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 ‘장준하 간첩단’ 조작하려 40일 고문”
경호비서 박세정씨가 묻어뒀던 이야기
[한겨레] 박경만 기자 | 등록 : 2012.08.29 19:19 | 수정 : 2012.08.29 21:37
“1975년 숨지기 직전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유신정권을 깨부술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낌새를 챈 중앙정보부(중정) 요원들은 ‘장준하 같은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수행비서였던 나를 40여일 고문하며 간첩단 사건을 꾸며내려 했지요. 유신정권과의 팽팽한 긴장 속에 장 선생은 등산 도중 변을 당한 겁니다.”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하기까지 3년 가까이 수행비서로 경호를 맡았던 박세정(72)씨는 “장 선생이 추락사한 게 아니라 타살당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박씨는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의 8평 임대주택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37년간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털어놨다.
중정, 나를 남파간첩으로 몰고
장 선생 포섭했단 각본 만들어
지옥같은 고문 끝 성불구자 돼
장 선생, 함석헌·김대중과 접촉
유신체제 무너뜨리려 거사 준비
미군첩보대 훈련 받은 장 선생
자일없이 그곳서 추락 말 안돼
- 추락사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뭔가?
“장 선생은 미군전략첩보대(OSS) 특수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산악 전문가다. 그런 사람이 자일 없이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75도 가파른 절벽에서 추락했다니 어느 누가 믿겠나. 내가 중정에서 고문당하고 제주도에서 요양하고 있던 틈을 그들이 노렸던 것 같다. 장 선생은 목격자 김용환씨의 강권으로 등산에 따라나선 것이 분명하다. 1993년 민주당 조사 때 김씨가 ‘중정의 사설정보원’이라는 중정 직원의 증언이 나왔는데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번에 유골에서 명백한 타살 증거가 나왔는데도 진상 규명을 하지 못하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 숨질 무렵, 장 선생은 어떤 정치적 활동을 했나?
“선생은 1974년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그해 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박 정권을 무너뜨리기 어렵다. 비상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자주 말했다. 숨지기 직전 재야 원로 함석헌 선생, 왕래가 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은밀히 만났다. 75년 7월 말께는 광주광역시의 홍남순 변호사에게 밀지를 전달했다. 박 정권에 결정적 치명타를 가할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장준하를 철저히 감시·추적해 보고하라’고 요원들에게 지시하고 ‘장준하 1일 보고’를 작성해 행적을 추적했다. 73년 나를 간첩으로 조작하며 고문을 자행하던 중정 수사관들도 입만 열면 ‘장준하 같은 빨갱이는 죽여야 된다’고 떠들어댔다. 어떤 형태로든 선생을 죽일 것 같았다.”
- 어떤 연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했나?
“중정 정보요원들은 73년 2월 총선 때 장 선생이 출마한 서울 동대문을 선거구에서 부정선거에 강하게 항의하던 나를 노렸다. 수행비서였던 나를 간첩으로 몰아,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방해물인 장 선생까지 간첩으로 엮으려고 꾸며낸 ‘각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 친척의 빨치산 경력을 빌미로 ‘거물 남파간첩’ 혐의를 씌워,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작전을 벌였다. 결국 그해 가을 붙잡혀 지옥 같은 고문을 당했다.
40일 동안 독방에 갇혀 ‘고문 기술자’한테서 무릎관절 뽑기, 거꾸로 매달기, 5일 동안 잠 안 재우기 같은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나를 ‘북에서 김일성 부자를 세 번 만났고 고등 밀봉교육을 받았으며, 강원도 동해안 섬을 거점으로 침투해 장준하 선생에게 거액의 공작금을 건네주고 각계각층을 포섭해 국가 전복 음모를 획책했다’는 각본의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했다. 협조하면 출세도 시켜주고 벼락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회유도 했다. 단식하며 저항하자 고문기술자가 주요 부위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성불구자로 만들었다.”
- 장 선생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함석헌 선생의 씨알농장에서 일하던 중 72년 함 선생의 서울 원효로 자택에서 장 선생을 처음 만났다. 73년 2·27 총선을 앞두고 함 선생의 권유로 장 선생 경호를 맡게 됐다. 보수도 받지 않고 일하는 내게 장 선생은 쌀포대를 건네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을 총선 캠프에 합류해 이부영·김도연씨 등과 함께 선거참관인으로 개표를 감시했다. 서울대 사범대에서 개표가 시작돼 장 선생이 압도적 1위를 달리는데, 갑자기 참관인들을 내쫓은 뒤 여당 후보의 몰표가 쏟아졌다. 참관인이던 나는 개표를 중단시키며 항의하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국가원수 모독죄, 공무집행 방해죄 등으로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급히 달려온 장 선생이 정보요원들에게 호통쳤다. ‘박정희 깡패집단의 부정선거 음모를 알고도 선거판에 뛰어든 내가 잘못이다. 분명히 내가 이긴 선거지만 포기하고 돌아설테니 아무 죄 없는 참관인을 당장 풀어내라.’ 하찮은 청년의 인권을 위해 미련 없이 국회의원직을 포기한 거인의 풍모가 지금도 선하다.”
