책임을 다시 묻는 방식으로 기계적인 처분을 내려선 안 된다는 점을 법원이 확인시켜줬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출처  [단독] “보안관찰 처분때 ‘재범 위험성’ 엄격히 따져야” 법원, 법무부 ‘기계적 보안관찰’ 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