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 그러나 천하가 다 아는 극비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③ 공작명 ‘풍년사업’
[한겨레] 한홍구 역사학자 | 등록 : 2012.02.24 20:14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는 극비리에 준비되었다.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사흘 전에야 주한외교사절에게 통보해야 한다며 귀띔을 받았고,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조차 일본 출장 중에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권력 내부에서 유신의 은밀한 준비공작에 깊이 개입한 이는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 법무부 장관 신직수,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 보안사령관 강창성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3선개헌까지 한 박정희가 1975년 임기를 마치고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에서 박정희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예상한 일이었다.
유신의 비밀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곳,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가였다. 유신의 마지막 날에도 김재규는 딱 30분 전에야 거사에 끌어들인 심복들에게 박정희를 쏘겠다는 결심을 알렸다. 유신의 정점에 서서 모든 정보를 거머쥔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는 무슨 말이든지 일단 입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비밀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비참하게 몰락한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임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유신의 몰락도 참으로 은밀하게 왔다.
대만의 대나무 숲에서 들려온 ‘임금님 귀…’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는 3선개헌 때부터 자주 나오던 얘기였다. 특히 1971년 4월18일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박정희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는 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아직 유신을 향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김대중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나, 그의 불행한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박정희 역시 일주일 뒤 같은 장소에서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라고 한 약속을 불행하게도 지켜버렸다. 그는 유신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박탈해 버린 것이다.
김대중이 총통제 얘기를 꺼내기 일주일 전쯤인 4월12일 서울대 법대의 형법총론 강의실에서는 서울대 총장을 지낸 유기천 교수가 더는 형법을 강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는 법대 학생회장이자 총학생회장인 최회원이 경찰에게 곤봉으로 뒤통수를 맞고 끌려간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는 형법상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죄인데, 기소되기는커녕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다. 이어 그는 얼마 전 자유중국(대만)을 갔다가 자유중국의 고위층으로부터 지금 한국에서 자유중국의 총통제를 연구하러 온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경악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대만의 대나무 숲으로부터 들려온 것이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내란선동 혐의로 입건된 유기천은 자의반 타의반 망명길에 올랐고, 이 수업은 그의 마지막 수업이 되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사람들이 통일의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국회에서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에 대한 경고가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 7월22일 신민당 의원 나석호는 실미도사건(1971년 8월) 무렵 들은 이야기라며 한국의 헌법학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게 행정부 1인집권의 체제를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연구를 해가지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며, 그가 자유중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스페인의 프랑코 정부까지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7월28일에는 같은 당의 최형우 의원이 “한 모(한태연) 교수와 청와대 특별보좌관 몇 사람이 모 장소에 모여가지고 ‘드골 식 헌법’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지금 구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형우와 나석호는 이 질문 때문에 유신이 선포된 다음 보안사에 끌려가 정보의 출처를 대라며 호된 고문을 당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은 연막을 쳤다. 거사를 열흘쯤 앞둔 10월6일 청와대는 박정희가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11월13일 일본을 공식방문하여 천황을 만나고 수상과 회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본 외무성도 같은 시간에 이를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까지 이용해 연막을 피운 것이다. 경호실장 박종규가 일본에 출장을 간 것도 박정희의 방일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기만적인 방일 발표는 일본에 대해 엄청난 외교적 결례를 범한 것이지만, 일본은 이 몰상식한 행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지는 않았다. 이런 두 나라 간의 유착관계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오만한 자신감이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가져온 것이다.
