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에 이럴수가/박정희·박근혜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①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① 연재를 시작하며
그 시절 모를 20·30대엔 개 타던 북만주 벌판 이야기
새로운 미래냐 과거회귀냐 총선·대선의 선택 앞에서 70년대 잔혹사를 돌아보다

[한겨레] 한홍구 역사학자 | 등록 : 2012.01.27 21:47 | 수정 : 2012.02.15 15:39


▲ 1970년대 말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앞줄 오른쪽)과 그 휘하에 있던 전두환(앞줄 가운데) 작전차장보와 노태우(앞줄 왼쪽) 행정차장보. 전두환과 노태우는 80년대 새로운 시대를 표방했지만 박정희가 써먹은 정책을 되풀이했다.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가 숨을 거두었다. 김근태에게는 70년대 내내 ‘공소외’란 별칭이 붙어다녔다. 김근태는 1971년 11월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이신범 등 친구들이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기소되었을 때, 다행히 검거를 모면했다. ‘공소외’란 꼬리표를 달고 잠수를 시작한 김근태는 박정희가 죽고서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김근태가 이름을 숨긴 채 치열하게 70년대를 보낼 때, 이근안 역시 절정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79년 3월 17일 이근안은 이석우라는 가명으로 조선일보사장 방우영으로부터 제13회 청룡봉사상 충(忠) 부문 본상을 받고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했다. 이근안은 연이어 간첩을 검거한 공로로 상을 받았는데, 사실 그 간첩이란 두들겨 맞아도 어디 가 하소연할 데가 없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납북어부들이었다.


김근태의 유신시대와 이근안의 유신시대

김근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지난해 12월 10일 거행된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 안타까운 결혼식 이틀 뒤인 12월 12일 <한겨레>는 이근안이 그해 2월 한 주간지와 했던 인터뷰 내용을 뒤늦게 실었다. 목사님 이근안은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심문기술자’라며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에 대한 심문은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의 치열한 두뇌싸움’의 연속인 ‘하나의 예술’이라고 강변했다. 이근안은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일을 하겠다면서 자신의 행위를 애국이라고 주장했다.

2012년은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해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10월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가 거행된 지 만 4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40년이라면 일제가 우리를 강점했던 기간보다 더 긴 기간이다. 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박정희의 망령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2012년의 대선에서 그때 그 시절의 ‘유신 공주’는 보수진영의 부동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유신시대를 말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들추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보수세력 중 내놓고 이근안을 옹호하는 자들은 드물겠지만, 그것은 이근안이 ‘재수 없게’ 걸려 그 악행이 백일하에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이근안은 홀로 70년대를 살지 않았다. ‘애국’의 이름으로 ‘예술’ 활동을 했던 수많은 이근안들은 빨갱이 천지가 된 이 세상을 개탄하는 애국노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높은 곳에서 은밀하게 이근안들의 예술행위를 후원하고 감상했던 자들은 민주정권 10년을 지내고 나서도 여전히 이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더 참담한 것은 한때 유신체제와 대결하고, 광주학살의 원흉들과 치열하게 맞섰던 자들이 이제 학살자들에게 뿌리를 둔 정당에 몸담고 박정희와 이승만과 친일파를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체제는 수많은 이근안들이 없었으면 하루도 지탱할 수 없는 체제였는데도 말이다.


해마다 전환기였고 날마다 격동기였던 70년대

흔히 유신시대라 불리는 박정희의 마지막 7년은 구조적으로 오늘의 한국을 만든 시기였다. 민주화 10년은 이 문제 많은 구조물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구조물을 바꾸지는 못했다.

