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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사망전후 사찰-조사개입…목격자 사설정보원 가능성”

“중정, 사망전후 사찰-조사개입…목격자 사설정보원 가능성”
의문사위 조사보고서 다시보니
중정직원 “김용환도 요원” 진술...국정원 공식자료선 확인못해
위원 4:3으로 ‘규명 불능’ 판정
“장준하 공권력에 의해 사망, 이의 제기한 위원은 없었다”

[한겨레] 임인택 기자 | 등록 : 2012.08.15 20:47 | 수정 : 2012.08.16 08:32


▲ 장준하 선생은 고통과 수난 속에서도 평정심과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상계> 대표 시절의 장준하. 시대의 창 제공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을 푸는 데 가장 의욕을 보인 기구는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였다. 2000~2004년 활동한 의문사위 1, 2기가 내린 결론은 ‘진상규명 불능’이었다. 하지만 형식논리상 결론이 그러할 뿐, 의문사위는 사건 배경과 처리 과정 등 뒷배에 중앙정보부(중정)가 있음을 수차례 지목했다.

당시 중정 개입 의혹을 짙게 한 정황 가운데 하나가 ‘추락사 목격자’로 알려진 김용환씨다. 15일 의문사위의 조사보고서를 보면, 중정은 장준하 선생 사찰을 위해 사설 정보원을 고용했는데 김씨가 그중 하나일 가능성이 거론된다. 보고서는 “중정 6국의 박아무개 계장이 김씨도 장준하 관련 사설 정보원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는 조사내용에 근거해 “김씨가 장준하 사망과 관련해 중정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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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17일 추락 뒤 주검을 직접 옮겼다고 증언한 김씨는 사건 발생 뒤인 오후 4시부터 최소한 밤 12시까지의 행적도 불명확하다. 당일 현장검증에 동행하지도, 경찰 조사를 받지도 않았다. 의문사위는 “그가 장준하 사망 후 기관원을 만났을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민주당이 가동한 ‘장준하 사인규명 조사위’는 “김용환씨가 인공호흡 시 장 선생의 모습을 전혀 기억 못하고, 사고 당시 상황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처럼 진술한다”고 기록했다.

중정은 안전조사국(6국)과 경찰, 사설 요원 등을 통해 장 선생을 집중 사찰했다. “장준하의 (3선·유신)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에 탐지해 와해·봉쇄함으로 조직 확장을 방지”하고 “공작 필요시 보고 후 실시한다”는 내용의 중정 문건 등이 주요 근거다.

사건 발생 뒤 중정의 개입은 노골적이다. 사망 수시간 만에 경기도 포천 약사봉 사건 현장을 방문했고 경찰에게 ‘안 본 것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마라’고 했다. 당일 밤 12시께 의정부지청 서아무개 검사가 장 선생 주검을 검안할 때도 입회했다. 당시 포천경찰서 경찰관들은 의문사위 조사에 “외부 지시로 사건조사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현장검증 뒤 변사사건 기록을 중정이 복사해 갔다”고 진술했다. 이를 토대로 의문사위는 “중정 요원의 사건조사 개입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포천서 쪽 경찰이 사망 신고 접수 전 경기도경으로부터 사망 소식을 전달받은 점 등을 근거로 기관이 사망 사실을 사전 인지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지만 중정 후신인 국가정보원이 사설 정보원 운용 자료의 확인 내지 제출, 의문사위의 실지조사 등을 거부하면서 ‘장준하-김용환-중정’의 고리는 추정 상태에 머물러 있다. 국정원은 사찰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장 선생의 사망과 관련해서는 1장의 상황보고서 말고는 의문사위의 자료 제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의문사위는 2004년 4월 28일 전체회의에서 절차에 따라 장 선생의 의문사 인정 여부를 표결했다. 4명은 ‘진상규명 불능’, 3명은 ‘의문사 인정’에 손을 들었다. 4 대 3의 의미는 당시 의문사위 관계자의 언론 인터뷰로 가늠된다. “장준하가 공권력에 의해 사망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한 위원은 없었다. 다만 정확한 진실규명을 위한 방법론에 의견차가 있었을 뿐이다.” 37년 만에 이뤄진 유가족들의 검시 결과는 이 역접 관계를 재조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 “중정, 사망전후 사찰-조사개입…목격자 사설정보원 가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