“한번 더 뽑아달라 않겠다” 박정희의 3선 유세는 “더는 선거없다”는 말이었으니…
궁정동서 시작된 공작은 5·16장학생 김기춘을 거쳐 유신헌법으로 완성됐다
기분 나쁜 미국, 기분 나쁜 박정희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준비하면서 미국과 협의하거나 미국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국무총리 김종필이 주한미국대사 하비브를 통해 미국에 공식적으로 계엄 선포와 국회 해산에 대해 통보한 것은 유신 선포 하루 전인 1972년 10월16일 저녁이었다. 하비브는 뒤늦은 통보에 불쾌해했지만, 국회에서 야당 의원이 공개적으로 비밀공작의 윤곽을 꼬집어 말할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던 초헌법적 조치가 곧 취해질 것이라는 점을 미국이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에서 한 발을 빼기 시작한 미국은 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반공독재체제를 강화하여 미국이 한 발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는 것을 묵인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박정희보다 3주 앞선 9월21일,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적 위기상황을 촉발하고 있다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마르코스의 독재체제 강화를 묵인했던 것처럼 미국은 박정희의 독재체제 강화를 묵인해 주었다. 하비브는 미국이 즉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박정희가 예정된 수순을 밟는 것을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고 보고했지만, “미국이 앞으로 몇 시간 내에 박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도록 만드는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고 덧붙였다. 마르코스와 박정희의 시기 선택은 그들로서는 적절했지만, 미국의 외교당국 입장에서 볼 때는 교활한 것이었다. 미국의 정치판은 대통령 선거로, 일반 시민들은 월드시리즈로 아시아의 변방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였다.
미국은 계엄령 선포는 한국의 국내문제이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을 표했지만, 미리 전달받은 특별선언문에서 닉슨의 ‘중공’ 방문을 특별조치의 동기처럼 서술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는 요구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발표를 몇 시간 앞둔 최종 점검 회의 중 미국의 요구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가 답답해서… 우리가 거짓말했나…”라며 불쾌해했다. 하지만 국내의 반발도 상당할 텐데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빠지는 것을 피하자는 참모들의 건의로 이 대목을 삭제했다. 일본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역시 일본-‘중공’ 수교와 다나카 총리의 ‘중공’ 방문이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의 빌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볼 때 유신을 단행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인 미국, 일본의 대중국 수교 문제를 특별선언문에서 빼게 된 것에 대해 유신이 뼈다귀 빠져 흐물흐물한 ‘곤냐쿠’가 되었다고 일본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박정희에게는 흐물흐물한 ‘곤냐쿠’였지만 그 ‘곤냐쿠’에 민중들은 멍들고 질식당했다.
“야당 청중은 두 발로, 여당 청중은 차로”
유신의 구상과 준비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것을 두고서도 증언이 엇갈린다. 유신을 정당화하려는 쪽에서는 주로 남북대화 과정에서 북의 유일체제의 강고함에 자극을 받아 북과 대화하려면 국론이 결집되고 지도자에게 힘이 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당사자들이야 스스로 이런 주장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박정희는, 아니 총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내준다는 것은 원래 생각조차 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박정희도 분단국가 한국에서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다른 군부독재자들과는 달리 선거라는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 군복을 벗을 때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박정희와 달리 일반 시민 중에는 나도 그 불운한 군인 한번 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 힘이 약했던 박정희는 미국의 압박으로 선거를 치러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헌법을 뜯어고쳐 세 번째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는 지난 10년간의 ‘업적’으로 낙승할 줄 알았지만, 김대중 후보의 도전은 예상외로 거셌다. 1971년 4월18일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공원 유세에는 100만 인파가 몰렸다. 선거 이틀 전 같은 장소에서 열린 박정희의 마지막 유세에 김대중 유세 때보다 적은 인원이 모인다는 것은 공화당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유세 때도 꽤 많은 인원이 모였는데 김대중은 “야당 청중은 걸어가고 여당 청중은 차에 실려 간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도 그날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비서관의 말에 “모였다고? 모이긴 무슨 모여. 그냥 실어다 날랐지”라고 군중 대부분이 관권과 금력에 의해 동원된 것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야당 후보의 유세장에 인파가 몰렸을 때 북한 간첩이 경찰 복장을 하고 총이라도 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북한이 이를 틈타 남침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수백만 인파를 동원하느라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이런 선거가 싫었고, 선거에 대한 혐오감은 북한의 유세장 테러라는 상상의 위험으로 증폭되어 선거 망국론으로 확대되었다. 박정희 측근들은 이 무렵 박정희가 “이제 그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라고 내뱉는 것을 듣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풍년사업, 유신의 준비는 언제부터?
