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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WTO·FTA·TPP

`한·미 FTA 협정문 번역도 엉터리`

"한·미 FTA 협정문 번역도 엉터리"
[기고] 오번역·오타 수두룩…"내용조차 알기 힘들다"
기사입력 2011-03-04 오전 8:25:40



한·EU FTA 비준동의안이 철회되고 다시 제출되는,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 있었다. 일부 상품의 비원산지 재료 비율이 잘못 기재되었기 때문인데, 한국정부는 단순한 실무상의 실수라고 넘어간다. 국회도 정부가 단 2개의 오류만 고친 협정문을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은채 어제 다시 상정해 버렸다.

협정문의 오류는 한·EU FTA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미 FTA 협정문에는 심각한 번역 오류가 너무 많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엉터리 번역은 물론, 심지어 영어본과 의미가 다른 것도 있다.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지 2년이나 지난 협정문에 이런 오류가 버젓이 살아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국어본이 동등한 정본이라고?

협정문 24.6조에 따르면 한국어본은 영어본과 동등한 정본이다. 한·EU FTA에도 이런 조항이 있지만, 한국어본의 지위를 영어본과 동등하게 정한 것은 다른 FTA와 비교할 때 매우 특이하다. 한·칠레, 한·싱가포르, 한·인도 FTA에서는 영어본이 한국어본에 우선한다. 한·EFTA와 한·아세안 FTA에는 한국어 정본 규정이 아예 없다. 그래서 한·미 FTA, 한·EU FTA에서 한국어본은 다른 FTA와 달리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그런데 한국어본이 영어본과 동등한 정본이 되려면 한국어본은 그 자체로 의미가 명확해야 하지만,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가 보아도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조항들이 너무 많다.

한·미 FTA 한국어본의 오류를 지재권 분야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재권을 중심으로 보는 이유는 한국의 지재권법은 조약이 국내법보다 우선한다는 예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가령 특허법 26조, 상표법 5조). 외국과의 교류를 대상으로 하는 선박안전법이나 국제민사사법공조법에서 조약 우선의 원칙을 두는 것이 보통인데, 국내에만 적용되는 지재권법에 조약 우선의 원칙은 둔 것은 매우 특이하고, 그래서 한미 FTA 한국어본에서 지재권 분야는 단순한 번역 작업이 아닌 입법 작업에 버금가는 특별한 검토를 거쳐야 한다.


비전문가의 번역

▲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한·미 FTA 협상을 주도ㅤㅎㅔㅆ던 그는 지금 삼성전자 해외법무 담당 사장을 맡고 있다. ⓒ프레시안
먼저 지재권 제도의 문외한이 한 번역이 눈에 띈다. 협정문 18.2조 8항의 "cause mistake"를 "실수를 야기"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이다. 상표법에 "실수의 야기"와 같은 개념은 없다. 상표의 출처나 상품의 품질에 대한 '오인'이란 개념을 미국에서는 'mistake'란 단어로 표현한다. 가령 인삼이 들어있지 않은 음료수에 '인삼주스'라는 상표를 사용하면 소비자는 인삼으로 만든 주스로 '오인'을 하지 '실수'를 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cause mistake"는 "오인을 초래"로 번역해야 맞다.

또 협정문 18.8조 4항에서 "inequitable conduct"를 "불공정 행위"라고 한 것도 오역이다. 이게 왜 오역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inequitable conduct"는 미국 특허 제도에만 있는 특수한 개념으로 공정거래법 위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명백한 오역이다. 가령 출원인이 자기가 알고 있는 종래 기술을 숨기거나, 최선의 발명 형태를 감추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inequitable conduct"를 정직 의무(duty of candor) 위반이라고도 한다. 이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신의칙에 반하는 행위"가 적당하다.


의미가 달라지는 오역

영어본과 의미가 달라지는 오역도 있다. 저작권 보호기간에 관한 18.4조 5항에는 저작물의 발행 연도가 하나만 있어야 하는데, 한국어본에는 마치 2개가 있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다. 영어본에서는 2번 표현된 발행 연도가 서로 같은 것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두 번째 발행 연도에는 "such"란 단어까지 사용하여 "such authorized publication"이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본은 서로 다른 표현, "최초로 허락되어 발행", "승인된 발행"을 사용했다. 이렇게 되면 저작권 보호 기간을 정하는 기준이 영어본과 달라진다.

앞에서 '인삼주스'를 예로 든 조항(18.2조 8항)에는 영문본에는 있는 "likely"가 아예 번역이 되어 있지 않다. '~할 염려가 있다'는 의미의 "likely"가 한국어본에는 빠져 있기 때문에, 예컨대 '인삼주스'로 "오인을 초래하는 경우"만 포함되고 "오인을 초래할 염려가 있는 경우"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어본에서는 이와 달리 "오인을 초래할 염려가 있는 경우"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차이는 상표권 행사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가령 영어본에서는 "오인을 초래했다는 점"을 입증하지 않아도 상표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한국어본에서는 "실제로 오인을 초래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상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협정문 18.10조 19항과 20항에서 "상표위조 의심상품,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유사한 상표 상품, 또는 불법 복제된 저작권 상품"은 영어본의 "suspected counterfeit or confusingly similar trademark goods, or pirated copyright goods"를 잘못 번역해서 의미가 달리지게 했다. 영어본에서 "suspected"는 '침해의 혐의 또는 의심이 있는'이란 뜻인데, 해당 조항에서 얘기하는 3개의 상품(상표 위조 상품,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유사한 상표 상품, 불법 복제된 저작권 상품)에 모두 적용된다.

