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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억울함에 죽음 택한 노동자를 살릴 정치는 어디 있을까?

억울함에 죽음 택한 노동자를 살릴 정치는 어디 있을까?
[민중의소리]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직업환경의학전문의 | 발행 : 2020-03-31 17:47:47 | 수정 : 2020-03-31 17:47:47


민주화 운동을 했던 한 대통령이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 것이 15년 전의 일이다. 그는 “지금과 같이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투쟁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자살로 인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은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투쟁수단’으로 뭉뚱그리고 귀를 닫아버린다는 점에서 잔인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절망스러웠다.

그런 말이 나오던 그 시절, 노동자들의 자살은 ‘투쟁수단’이라기보다 절박한 비명에 가까웠다. 노동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본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표현 수단이 죽음이라고 느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잘못된 구조의 무게가 개인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되어 질식감을 줄 때가, 노동자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때다.

그 때, 정치는 어디 있었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내주고, 몫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몫을 찾아주는 것이 정치의 일이라면, 노동자들이 죽음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외롭게 마지막 선택을 할 때, 정치는 어디 있었나?

▲ 故 이재학 PD 유족 기자회견. ⓒ뉴시스

청주방송에서 일하다 ‘억울해 미치겠다’는 말을 남기고, 2020년 2월 세상을 등진 이재학 PD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CJB 청주방송에서 ‘TV여행 아름다운 충북’이란 프로그램을 맡았다. 지자체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지자체 보조금을 따내기 위해 사업 계획서를 쓰고, 공무원들과 협의하여 방송을 제작하고, 프로그램 종료 후 정산하는 등의 대외 업무도 했다. 일상적으로 업무를 보고하고 결재용 서류를 써 냈다.

모두 청주방송 PD로서 한 일이다. 2004년 입사 이후 14년 동안 비슷한 일을 했다. 그가 정규직 PD의 2배에 이를 정도로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한 달 급여는 200만 원이 되지 않았다. 그의 명함은 항상 그가 청주방송 소속이라고 밝히고 있었지만, 이는 빛 좋은 가림막에 불과했다.

2018년 4월, 청주방송 내 프리랜서와 비정규직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 문제가 불거지자, 이 PD는 앞장을 섰다. 그 후, 갑자기 모든 방송에서 하차하라는 사측 지시가 떨어졌다. ‘해고’가 아니라 ‘프리랜서 계약종료’라고 했다.

억울한 마음에 ‘방송계갑질119’를 찾았지만, ‘개인’인 노동자가 할 수 있는 대응에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결국 법정에서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해,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시작했다. 소송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준비하는데 6개월 걸렸고, 소장을 접수한 지 다시 1년 4개월이 지난 뒤에야 1심 판결이 선고되었는데, 결과는 패소였다.

이 PD는 연출이나 조연출 본연의 업무 뿐만 아니라, 각종 행정업무와 보조금 관련 업무, 대외협력업무를 방송사 지시에 따라 수행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매일 출근하다시피했고, 일상적 보고를 위해 이른 시간에 출근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부인되었다. 그가 더 억울해했던 것은 회사 측의 회유와 압박으로, 고인을 돕기로 했던 증인 한 명이 진술을 번복한 것이다. 1심 선고 후, 이 PD는 어머니에게 전화해 ‘억울하고 억울하다’는 말을 하면 울기만 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판결문을 받자마자 곧바로 항소장을 접수하고, 끝까지 싸워보겠다 다짐했지만, 분노와 억울함이 더 컸던 것 같다. 결국 지난 2월 4일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4년 간 일하다 하루아침에 해고된 노동자가 기댈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라고는 판사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밖에 없을 때, 2년이나 걸린 재판 과정이 진실을 은폐하는 과정이자, 동료들이 자신에게 등 돌리는 시간임에 불과했을 때, 그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무엇이 있었을까.

▲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16일 앞둔 30일 오전 서울 청계천 모전교~광통교 구간에서 서울특별시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설치한 '아름다운 선거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2020.03.30. ⓒ민중의소리

긴 시간이 지났는데 별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고, 억울해 미치겠다’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고, 제도와 법의 영역에서 그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정치’는 어디 있었나? 故 이재학PD의 손을 잡고 소송 외에 싸울 수 있는 다른 선택지를 만들었어야 할 ‘노동자 정치’는 어디 있었나?

최소한의 염치도 놓아버린 거대 정당의 위성정당들이 민주주의를 놀리고, 진보정당들은 그 눈치만 보고 있다. 아무런 기대와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 4.15 총선이 2주 앞으로 다가 왔다. 정치가 사라진 시대, 억울한 노동자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자꾸 묻게 된다.


출처  [건강한 노동이야기] 억울함에 죽음 택한 노동자를 살릴 정치는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