박세정씨는 홍남순 변호사, 이해학·문대골 목사 등의 증언에 힘입어 2002년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출처 : “유신정권 ‘장준하 간첩단’ 조작하려 40일 고문”
경호비서 박세정씨가 묻어뒀던 이야기
[한겨레] 박경만 기자 | 등록 : 2012.08.29 19:19 | 수정 : 2012.08.29 21:37
▲ 장준하 선생이 숨지던 무렵 수행비서였던 박세정씨가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 자택에서 관련 자료 등을 보여주며 ‘장 선생 유골 상흔이 37년 만에 드러난 만큼 타살 의혹을 이번에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
“1975년 숨지기 직전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유신정권을 깨부술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낌새를 챈 중앙정보부(중정) 요원들은 ‘장준하 같은 빨갱이는 죽여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수행비서였던 나를 40여일 고문하며 간첩단 사건을 꾸며내려 했지요. 유신정권과의 팽팽한 긴장 속에 장 선생은 등산 도중 변을 당한 겁니다.”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하기까지 3년 가까이 수행비서로 경호를 맡았던 박세정(72)씨는 “장 선생이 추락사한 게 아니라 타살당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만신창이가 된 박씨는 지난 26일 서울 마포구의 8평 임대주택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37년간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털어놨다.
중정, 나를 남파간첩으로 몰고
장 선생 포섭했단 각본 만들어
지옥같은 고문 끝 성불구자 돼
장 선생, 함석헌·김대중과 접촉
유신체제 무너뜨리려 거사 준비
미군첩보대 훈련 받은 장 선생
자일없이 그곳서 추락 말 안돼
- 추락사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뭔가?
“장 선생은 미군전략첩보대(OSS) 특수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산악 전문가다. 그런 사람이 자일 없이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75도 가파른 절벽에서 추락했다니 어느 누가 믿겠나. 내가 중정에서 고문당하고 제주도에서 요양하고 있던 틈을 그들이 노렸던 것 같다. 장 선생은 목격자 김용환씨의 강권으로 등산에 따라나선 것이 분명하다. 1993년 민주당 조사 때 김씨가 ‘중정의 사설정보원’이라는 중정 직원의 증언이 나왔는데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번에 유골에서 명백한 타살 증거가 나왔는데도 진상 규명을 하지 못하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 숨질 무렵, 장 선생은 어떤 정치적 활동을 했나?
“선생은 1974년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그해 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박 정권을 무너뜨리기 어렵다. 비상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자주 말했다. 숨지기 직전 재야 원로 함석헌 선생, 왕래가 뜸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은밀히 만났다. 75년 7월 말께는 광주광역시의 홍남순 변호사에게 밀지를 전달했다. 박 정권에 결정적 치명타를 가할 모종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장준하를 철저히 감시·추적해 보고하라’고 요원들에게 지시하고 ‘장준하 1일 보고’를 작성해 행적을 추적했다. 73년 나를 간첩으로 조작하며 고문을 자행하던 중정 수사관들도 입만 열면 ‘장준하 같은 빨갱이는 죽여야 된다’고 떠들어댔다. 어떤 형태로든 선생을 죽일 것 같았다.”
- 어떤 연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당했나?
“중정 정보요원들은 73년 2월 총선 때 장 선생이 출마한 서울 동대문을 선거구에서 부정선거에 강하게 항의하던 나를 노렸다. 수행비서였던 나를 간첩으로 몰아, 박정희 정권이 영구집권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방해물인 장 선생까지 간첩으로 엮으려고 꾸며낸 ‘각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 친척의 빨치산 경력을 빌미로 ‘거물 남파간첩’ 혐의를 씌워,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체포작전을 벌였다. 결국 그해 가을 붙잡혀 지옥 같은 고문을 당했다.
40일 동안 독방에 갇혀 ‘고문 기술자’한테서 무릎관절 뽑기, 거꾸로 매달기, 5일 동안 잠 안 재우기 같은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나를 ‘북에서 김일성 부자를 세 번 만났고 고등 밀봉교육을 받았으며, 강원도 동해안 섬을 거점으로 침투해 장준하 선생에게 거액의 공작금을 건네주고 각계각층을 포섭해 국가 전복 음모를 획책했다’는 각본의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했다. 협조하면 출세도 시켜주고 벼락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회유도 했다. 단식하며 저항하자 고문기술자가 주요 부위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쳐 성불구자로 만들었다.”
- 장 선생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함석헌 선생의 씨알농장에서 일하던 중 72년 함 선생의 서울 원효로 자택에서 장 선생을 처음 만났다. 73년 2·27 총선을 앞두고 함 선생의 권유로 장 선생 경호를 맡게 됐다. 보수도 받지 않고 일하는 내게 장 선생은 쌀포대를 건네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을 총선 캠프에 합류해 이부영·김도연씨 등과 함께 선거참관인으로 개표를 감시했다. 서울대 사범대에서 개표가 시작돼 장 선생이 압도적 1위를 달리는데, 갑자기 참관인들을 내쫓은 뒤 여당 후보의 몰표가 쏟아졌다. 참관인이던 나는 개표를 중단시키며 항의하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갔다. 국가원수 모독죄, 공무집행 방해죄 등으로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급히 달려온 장 선생이 정보요원들에게 호통쳤다. ‘박정희 깡패집단의 부정선거 음모를 알고도 선거판에 뛰어든 내가 잘못이다. 분명히 내가 이긴 선거지만 포기하고 돌아설테니 아무 죄 없는 참관인을 당장 풀어내라.’ 하찮은 청년의 인권을 위해 미련 없이 국회의원직을 포기한 거인의 풍모가 지금도 선하다.”
박세정씨는 홍남순 변호사, 이해학·문대골 목사 등의 증언에 힘입어 2002년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출처 : “유신정권 ‘장준하 간첩단’ 조작하려 40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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