그런데 한국어본에는 마치 상표 위조 상품에 대해서만 의심 상품인 것처럼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이 적용되는 국경조치는 법원에 의해 침해품으로 판정된 상품에 대한 조치가 아니라, 행정관청(보통 관세청 산하의 세관)에 침해의 의심이 있다고 권리자가 신고한 상품에 대한 행정조치이다. 따라서 상표 위조 상품 뿐만 아니라 유사 상표 상품, 저작권 침해품에 대해서도 모두 '의심' 상품으로 표현해야 한다. 한국어본에 따르면 상표 위조품에 대해서는 위조의 의심이 있는 경우 세관이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유사 상표 상품이나 저작권 침해 상품은 의심이나 혐의만으로는 부족하고 권리 침해가 확실한 경우에만 세관이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의약품 분야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허가-특허 연계 조항도 오역이 많다. 조문이 길어서 일부만 인용하면, 협정문 18.9조 5항 가호의 "제품 또는 그 승인된 사용방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승인당국에 통보된 특허존속기간동안"에는 최소한 3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제품"은 "의약품"으로 번역해야 한다. 마치 의약품 이외의 제품도 포함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어본의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에서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불분명하다. 영어본에 따르면 "대상으로 하는 특허"를 말하는데, 한국어본에서는 "대상으로 하는 특허존속기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승인당국에 통보되는 대상도 특허가 아니라 특허존속기간이다. 셋째, 앞에서 지적한 오류와 관련하여, "특허존속기간"은 "특허의 존속기간"으로 바꾸고, "대상으로 하는 것"은 "대상으로 하는 특허"로 고쳐야 한다.


의미를 알 수 없고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 오역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영어본과 의미도 다른 이 조항을 한 번 보자.

-협정문 18.8조 10항 가호

청구된 발명의 공개가 그 기술분야에 숙련된 인에게 그 지침을 청구의 전체 범위로 확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출원인이 출원일에 인지하거나 기술하지 아니한 대상이나, 또는 소유하지 아니하였던 대상을 청구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 청구된 발명은 그 공개에 의하여 충분히 뒷받침된다.

Each Party shall provide that a claimed invention: (a) is sufficiently supported by its disclosure if the disclosure allows a person skilled in the art to extend the teaching therein to the entire scope of the claim, thereby showing that the applicant does not claim subject matter which the applicant had not recognized and described or possessed on the filing date; and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특허 실무를 20년 가까이 한 필자로서도 영어본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용이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라 번역을 엉터리로 했기 때문이다. 이 번역이 왜 엉터리인지 이해하려면 간단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특허를 받기 위해서는 특허청에 서류를 제출하고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 때 제출하는 서류에는 발명의 내용을 설명하는 항목(이를 '발명의 상세한 설명'이라 함)과 특허의 권리로 청구하는 항목(이를 '특허청구범위'라 함)이 있다.

문제의 조항은 '발명의 상세한 설명'을 어떻게 기재해야 하는지 그 요건을 정한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2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 '발명의 상세한 설명'에 기재된 내용(teaching)이 특허청구범위에 기재된 권리범위를 다 포괄(extend to)해야 한다. 둘째, 출원인이 출원 당시에 인식하지 못했거나, 출원 당시에 '발명의 상세한 설명'에 기재하지 않았거나, 출원 당시에 발명을 완성하지 못했던 대상을 특허 권리로 청구하지 않아야 한다. 발명을 완성하지도 못했던 자가 권리를 취득한다는 것은 상식에도 반하는 결과이므로 이런 요건을 두는 건 당연하다.

지면의 제약으로 위 조항의 오역을 다 지적하기는 어렵고, 2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영어본의 "the teaching therein"을 뜻도 모른 채 "그 지침"으로 옮긴 것은 명백한 오역이다. "그 지침"에서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고, "지침"은 또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둘째, 영어본의 "possess"를 "소유"로 번역한 것은 오역의 정도를 넘었다. 특허 제도를 조금만 알고 있어도 "possess"를 "소유"로 번역하면 안 된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이 조항에서 "possess"는 무엇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고, '발명의 완성'을 의미한다. 발명을 완성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은 완성된 발명의 내용을 서류에 설명(describe)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본에는 "described"와 "possessed"가 "or"로 연결되어 있다.

"possess"를 "소유"라고 오역한 결과는 엄청나다. 한국어본을 따를 경우, 출원인은 출원 당시에 소유하지 않았던 대상에 대해서는 특허를 받을 수 없다. 가령 자동차 엔진을 발명한 자는 출원 당시 엔진을 생산하여 실제로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특허를 받을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는 영어본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다. 영어본에 따르면 출원 당시 자동차 엔진을 소유할 필요까지는 없고, 자동차 엔진 발명을 완성했다는 점을 보여주기만 하면 특허를 받을 수 있다. 한국어본을 정본으로 삼는 한·미 FTA가 통과되면, 수많은 등록 특허들이 줄줄이 무효로 될 판이다.


한·미 FTA - 이행법률로만 비준하거나 다시 비준동의안을 내거나

한·미 FTA 한국어본은 일반 회사로 치면 과장 결재도 받지 못할 수준의 번역이다. 영어본과 의미가 다르고, 내용을 알 수가 없어 정본으로서의 자격도 없다.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2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협정문은 국회동의를 거치지 않고 이행법률만 국회에서 처리하는 해결책이 있다. 미국이 이런 방식으로 FTA를 처리한다.

두 번째 해결책은 번역을 제대로 해서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새로 제출하는 것이다. 필자는 두 번째 방식을 추천한다. 엉터리 번역문으로 국회 비준을 서두르면, 경제영토가 넓어지기는커녕 국제적인 망신의 영토만 넓어질 뿐이고, 국회비준이 된다 하더라도 법 적용과 집행을 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을 피할 길이 없다.


/남희섭 변리사·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