한국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격동의 현대사였다. 100년 전 나라를 빼앗겼던 한국은 어느새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다. 인류 역사에서 근현대는 사람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정신없이 흔들어댄 시기였다. ‘압축 근대화’를 겪은 우리가 탄 롤러코스터는 다른 롤러코스터에 비해 몇 배나 빠른 쇼 배나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솟구치고를 거듭했다. 한국 현대사는 해마다 전환기였고 날마다 격동기였다. 1년에 몇 번씩 ‘○월 대란’설이 퍼지지 않았던 해는 없었다. 정말 많은 일이 벌어졌던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는 무려 18년이란 기간을 집권했다. 박정희가 죽고 갑자기 등장한 전두환과 그 뒤를 이은 노태우는 박정희의 근위병 출신들이었다. 전두환은 새로운 시대를 표방했지만, 사실 5·16 군사반란 직후 박정희가 써먹은 정책을 되풀이했다. 박정희가 군부 안에 공들여 키운 사조직 하나회 출신들이 요직을 독차지한 채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민주화가 된 것도 아니고 안 된 것도 아니고,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한 것도 아니고 청산하지 못한 것도 아닌 채 세월은 흘러갔다. 영남 군벌의 마지막 상속자 노태우와 박정희·전두환 세력의 품에 안긴 한때의 민주투사 김영삼이 5년씩 10년,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정희 세력의 일부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김대중과 현실의 박정희의 후예들과는 끊임없이 타협했지만 과거의 박정희를 청산하고자 했던 불행했던 대통령 노무현이 각각 5년씩 10년, 그리고 박정희식 고도성장시대의 총아로 등장하여 국가를 완벽하게 사유물화한 이명박이 또 5년 이 나라를 통치하는 사이에 ‘87년 체제’의 생명력은 이제 완전히 바닥이 나 버렸다. 6월항쟁 무렵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60~70%에 달했던 때와 국민소득 2만달러, 무역규모 1조달러를 돌파했지만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자신을 하층민이라 여기는 현재의 한국은 전혀 다른 사회이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치러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87년 체제의 동력이 소진했다는 점에서, 보수정권과 민주정권을 다 겪어본 우리에게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유신체제 - 87년 체제 - 2012년 체제

▲ 1972년 9월11일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결심공판에 선 김근태의 동지들. 왼쪽부터 심재권, 장기표, 이신범, 조영래.(위 사진) 사진 출처 〈70년대 캠퍼스〉.1979년 3월 18일치 〈조선일보〉. 전날 이석우라는 가명으로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으로부터 제13회 청룡봉사상 충(忠)부문 본상을 받고 1계급 특진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아래 사진)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기본적으로 1970, 80년대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집권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집권은 2007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진영의 후보가 이명박을 내세운 보수세력에게 530만표라는 역대 최다 표차로 완패하며 끝이 났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20, 30대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10년간 집권하다 허망하게 정권을 내주었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정권 재탈환을 위해 절치부심하지만, 옛 민주화운동 세력의 힘만으로 정권을 탈환한다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기로에 선 한국 사회의 방향타는 20, 30대가 쥐고 있다. 그런데 20, 30대는 유신시대를 경험하지도 않았고, 어떤 시대였는지 거의 모른다. 20대는 유신시대가 끝난 뒤에야 태어났고, 올해 마흔이 된 1973년생도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은 뒤에야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지금의 20, 30대에게 유신시대란 그 시절에 청년기를 보낸 긴급조치세대에게 ‘개 타고 말 장사 하던 북만주 벌판의 독립군’ 얘기만큼 머나먼 시절 이야기이다.

그러나 유신시대는 지금의 한국 사회의 뼈대를 만든 시기였다.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조차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사람들이었다. 70, 80년대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한마디로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세대였다. 목이 터져라 자유와 민주를 외쳤지만 정작 자유를 누려본 적도, 민주주의가 몸에 밸 기회도 갖지 못한 불행한 세대였다.

박정희가 복제하고 싶은 대통령 1위에 꼽히고, 그의 동상이 여기저기 세워지기 시작하고, 그의 딸 박근혜가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진영의 부동의 후보인 지금, 유신시대는 살아있는 과거이다. 진즉에 끝나버린 유신체제, 파탄이 나버린 박정희의 모델이 자꾸 되살아나는 것은 박정희의 망령을 자꾸 불러내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민주화세력이 박정희의 관에 제대로 못질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포함한 보수세력은 ‘잘살아 보세’를 외친 박정희를 뛰어넘지 못한 채 ‘부자 되세요’라는 달콤한 속삭임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민주화운동 세력 역시 대중들이 ‘민주화되니 살림살이가 이렇게 좋아졌다’고 느끼도록 만들지 못했으니 박정희를 땅에 묻는 데 실패했다. 죽은 박정희 시대를 신화화하려는 세력들이 노리는 것은 “과거의 미화를 통한 현재 자신들의 위상 강화”이다. 뉴라이트였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합리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고 김일영 교수는 박정희 모델은 시효가 만료되었다며 “이미 고도산업화 단계에 돌입한 현시점에서 재평가라는 명분하에 당시의 망령(亡靈)을 다시 불러내는 것은 그야말로 망령(妄靈)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래전에 갈파했다.

