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백혈병 논란, 원인 모르면 '다수결'?
백도명 교수 "과거에 유해물질 축적됐을 가능성 높다"
기사입력 2010-10-15 오후 9:23:35
각종 화학물질을 다루는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던 이가 백혈병이나 림프종 등의 혈액암에 걸렸다. 정부 당국은 피해 노동자의 발병과 작업환경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며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연관성이 없다'는 답변의 이유가 다음과 같다. 연관성이 없는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연관성을 조사하기에는 현대 의학 연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연관성을 찾을 수 없고, 미지의 영역에서 일어난 노동자 피해는 국가가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이다.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삼성 반도체 피해 노동자를 놓고 오간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랬다. 전문가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안이기에 국감 과정도 그만큼 복잡했다. 감사를 진행하던 김성순 환노위원장이 "질문도 어렵고 답변도 어렵다"고 토로할 만 했다. 노민기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민주당 이미경 의원의 질의를 받다 "나중에 서면으로 답변을 제출하고 전문가를 보내 설명토록 하겠다. 질의에 다 대답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손을 들 정도였다.
반도체와 백혈병, 삼성의 주장은 '증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전은 있었다. 적어도 '백혈병 발병과 삼성 반도체 공장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정부와 삼성의 입장은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감장에 증인으로 출석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은 "현재 사업장에 발암물질이 없다고 해서 과거에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며 "10년 전에 일했던 피해자가 유해물질이 축적될 가능성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성이 제공한) 문헌과 공정 방식 등을 봤을 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백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발암물질이 현재까지는 두 가지밖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앞으로는 더 발견될 수 있다"며 "(산업안전보건공단이) 두 가지 성분에 대해서만 조사하고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백 교수는 지난해 삼성 및 하이닉스 반도체, 엠코코리아 등 반도체 기업의 의뢰를 받고 반도체 사업장의 위험성에 대한 자문 보고서를 만든 산업의학 전문의다. 또한 그는 근로복지공단이나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산재 판정을 내릴 때 의견을 제시하는 전문가 그룹에 속해 있다.
산재 결정 기준은 '다수결'?
백 교수가 밝힌 것처럼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과거에 어떤 작업환경에서 일했는지 알 수 있는 조사 자료는 아직 불충분하다. 대신 조사과정에서 백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업무 연관성에 대한 다양한 찬반의견을 공단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정작 피해 노동자들이 신청한 산재에 돌아온 답변은 "업무와 연관됐을 가능성이 낮다"였다. 다수의 의견을 따랐다는 게 공단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손범규 의원은 이러한 산재 판정 절차에 이의를 제기했다. 손 의원은 "대법원 판결문 등을 보면 과학적으로 100% 증명되지 않아도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으면 산재가 인정되는 것으로 나와있다"며 "(공단은) 사안에 대해 근로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인과관계를 추단한 후에 전문가에게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물어야 하는데 반대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 의원은 "증명이 아직 되지 않는 사안에 대해 자연과학적 측면의 인과관계부터 물으니 교수같은 전문가도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놓는데 이를 근거로 조사 결과를 작성해 근로복지공단에 넘기고 있어서 산재 불승인이 나는 것"이라며 "교수들의 의견은 자문 자료에 그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단 측의 설명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여당과 야당의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조사 자체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삼성 기흥공장에 15개 라인이 있는데 1~5라인은 30년 전에 지은 구식 장비고 나머지는 최신 장비인데 역학조사에서는 노후라인과 신규라인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에서 발병률을 계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후 라인에서 발병률이 높을 가능성이 훨씬 많은데 전체 노동자를 표본으로 설정해 일반인의 발병률과 비교해 별 다른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삼성 이미지 실추 걱정하나"
백혈병 논란에서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삼성'이다. 반도체 사업장의 실체를 밝히는데 걸림돌이 되는 게 단순히 '연구의 부족함' 때문만은 아니다. 백 교수는 "대기업일수록 외부의 연구자가 현장을 파악하는 게 힘들다"라며 "삼성이 제시하는 자료만으로 판단해 (조사 결과가) 제한적이었다"이라고 말했다. 삼성 스스로도 피해 노동자 가족을 찾아다니며 산재보험 수준의 위로금을 줄테니 산재 신청이나 행정 소송을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이날 이미경 의원이 공개한 근로복지공단의 공문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산재 불승인 처분을 받은 피해 노동자들은 올초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공단은 경인지역본부에 보낸 공문에서 "소송결과에 따라 사회적 파장이 클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임을 감안하여 소송 수행에 만전을 기하라"며 "신속히 해당 법원에 삼성전자를 피고지인으로 소송고지신청서를 제출해 삼성전자가 보조참가인으로 동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삼성은 공문이 내려간 이후 변호사 6명을 선임해 소송에 참여했다.
이 의원은 "피해 노동자들이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도 힘든데 소송을 걸면 공단과 재벌이 한 몸이 되어 이기겠다는 건가"라며 "공문에서 밝힌 사회적 파장이 삼성의 경제적 타격과 이미지 실추를 말하는 건가? 그게 공단이 걱정할 사안인가"라고 질타했다.
이에 신영철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공단이 단독으로 소송하기 어려울 때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업주 및 보조참가인을 내세운다"며 "우리 직원이 전문성이 없어 소송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관련 사업장이나 전문가가 참여하는 절차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봉규 기자
백도명 교수 "과거에 유해물질 축적됐을 가능성 높다"
기사입력 2010-10-15 오후 9:23:35
각종 화학물질을 다루는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던 이가 백혈병이나 림프종 등의 혈액암에 걸렸다. 정부 당국은 피해 노동자의 발병과 작업환경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며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연관성이 없다'는 답변의 이유가 다음과 같다. 연관성이 없는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연관성을 조사하기에는 현대 의학 연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연관성을 찾을 수 없고, 미지의 영역에서 일어난 노동자 피해는 국가가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이다.
