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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박정희·박근혜

박정희는 집 한 채만 남겼다? 웃음만 나옵니다

박정희는 집 한 채만 남겼다? 웃음만 나옵니다
[답사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박정희기념·도서관'
[오마이뉴스] 정운현 기자 | 12.03.06 11:51 | 최종 업데이트 12.03.06 11:51


▲ 구 서대문형무소 뒤편에 있는 '이진아기념도서관' ⓒ 정운현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동네의 자랑거리를 하나 소개하렵니다. 제가 사는 독립문 네거리, 구 서대문형무소 뒤편 언덕에는 아담한 도서관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2005년에 건립된 이 도서관의 이름은 '이진아기념도서관'입니다. '이진아'가 누군지 잘 모르시죠?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사도 아니니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도서관이 그를 '기념하는' 도서관이 됐을까요? 그 사정은 대략 이렇습니다.

1980년생인 진아는 올해로 서른 두 살이 됩니다. 그런데 진아는 지금 우리 곁에 없습니다. 미국 유학중이던 2003년, 그곳에서 불의의 사고로 졸지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때 진아의 나이는 꽃다운 스물 세 살. 딸의 돌연한 죽음 앞에 가족들은 망연자실했습니다. 슬픔 가운데 가족을 잃은 슬픔만한 것이 있을까요? 그러나 진아의 가족들은 그 슬픔을 이겨 내고는 진아를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뭔가 뜻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업가인 진아의 아버지는 진아가 평소 책을 좋아했던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그런 딸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 도서관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 건립기금으로 40여억 원을 선뜻 내놨습니다. 그러자 관할 서대문구청에서는 도서관 부지를 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2005년 9월, 이곳에 '이진아기념도서관'이 세워진 것입니다. 최신식 시설에다 '주민 친화형'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멀리서도 찾아오는 이용자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박정희기념관 연표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 한 가지

▲ 제1전시실 입구 정면에 걸린 박정희 대통령의 대형 사진. 이 사진 앞에서 인사를 하거나 합장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 정운현

근자에 바빠서 통 나들이를 못하다가, 지난 일요일(4일) 오후 모처럼 가족과 함께 상암동 '박정희기념·도서관'을 찾았습니다. 독립문에서 출발해 연세대-마포구청을 지나자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그 건너편에 있는 '하늘공원' 맞은편으로 새로 지은 '박정희기념·도서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다 보슬비까지 뿌려 날씨가 좋지 않은 탓인지 일요일임에도 방문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웅장한 돌기둥 사이로 두 단계의 돌계단을 올라서자 제1전시실이 나타났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왼편으로 안내데스크가 있고 정면 벽에 대형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으로 봐 70년대 중후반, 그의 말기 사진 같았습니다.

잠시 구경하면서 보니 방문객 가운데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이 사진에 대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또 50대 후반 아주머니 한 분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코스를 따라 전시물을 구경하면서 간간이 든 생각을 쓰고, '소감'은 마지막에 붙일까 합니다.

제1전시실 첫머리 오른쪽 벽에는 박정희 집권 18년의 '연표'가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연도별로 자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항목은 정치·경제·외교·국토개발·사회문화·자주국방·교육 등이었습니다. 연표 아래에는 그에 해당하는 사진이 한두 점씩 붙어 있었습니다. 박 정권이 막을 내린 1979년도까지의 연표를 살펴본 결과 내용은 주로 대통령 재직시절의 각종 준공식 등 치적 중심으로 나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표'를 보던 중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18년'은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부터 시작하는데 왠지 그 내용은 언급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 용어가 '군사혁명'이 됐든, '군사정변'이 됐든, 아니면 '군사쿠데타'가 됐든 이날을 뺄 수는 없을 텐데 왜 뺐는지 궁금했습니다. 1961년도 연표의 첫머리는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한 것이었으며, 그 아래에 그의 의장 취임식(7·3)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연표가 적힌 벽을 따라 작은 통로를 지나면 왼편으로 작은 공간이 하나 나타는데 이곳에선 박 정권 18년간의 업적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 맞은편 벽에는 박 대통령이 쓴 '민족중흥', '하면 된다', '근면 자조 협동', '새마을운동' 등의 글귀와 함께 각종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인당 GNP가 89달러(1962년)에서 1천 달러(1978년)가 됐으며, 수출은 4천만 달러(1962년)에서 100억 달러(1977년)로 증가한 사실 등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아픔은 없고, 경제성장만 있었다