흔히 유신의 준비작업인 풍년사업은 이후락이 비밀리에 평양을 다녀온 직후인 1972년 5월께 궁정동 안가에서 시작되었다고들 한다. 그런데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 시절 필자가 찾아낸 보고서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71년 4월에 이미 풍년사업이 진행중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풍년사업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사업의 일환으로 중앙정보부 요원이 재일동포를 찾아가 국제전화로 한국의 친척들에게 김대중을 찍지 말라고 공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건을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의 당선을 막기 위한 공작을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까지 행했음을 보여준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 부국장을 팀장으로 하는 5명(1명은 브리핑 차트 제작을 담당하는 필경사)의 비밀공작팀은 궁정동에 둥지를 틀고 1972년 5월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과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헌법의 골격을 짜기 시작했고, 박정희는 거의 매주 이후락, 김정렴 등과 함께 이를 검토했다. 앞서 본 유기천 등의 증언으로 볼 때 궁정동 팀의 작업을 위한 자료 수집은 이미 1971년도에 이루어졌다. 궁정동 팀이 마련한 초안은 신직수가 장관으로 있던 법무부로 넘어갔다. 법무부에서는 박정희가 김지태의 부일장학회를 강탈하여 만든 5·16장학회의 첫 수혜자인 엘리트 검사 김기춘 등 10여명의 실무진이 궁정동 팀의 초안을 ‘헌법’의 형식에 맞게 만들었다. 최형우가 한 모 교수라고 얘기한 전 서울대 교수 한태연은 1972년 비상계엄 선포 후 박정희가 불러 청와대로 가보니 ‘헌법 개정안’이라 적힌 조그만 메모지를 내밀며 법무부를 도우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는 “법무부에 가보니 당시 김기춘 검사가 주도해 초안을 이미 완성해놓은 상태였고 법무부가 ‘골격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해 자구 수정만 해줬다”고 자신의 역할을 축소해서 설명했다. 다른 몇몇 자료들도 김기춘이 법무부 법무과장으로 있으면서 유신헌법 작성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지목했다. 이에 대해 김기춘은 자신은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로 일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 잔심부름 외에는 한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김기춘은 이때 평검사였던 것은 맞는데 그가 법무부 인권옹호(!)과장으로 승진했을 때 신문에서는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썼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포털사이트에서 ‘김기춘 유신’으로 검색해보니 대부분의 기사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유신으로 출세한 자들이 유신헌법을 자기 손으로 만든 사실을 감추는 것을 보니 유신이 창피한 일이긴 한가 보다.
출처 : 극비, 그러나 천하가 다 아는 극비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③ 공작명 ‘풍년사업’
[한겨레] 한홍구 역사학자 | 등록 : 2012.02.24 20:14
▲ 1971년 4월25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박정희 후보의 유세. 박정희는 이 자리에서 한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라는 약속을 불행하게도 지켜버렸다. 72 보도사진연감 |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는 극비리에 준비되었다.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은 사흘 전에야 주한외교사절에게 통보해야 한다며 귀띔을 받았고,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조차 일본 출장 중에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권력 내부에서 유신의 은밀한 준비공작에 깊이 개입한 이는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 법무부 장관 신직수,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 보안사령관 강창성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3선개헌까지 한 박정희가 1975년 임기를 마치고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에서 박정희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예상한 일이었다.
유신의 비밀공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은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곳,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가였다. 유신의 마지막 날에도 김재규는 딱 30분 전에야 거사에 끌어들인 심복들에게 박정희를 쏘겠다는 결심을 알렸다. 유신의 정점에 서서 모든 정보를 거머쥔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는 무슨 말이든지 일단 입 밖으로 나오면 더 이상 비밀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비참하게 몰락한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임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유신의 몰락도 참으로 은밀하게 왔다.
대만의 대나무 숲에서 들려온 ‘임금님 귀…’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는 3선개헌 때부터 자주 나오던 얘기였다. 특히 1971년 4월18일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 박정희씨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는 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아직 유신을 향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김대중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나, 그의 불행한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박정희 역시 일주일 뒤 같은 장소에서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정치연설은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라고 한 약속을 불행하게도 지켜버렸다. 그는 유신을 통해 국민들로부터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박탈해 버린 것이다.