유신시대는 일제가 키워낸 식민지 청년들이 장년이 되어 사회를 운영해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친일잔재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 친일잔재를 청산하려던 세력이 거꾸로 친일파에게 역청산당한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참혹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박정희를 사령관으로 하는 병영국가는 그가 청년기를 보낸 시절 만주국의 국방체제나 일본의 총동원체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황국신민으로 연성된 ‘친일파’ 박정희의 진면목은 청년장교 시절보다도 만주국이나 쇼와유신의 실패한 모델을 다시 살려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유신체제의 폭압성은 박정희의 지도력 부족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된다. 박정희는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따라 복잡해진 사회구성을 더 이상 최소한의 형식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는 이끌어나갈 수 없었다. 60년대에서 70년대로의 ‘퇴행’은 박정희가 체질에 맞지 않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틀을 벗고 젊었을 때부터 익숙한 일본식 모델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 들고나온 것을 의미했다. 유신시대는 김근태와 그 벗들에게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뒤집어씌운 자들이 일으킨 진짜 내란의 시대였다.

1970년대는 역동적이란 말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정말 많은 일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영화나 연극보다 현실은 더 극적이었다. 70년대는 ‘쨍하고 해 뜰 날’을 꿈꾸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서울로 몰려왔던 시기다. “10월유신, 100억$ 수출, 1000$ 소득” 이런 구호로 유신이 시작되고 40년이 지나 한국의 무역규모는 1조달러를 돌파했다. 그때 꿈같이 들렸던 1000달러 소득은 현재 탈북자가 속출하는 북한의 국민소득 규모이다. 신당동에 낡은 기와집 한 채밖에 가진 것이 없었던 청렴한 육군소장이 자녀들에게 10조 원을 훌쩍 넘을 자산(정수장학회, 육영재단, 영남대학교)을 물려준 기적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이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아, 박정희!’와 ‘악, 박정희!’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유신시대도 하나의 유신시대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총화단결’을 부르짖었던 유신시대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까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다양한 세력 간의 쟁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유신시대의 모습은 서로 경합하는 여러 개의 역사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현재의 입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부각시키려는 장면이나 흐름은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박정희는 ‘아, 박정희!’이지만, 또다른 사람들에게는 ‘악, 박정희!’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70년대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시작되었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70년대는 평화시장에서 타오른 전태일의 불길로 시작되었다. 평화시장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세월을 보냈어도 사장님의 역사와 시다의 역사가 쉽게 하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똑같은 70년대를 보냈어도 강남 땅값이 10~20원 하던 시절 1만평, 10만평 땅을 사놓은 사람과 전세금도 없어 절절매는 사람의 한국 현대사는 말죽거리 신화와 말죽거리 잔혹사만큼 거리가 멀다. 박정희를 숭배하는 자들은 정작 박정희가 실시한 평준화나 그린벨트나 의료보험을 때려 부수려 하고 박정희를 비판하는 민주세력은 이를 지키려고 하는 것을 보면 40년이란 세월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유신과 오늘’은 서로 경합하는 유신시대의 역사상 사이에서 안이한 균형잡기 식의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신과 오늘’은 한국 사회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것이냐, 박정희의 망령이 인도하는 과거로 돌아갈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2012년 오늘,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의 뿌리나 줄기가 되는 시대를 돌아볼 것이다.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던 유신시대를…. 명칭부터 100년 전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베껴온 복고적이고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을….

한홍구

재미있는 현대사 칼럼의 세계를 열어준 털보 역사학자.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평화박물관 상임이사로 일한다. 2004년부터 3년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한겨레> <한겨레21>에 ‘역사이야기’와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를 연재했다. 지은 책으로 <대한민국사> 1~4권과 <특강>, <지금 이 순간의 역사>가 있다.


출처 :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