▲ 군복차림의 박정희와 그 앞에 '혁명공약'이 걸려 있다. ⓒ 정운현

'수출' 코너로 가는 도중에 '5·16혁명'의 배경에 대해 언급한 곳이 있었는데 당시 박정희 일파가 내걸었던 명분치고는 너무 초라했습니다. 안내판에는 민주당 정권의 무능으로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으며 그로 인한 '당시 정세와 환경이 혁명이 생길 수 있는 요인을 유발'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도 '군사쿠데타' 기도와 그 이후의 처신에 대해 떳떳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연표' 부분에서 '5·16 군사혁명(쿠데타)' 부분을 언급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런 '심증'을 굳힐 만한 대목 하나가 그 현장에서 발견됐습니다. 군복차림의 박정희가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사진 앞에 '혁명공약'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총 6개항으로 된 이 '혁명공약' 제6항에는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분명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만약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이 없어서 그랬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궤변'이거나 아니면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 젊은 여성들이 미싱을 밟으며 작업하는 광경을 재현해 놓았다. 현장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미싱 돌아가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 정운현

'5·16' 후 박정희는 1년마다 제 손으로 별을 하나씩 더 달았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1963년 대통령선거에 육군 대장 군복을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출마했습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선거였지만 그는 마침내 그해 말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후 '3선 개헌'을 강행하면서까지 영구집권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그런 박정희도 집권 초기엔 '서민대통령'의 소박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혁명공약' 바로 옆에는 그가 펴낸 <국가와 혁명과 나>(1963년)가 전시돼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대목을 발췌해 소개했더군요.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이어 그 시절 '수출'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코너가 나타났습니다. 입구에는 '파독 간호사'들로부터 구로공단 가발공장, 누에고치공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女工)'들의 작업 모습이 재현돼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이들이 당시 진정한 '수출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었던 고초나 그 무렵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의 이야기는 그 어디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수출로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자랑 밖에는 없었습니다.


'국민의 아버지'라는 치장, 귀에 거슬렸다

이어 제2전시실로 가기 위해 제법 긴 계단을 내려가면서 자연스럽게 '고속도로'와 마주쳤습니다. 입구에는 그가 손수 그렸다는 고속도로 계획도와 인터체인지 구상도 등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50대 중반의 한 아주머니가 "고속도로에 차가 씽씽 달리고 얼마나 좋아?"라고 하자 고속도로 개통식 때 사용한 가위들을 구경하던 할아버지 한 분은 "참 많은 일을 하셨지"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에 대해 이런 정서(평가)가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필적과 각종 성과를 수치로 표현한 선전물을 한 관람객이 쳐다보고 있다. ⓒ 정운현

'새마을운동' 코너는 그 다음에 이어져 있었습니다. 열린 사립문을 들어서니 초가집 방안에서 세 식구가 무명옷 차림에 꽁보리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지붕개량을 한 집에서 세 식구가 깨끗한 복장에 조기가 오른 밥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새마을운동을 해서 지붕개량을 해 집도 좋아졌고 또 먹는 것도 좋아졌다는 얘기였습니다. 마당에는 우물 옆에 수도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차차 변해간 건 분명 맞습니다.

이 코너를 빠져나오자 '대한민국 국토의 종합 발전상'을 보여주는 대형 사각코너가 나타났습니다. 대형지도 위에 고속도로, 발전소, 댐, 공업단지 등을 표기한 후 그 위에 유리를 덮어 사람들이 유리 위에서 이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만들었더군요. 그리고 그 주위 네 면에는 치산·치수, 보릿고개 극복, 중화학공업, 과학기술 인재양성, 총력안보 등을 사진과 함께 육성해설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명실공히 박정희 공적 찬양의 '종합판' 같았습니다.

제1, 2 전시실이 치적 홍보 위주였다면 제3전시실은 '인간 박정희'가 주제였습니다.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이 입구부터 여럿 전시돼 있었고, 스크린에는 그의 어린시절 등을 담은 영상물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하자면,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지만 주눅들지 않고 잘 견뎌냈다거나 몸집이 작았지만 야무져 '대추 방망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구미초등학교 동창생 증언), 뭐 그런 식이었습니다.