김대중이 총통제 얘기를 꺼내기 일주일 전쯤인 4월12일 서울대 법대의 형법총론 강의실에서는 서울대 총장을 지낸 유기천 교수가 더는 형법을 강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는 법대 학생회장이자 총학생회장인 최회원이 경찰에게 곤봉으로 뒤통수를 맞고 끌려간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는 형법상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죄인데, 기소되기는커녕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다. 이어 그는 얼마 전 자유중국(대만)을 갔다가 자유중국의 고위층으로부터 지금 한국에서 자유중국의 총통제를 연구하러 온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경악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대만의 대나무 숲으로부터 들려온 것이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내란선동 혐의로 입건된 유기천은 자의반 타의반 망명길에 올랐고, 이 수업은 그의 마지막 수업이 되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사람들이 통일의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국회에서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에 대한 경고가 연달아 나오고 있었다. 7월22일 신민당 의원 나석호는 실미도사건(1971년 8월) 무렵 들은 이야기라며 한국의 헌법학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게 행정부 1인집권의 체제를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연구를 해가지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며, 그가 자유중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스페인의 프랑코 정부까지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7월28일에는 같은 당의 최형우 의원이 “한 모(한태연) 교수와 청와대 특별보좌관 몇 사람이 모 장소에 모여가지고 ‘드골 식 헌법’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지금 구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형우와 나석호는 이 질문 때문에 유신이 선포된 다음 보안사에 끌려가 정보의 출처를 대라며 호된 고문을 당해야 했다.
▲ 유신을 10일 앞두고 언론에 발표한 ‘일황 초청 박정희 일본 방문’은 연막 전술이었다. 1972년 10월7일치 <조선일보>. |
“한번 더 뽑아달라 않겠다” 박정희의 3선 유세는 “더는 선거없다”는 말이었으니…
궁정동서 시작된 공작은 5·16장학생 김기춘을 거쳐 유신헌법으로 완성됐다
기분 나쁜 미국, 기분 나쁜 박정희
박정희는 유신쿠데타를 준비하면서 미국과 협의하거나 미국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국무총리 김종필이 주한미국대사 하비브를 통해 미국에 공식적으로 계엄 선포와 국회 해산에 대해 통보한 것은 유신 선포 하루 전인 1972년 10월16일 저녁이었다. 하비브는 뒤늦은 통보에 불쾌해했지만, 국회에서 야당 의원이 공개적으로 비밀공작의 윤곽을 꼬집어 말할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던 초헌법적 조치가 곧 취해질 것이라는 점을 미국이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에서 한 발을 빼기 시작한 미국은 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반공독재체제를 강화하여 미국이 한 발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는 것을 묵인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박정희보다 3주 앞선 9월21일,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적 위기상황을 촉발하고 있다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마르코스의 독재체제 강화를 묵인했던 것처럼 미국은 박정희의 독재체제 강화를 묵인해 주었다. 하비브는 미국이 즉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박정희가 예정된 수순을 밟는 것을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고 보고했지만, “미국이 앞으로 몇 시간 내에 박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도록 만드는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고 덧붙였다. 마르코스와 박정희의 시기 선택은 그들로서는 적절했지만, 미국의 외교당국 입장에서 볼 때는 교활한 것이었다. 미국의 정치판은 대통령 선거로, 일반 시민들은 월드시리즈로 아시아의 변방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였다.
미국은 계엄령 선포는 한국의 국내문제이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을 표했지만, 미리 전달받은 특별선언문에서 닉슨의 ‘중공’ 방문을 특별조치의 동기처럼 서술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는 요구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발표를 몇 시간 앞둔 최종 점검 회의 중 미국의 요구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가 답답해서… 우리가 거짓말했나…”라며 불쾌해했다. 하지만 국내의 반발도 상당할 텐데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빠지는 것을 피하자는 참모들의 건의로 이 대목을 삭제했다. 일본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역시 일본-‘중공’ 수교와 다나카 총리의 ‘중공’ 방문이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의 빌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볼 때 유신을 단행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인 미국, 일본의 대중국 수교 문제를 특별선언문에서 빼게 된 것에 대해 유신이 뼈다귀 빠져 흐물흐물한 ‘곤냐쿠’가 되었다고 일본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박정희에게는 흐물흐물한 ‘곤냐쿠’였지만 그 ‘곤냐쿠’에 민중들은 멍들고 질식당했다.
