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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4·16의 기억과 4·16생명안전공원

4·16의 기억과 4·16생명안전공원
우리 시대 기억과 공간
[민중의소리] 김명식 건축가 · 건축학 박사 | 발행 : 2020-04-16 08:45:40 | 수정 : 2020-04-16 08:45:40


▲ 일몰 직전 목포신항에 누워있는 세월호. 2017.09.08. ⓒ사진 = 김명식

사자의 매장(埋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몰랐었다.
다만 빛의 한복판, 그 정적을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바다는 황량하고 님은 없네

- 영국의 시인 T.S.엘리엇의 장시 ‘황무지’ 중 일부

4월이 되면 엘리엇의 시구 “님은 없네”가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억으로만 되살아나고 치유되지 않는, 4월이라는 이름의 ‘4월병’을 앓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참사가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화랑유원지 내 남측 미조성 부지(23,000㎡)에 세월호 참사 추모 시설이 들어섭니다. 올해 디자인 공모와 실시 설계를 마치고 내년 착공해 내후년에 준공될 예정입니다.

얼마 전 모 언론 매체에서 4·16 생명안전공원 건립과 추모, 기억, 공감 등에 대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추모 혹은 기억 공간에 대한 공감과 그것의 의미 등을 다룬 글이었습니다. 3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4.16생명안전공원 건립을 반대하는 지방선거 후보자들은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 06.05. ⓒ김슬찬 인턴기자


한국의 전통적 추모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슴 아픈 일은 빨리 잊어야 한다”며
4·16생명안전공원 건립에 부정적인 입장 아닌가.

세월호 참사가 잊힐 수 있는 일일까요?

코로나19가 유럽에 상륙하기 전인 지난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75주년 기념 행사가 대대적으로 있었습니다. 이날은 유엔이 정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이기도 합니다. BBC, CNN, RAI 등 많은 매체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와 그 끝을 알리는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그리고 희생자 추모에 관해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가 이와 관련한 뉴스를 접했습니다.

그들은 왜 가슴 아픈 일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기념하며 후대까지 이어나갈까요? 잔인무도한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된 이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을 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자명한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비극의 반복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대부분은 아직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학생들이었습니다. 유가족들이 사랑하는 이, 사랑하는 자식을 어떻게 잊고 살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몫은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지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그들을 위로하는 (몫의) 입은 있어도 멈추게 하는 (몫의) 입은 없습니다.

뜻하지 않은 불행한 사고와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슬퍼하고, 이를 기억하려는 유족에게 세월호 참사를 잊으라 강요해야 할까요. 그보다 지금도 고통 받는 그들을 위로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상황이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 주는 교훈을 끊임없이 되새김해도 부족할 텐데, 왜 그렇게 잊자고만 할까요?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지만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적 추모 문화에 더 가까울지 모릅니다.

▲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 전경. ⓒ사진 = 안산시


4·16 생명안전공원이 도심에 지어진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점이
사람들의 기억과 공감을 이끌어내는데에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가.

9·11테러에 희생된 자들을 위한 기념비(Ground Zero Monument)가 그 사건과 희생자들을 잊고자 어디 외딴 곳에 세워졌던가요? 희생된 유대인에 대한 추모와 기념비들은 또 어떤가요? 이제는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이제는 잊어버려도 될 텐데, 왜 그렇게 도시 곳곳에 짓고, 기념하고, 전 세계에 알리고, 또렷한 역사로 기록하려 할까요? 고통과 수치와 비극의 역사를…….

기억과 공감, 둘은 깨지기 쉬운 유리잔 같은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희미해져 잊히기 마련이고, 공감 역시 줄어들어 증발하고 말 테지요. 이 둘을 단단히 묶어 우리 곁에 두는 일은 그것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고려했을 때, 환영해야 할 일임이 분명합니다.

기억과 공감을 단단한 물질의 형태로 시민 왕래가 잦은 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은 ‘근접성’과 ‘접촉성’ 측면에서 이점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이 우여곡절 끝에 ‘생명안전공원’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생명과 안전을 일깨우는 상징이 우리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겠지요. 시민들과의 근접성을 생각했을 때 교외보다는 도심에 자리하는 것이 유리할 것입니다. 가까운 거리에 일상의 공간으로 손쉽게 접근해 볼 수 있게 만들어진다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며 유족의 아픔에 공감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공간은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따뜻한 공동체로 만드는 공간이 되겠지요.

접촉성은 기억과 공감의 전염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4·16생명안전공원이 도심 내 접근하기 좋은 곳에 세워지면 많은 사람이 방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끼리 서로 접촉, 교류할 기회가 증대되겠지요. 또 이곳이 추모만을 위한 의식의 공간으로 조성되지 않고, 여러 관련 행사가 열리는 일상의 공간으로 활용된다면 접촉성은 배가 되고 기억과 공감은 쉽게 전파될 것입니다.

▲ 4·16생명안전공원 예시도와 건립 안내 포스터. 2018.06. ⓒ사진 =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세월호 참사와 같은 국가적 재난을 기억하려는
건축의 의미와 가치는 어디에 있나.

일반적으로 ‘기억 건축’은 주류 역사에 속하지는 못하지만 기억 담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파편화 된 기억들을 역사화하는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긴 흐름의 역사에서는 고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또 계보학적 의미에서 벗어난 특유의 독자적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주로 거시적보다는 미시적으로, 망원경이 아니라 현미경으로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타납니다. 이 중 어떤 의미를 지니든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기억 건축은, 꼭 건축이 아니어도 기억이나 공감의 산물(광화문 세월호 추모관, 팽목항 인근 기억의 숲 등)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강물 같은 시간에 떠밀려 멀어져 가는 사건을 물리적 형태의 기억물(건축, 조각, 설치 예술 등)에 단단히 묶어 붙잡아 두면, 관련된 이들을 오랫동안 회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일종의 사당 같은 의식의 공간이 되는 셈이지요.

또 그것은 국가적 재난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지, 정부 역할이 부재할 때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 경각심을 줍니다. 그러한 재난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촉구하는 의미를 가진 공간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사랑했던 이들을 회상하고 추모하는 이들과 공감하는 일상의 공간이 마련된다는 점이 의미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만들어질 4·16생명안전공원엔 반드시 위의 의미들이 담겨야 하겠지요.


출처  [우리 시대 기억과 공간] 4·16의 기억과 4·16생명안전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