박정희 18년 치적 찬양의 '종합판' 관람객들이 '대한민국 국토의 종합 발전상'을 보여주는 코너를 둘러보고 있다. ⓒ 정운현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표현도 더러 있었습니다. 교사시절 아이들을 따뜻함으로 가르쳤고, 장교가 돼서는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지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진 그런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대통령 시절 '국민의 아버지'라는 통치철학의 밑거름이 됐다고 하는 부분은 귀에 거슬렸습니다. 그가 어떤 이들에겐 '자애로운 아버지'였을지 몰라도 어떤 이들에겐 '폭군 중의 폭군'이었거든요. 이런 식의 인물 평가는 공정치 못합니다.

박정희-육영수 두 사람의 유품 전시는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어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인간적 체취가 묻어나는 소장품(예를 들면, 자필메모, 도장, 수첩, 안경, 훈장 등)이나 대통령 취임선서문, 대통령 전용지 메모 등을 신기한 듯 구경하였습니다. 실지로 그런 면도 없지 않았지만 '참 검소한 대통령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할 만도 해보였습니다.

유품 전시물 중간 중간에 <중앙일보 '실록 박정희' 中->에서 인용했다며 문구 몇을 써 붙였는데 '러닝셔츠를 헤지도록 입었다'는 건 몰라도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박 대통령은 '자손을 위해 미전(좋은 땅/필자)을 사두지 않는다'는 일본 한시를 자주 암송하곤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1남2녀의 자손을 위해 남긴 재산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살았던 서울 신당동 집 한 채 뿐이다."

'신당동 집'은 그가 준장 때 전세살이를 끝내면서 장만한 것으로 현재 육영재단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 한 채가 그가 남긴 유산의 전부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웃을 것입니다. 육영재단, 대구 영남대학, 게다가 요즘 한창 언론에 오르내리는 정수장학회 등은 대체 뭐냐는 것이지요. 비록 이것들이 유족들의 명의로 돼 있지는 않다고 해도 사실상 그의 자녀들이 주인 노릇을 하거나 또는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라도 박정희에 대한 객관적 정보 제공해주길...

▲ 지난 2월 21일 오전 서울 상암동 '박정희 기념·도서관'에서 딸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 아들 박지만씨 등 가족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개관식을 앞두고,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 회원들이 건물 입구에서 '박정희 기념관 폐관 촉구 기자회견'을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끝으로, '박정희기념·도서관'을 둘러본 소감을 두 가지만 정리해볼까 합니다.

첫째, 박정희 시대의 치적 및 개인 홍보에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 '박정희 기념관' 수준을 넘어 '박정희 찬양관'이 돼버린 꼴입니다. 그의 지지자들이나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되살리고 싶은 사람들이 보기엔 흐뭇한 공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도 남는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분명 공과(功過)가 교차되는 인물임에도 경제성장의 주역으로서의 박정희는 곳곳에 사진으로, 영상으로 넘쳐나면서 '독재자 박정희'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역사적 인물을 기릴 목적으로 세운 기념관(또는 기념도서관)은 대상인물의 전 생애를 고루 조명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의 치적 홍보는 물론 그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비치해 그에 대한 연구와 이해를 돕습니다. 참고로 미국의 경우 대통령 기념관 및 도서관은 대학원과 통합돼 '대통령 스쿨'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박정희기념·도서관' 역시 흑백사진 복제품이나 유품 몇 점을 전시할 것이 아니라 '박정희 시대'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들을 입수해서 전시, 열람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도 사람일진대 '인간 박정희', 특히 그의 정체성이랄 수 있는 '군인 박정희'의 모습은 좀체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오직 '대통령 박정희' '영웅 박정희'만 넘쳐났습니다. 게다가 그에게 '흠'이 될 만한 행적이나 사건에 대한 내용도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그러니 친일행적이나 좌익 전력은 물론 집권기간 동안의 독재통치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인터넷에 '박정희' 석 자만 치면 주루룩 쏟아져 나오는 것들임에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은 곤란하지 않습니까? 특히 국민의 혈세가 들어간 시설이라면 말입니다.

'박정희기념·도서관' 관계자 여러분께 청합니다. 이제라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다양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박정희라는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품격 있는 '박정희기념·도서관'으로 꾸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출처 : 박정희는 집 한 채만 남겼다? 웃음만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