“야당 청중은 두 발로, 여당 청중은 차로”
유신의 구상과 준비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것을 두고서도 증언이 엇갈린다. 유신을 정당화하려는 쪽에서는 주로 남북대화 과정에서 북의 유일체제의 강고함에 자극을 받아 북과 대화하려면 국론이 결집되고 지도자에게 힘이 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당사자들이야 스스로 이런 주장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박정희는, 아니 총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내준다는 것은 원래 생각조차 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박정희도 분단국가 한국에서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다른 군부독재자들과는 달리 선거라는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 때문에 군복을 벗을 때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박정희와 달리 일반 시민 중에는 나도 그 불운한 군인 한번 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 힘이 약했던 박정희는 미국의 압박으로 선거를 치러 두 차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헌법을 뜯어고쳐 세 번째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박정희는 지난 10년간의 ‘업적’으로 낙승할 줄 알았지만, 김대중 후보의 도전은 예상외로 거셌다. 1971년 4월18일 김대중 후보의 장충단공원 유세에는 100만 인파가 몰렸다. 선거 이틀 전 같은 장소에서 열린 박정희의 마지막 유세에 김대중 유세 때보다 적은 인원이 모인다는 것은 공화당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유세 때도 꽤 많은 인원이 모였는데 김대중은 “야당 청중은 걸어가고 여당 청중은 차에 실려 간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도 그날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비서관의 말에 “모였다고? 모이긴 무슨 모여. 그냥 실어다 날랐지”라고 군중 대부분이 관권과 금력에 의해 동원된 것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야당 후보의 유세장에 인파가 몰렸을 때 북한 간첩이 경찰 복장을 하고 총이라도 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북한이 이를 틈타 남침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수백만 인파를 동원하느라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이런 선거가 싫었고, 선거에 대한 혐오감은 북한의 유세장 테러라는 상상의 위험으로 증폭되어 선거 망국론으로 확대되었다. 박정희 측근들은 이 무렵 박정희가 “이제 그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라고 내뱉는 것을 듣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풍년사업, 유신의 준비는 언제부터?
▲ 군복을 벗으며 “다시는 본인과 같이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며 눈물을 흘렸던 박정희. 그 불운한 군인 한번 해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월간 <경제풍월> 2010년 9월호 |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 부국장을 팀장으로 하는 5명(1명은 브리핑 차트 제작을 담당하는 필경사)의 비밀공작팀은 궁정동에 둥지를 틀고 1972년 5월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과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헌법의 골격을 짜기 시작했고, 박정희는 거의 매주 이후락, 김정렴 등과 함께 이를 검토했다. 앞서 본 유기천 등의 증언으로 볼 때 궁정동 팀의 작업을 위한 자료 수집은 이미 1971년도에 이루어졌다. 궁정동 팀이 마련한 초안은 신직수가 장관으로 있던 법무부로 넘어갔다. 법무부에서는 박정희가 김지태의 부일장학회를 강탈하여 만든 5·16장학회의 첫 수혜자인 엘리트 검사 김기춘 등 10여명의 실무진이 궁정동 팀의 초안을 ‘헌법’의 형식에 맞게 만들었다. 최형우가 한 모 교수라고 얘기한 전 서울대 교수 한태연은 1972년 비상계엄 선포 후 박정희가 불러 청와대로 가보니 ‘헌법 개정안’이라 적힌 조그만 메모지를 내밀며 법무부를 도우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는 “법무부에 가보니 당시 김기춘 검사가 주도해 초안을 이미 완성해놓은 상태였고 법무부가 ‘골격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해 자구 수정만 해줬다”고 자신의 역할을 축소해서 설명했다. 다른 몇몇 자료들도 김기춘이 법무부 법무과장으로 있으면서 유신헌법 작성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지목했다. 이에 대해 김기춘은 자신은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로 일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 잔심부름 외에는 한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김기춘은 이때 평검사였던 것은 맞는데 그가 법무부 인권옹호(!)과장으로 승진했을 때 신문에서는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썼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포털사이트에서 ‘김기춘 유신’으로 검색해보니 대부분의 기사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유신으로 출세한 자들이 유신헌법을 자기 손으로 만든 사실을 감추는 것을 보니 유신이 창피한 일이긴 한가 보다.
출처 : 극비, 그러나 천하가 다 아는 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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