1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삼성 반도체 피해 노동자를 놓고 오간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랬다. 전문가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사안이기에 국감 과정도 그만큼 복잡했다. 감사를 진행하던 김성순 환노위원장이 "질문도 어렵고 답변도 어렵다"고 토로할 만 했다. 노민기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민주당 이미경 의원의 질의를 받다 "나중에 서면으로 답변을 제출하고 전문가를 보내 설명토록 하겠다. 질의에 다 대답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손을 들 정도였다.
반도체와 백혈병, 삼성의 주장은 '증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전은 있었다. 적어도 '백혈병 발병과 삼성 반도체 공장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정부와 삼성의 입장은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감장에 증인으로 출석한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은 "현재 사업장에 발암물질이 없다고 해서 과거에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며 "10년 전에 일했던 피해자가 유해물질이 축적될 가능성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삼성이 제공한) 문헌과 공정 방식 등을 봤을 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백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발암물질이 현재까지는 두 가지밖에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앞으로는 더 발견될 수 있다"며 "(산업안전보건공단이) 두 가지 성분에 대해서만 조사하고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백 교수는 지난해 삼성 및 하이닉스 반도체, 엠코코리아 등 반도체 기업의 의뢰를 받고 반도체 사업장의 위험성에 대한 자문 보고서를 만든 산업의학 전문의다. 또한 그는 근로복지공단이나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산재 판정을 내릴 때 의견을 제시하는 전문가 그룹에 속해 있다.
▲ 반도체 노동자의 희귀질환과 작업 환경의 연관성을 명확히 규명한 연구 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사실은 '연관성이 없다'라는 말로 쉽게 왜곡된다. 삼성 반도체 피해 노동자 10명에 대한 산재 신청이 모두 기각당한 게 그 예다. ⓒ프레시안(최형락) |
산재 결정 기준은 '다수결'?
백 교수가 밝힌 것처럼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과거에 어떤 작업환경에서 일했는지 알 수 있는 조사 자료는 아직 불충분하다. 대신 조사과정에서 백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업무 연관성에 대한 다양한 찬반의견을 공단 측에 전달했다. 하지만 정작 피해 노동자들이 신청한 산재에 돌아온 답변은 "업무와 연관됐을 가능성이 낮다"였다. 다수의 의견을 따랐다는 게 공단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한나라당 손범규 의원은 이러한 산재 판정 절차에 이의를 제기했다. 손 의원은 "대법원 판결문 등을 보면 과학적으로 100% 증명되지 않아도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으면 산재가 인정되는 것으로 나와있다"며 "(공단은) 사안에 대해 근로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인과관계를 추단한 후에 전문가에게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물어야 하는데 반대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 의원은 "증명이 아직 되지 않는 사안에 대해 자연과학적 측면의 인과관계부터 물으니 교수같은 전문가도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놓는데 이를 근거로 조사 결과를 작성해 근로복지공단에 넘기고 있어서 산재 불승인이 나는 것"이라며 "교수들의 의견은 자문 자료에 그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단 측의 설명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여당과 야당의 차이가 없었던 셈이다.
산업안전보건공단의 조사 자체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삼성 기흥공장에 15개 라인이 있는데 1~5라인은 30년 전에 지은 구식 장비고 나머지는 최신 장비인데 역학조사에서는 노후라인과 신규라인을 구분하지 않고 전체에서 발병률을 계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후 라인에서 발병률이 높을 가능성이 훨씬 많은데 전체 노동자를 표본으로 설정해 일반인의 발병률과 비교해 별 다른 특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삼성 이미지 실추 걱정하나"
백혈병 논란에서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삼성'이다. 반도체 사업장의 실체를 밝히는데 걸림돌이 되는 게 단순히 '연구의 부족함' 때문만은 아니다. 백 교수는 "대기업일수록 외부의 연구자가 현장을 파악하는 게 힘들다"라며 "삼성이 제시하는 자료만으로 판단해 (조사 결과가) 제한적이었다"이라고 말했다. 삼성 스스로도 피해 노동자 가족을 찾아다니며 산재보험 수준의 위로금을 줄테니 산재 신청이나 행정 소송을 포기하라고 종용한다.
이날 이미경 의원이 공개한 근로복지공단의 공문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산재 불승인 처분을 받은 피해 노동자들은 올초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공단은 경인지역본부에 보낸 공문에서 "소송결과에 따라 사회적 파장이 클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임을 감안하여 소송 수행에 만전을 기하라"며 "신속히 해당 법원에 삼성전자를 피고지인으로 소송고지신청서를 제출해 삼성전자가 보조참가인으로 동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삼성은 공문이 내려간 이후 변호사 6명을 선임해 소송에 참여했다.
이 의원은 "피해 노동자들이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도 힘든데 소송을 걸면 공단과 재벌이 한 몸이 되어 이기겠다는 건가"라며 "공문에서 밝힌 사회적 파장이 삼성의 경제적 타격과 이미지 실추를 말하는 건가? 그게 공단이 걱정할 사안인가"라고 질타했다.
이에 신영철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공단이 단독으로 소송하기 어려울 때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사업주 및 보조참가인을 내세운다"며 "우리 직원이 전문성이 없어 소송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관련 사업장이나 전문가가 참여하는 절차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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