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취임식서 일본 특사 “아들 경사 보러왔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④ 유신의 정신적 뿌리
오노와 박정희는 ‘부자관계’였단 말이냐
[한겨레] 한홍구 역사학자 | 등록 : 2012.03.09 20:20 | 수정 : 2012.03.09 21:28
아기가 태어날 때 미리 이름을 지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박정희는 비상조치를 준비하면서 이 조치를 무엇이라 부를지를 미리 정해놓은 것 같지 않다. 이 조치는 한동안 ‘10·17 특별선언’이나 ‘10·17 비상조치’라고 불렸다. 이 조치로 탄생한 비상국무회의는 열흘 뒤인 10월27일 태어나서는 안 될 이 아이의 이름을 유신이라고 지었다. 유신이란 말은 일본의 명치유신(메이지유신)을 통해 익히 알려진 말이긴 했지만, 역사책에나 나오는 단어였지 이렇게 현실로 툭 튀어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10월17일에 발표했던 특별선언에도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나올 뿐 유신이 특별히 강조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유신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전인 <시경>의 대아문왕편(大雅文王篇)에서 문왕의 국정 혁신을 칭송하며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개혁으로) 그 명을 새롭게 했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서경>의 하왕윤정편(夏王胤征篇)에도 하왕의 명으로 윤후가 적을 정벌하러 갈 때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의하여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예전에 물든 더러운 습속을 모두 새로워지도록 해 주겠소”(舊染汚俗 咸與維新)라고 한 고사에 함여유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어 조대비가 고종으로 대통을 잇게 하면서 내린 교서에도 함여유신을 강조하여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함여유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박정희의 주변을 맴돌았던 권력형 역사학자 이선근이 원래 대원군 시대를 전공했기에 일부에서는 유신이란 이름을 이선근이 붙인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유신의 전 과정에 깊숙이 간여했던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은 중국 역사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박종홍과 그의 제자였던 임방현 두 특별보좌관이 <시경>과 <서경>의 고사를 빌려 10·17 조치를 10월유신이라 부를 것을 건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명치유신’ 못 떠올리도록 <시경> 등 끌어대
박종홍이나 이선근이 <시경>, <서경>이나 대원군을 끌어댄 것은 대중들이 유신 하면 당장 명치유신을 떠올리게 되는 것을 호도하려 한 것으로, 요즘의 유행어로 표현하면 유신이라는 말에 담긴 치명적인 일본색을 적당히 ‘마사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10월 이전, 박정희에게 유신이란 명치유신이며, 유신에 다른 근거를 갖다 붙인 이데올로그들도 이 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왜 하필 이름을 지어도 명치유신을 베껴 10월유신이라 지었나 한심하게 여겼지만, 권력의 생리를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유신의 이데올로그들은 박정희가 10·17 특별선언과 10월24일 유엔의 날 기념식 치사에서 연이어 ‘유신적 개혁’이란 말을 쓰는 것을 보고 박정희의 속마음에 들게끔 아예 ‘적’자를 떼어준 것이다. 이에 비하면 국무총리 김종필은 차라리 솔직했다. 그는 정부가 굳이 비상조치를 유신이라고 이름붙인 까닭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일본의 명치유신과 정신적으로 통하는 점이 있다”고 답했다.
박정희는 명치유신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감추지 않았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1963)에서 작은 섬나라 일본이 “명치유신이란 혁명과정을 겪고 난 지 10년 내외에는, 일약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실로 아시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며 “금후 우리의 혁명 수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박정희에게 명치유신은 한국이 계속 따라가야 할 모델이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961년 11월12일 박정희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 등 일본의 만주 인맥과 아카사카의 요정에서 만나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며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라고 밝혀 동석한 일본 정객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박정희의 롤모델이었던 명치유신의 지사들이 누구였을까. 사카모토 료마, 다카스기 신사쿠,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이 일찍 암살당하여 신화화된 인물도 있지만, 정한론을 펼친 사이고 다카모리,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바로 박정희가 감탄해 마지않은 명치유신의 지사들이었다.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그 실력자가 박정희 소장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본 정가는 매우 긴장했다고 한다. 극도로 반일적인 자세를 취했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장면 정권이 들어섰는데 갑자기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는 거의 대부분 민족주의와 친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박정희 사진이 박힌 호외를 본 일본 정객들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아냐?”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들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다카기 마사오라는 조선 청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본명이 박정희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박정희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교장인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 중장에게 큰절을 올린 행위가 일본의 보수인맥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이토 히로부미 ... 메이지유신 전설적 지사들은 그가 감탄했던 롤모델이었다
62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의 일 경축특사 오노 반보쿠 왈 “아들의 경사를 보러 왔다”
소화유신 쿠데타 장교들을 선망하다
박정희가 미국의 압력으로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 대통령에 취임할 때 일본에서는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大野伴睦)를 경축특사로 파견했다. 오노는 1962년 말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와 두 차례 회담을 한 바 있었다. 오노는 도쿄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는 (피차에)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라고 자랑하면서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말했다. 당시 양 김씨는 공교롭게도 각각 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민정당 대변인이었던 김영삼은 “일국의 대통령을 아들에 비유한다는 것은 국가 체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이것은 구보타 망언(1953년 한일회담의 일본쪽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에 유익했다고 주장) 정도가 아니라 그 몇 배 더한 망언”이라고 규탄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자민당·국민의당 등 3당의 공동 교섭단체인 삼민회의 대변인이었는데 오노가 일본에 들어가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사를 ‘세기적 연설’이라고 치켜세웠다는 말을 듣고는 ‘아들 자랑’이 심하다고 비꼬았다.
오노는 비록 총리를 지내지는 못했지만,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일본 정계의 거물로 망언만이 아니라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 떨어지면 ×도 아니다”라는 명언도 남긴 자이다. 그는 일본의 <중앙공론> 1960년 1월호에 일본, 한국, 대만을 합쳐 일본합중국을 만들고 나아가 동남아 국가를 합쳐 아세아연방을 만들자는, 즉 대동아공영권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하는 자였다. 그는 1962년 말 서울을 방문했을 때 김종필과의 회담에서 독도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영유’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오노가 박정희와 ‘피차’ 부자관계임을 인정하는 사이였다니 박정희를 아버지로 떠받드는 수많은 뉴라이트들은 오노의 손자가 되는가 보다. 친일파는 근대화의 아버지이고,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이고, 박정희는 근대화의 아버지라니 아버지가 많은 자들은 할아버지도 많은 법이다.
박정희에게는 명치유신 말고도 따라 배운 또 하나의 유신이 있었다. 바로 유산된 유신, 소화유신(쇼와유신)이다. 군부 내의 급진파 청년 장교들과 기타 잇키(北一輝) 같은 초국가주의자들은 명치유신을 재현해 보자고 1936년 2월26일 천황 친정을 명분으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 대신 여럿을 살해했지만 천황의 복귀명령으로 진압되어 주동자 15명이 사형을 당했다. 이들 황도파 장교들이 5·16 군사반란 이전 박정희의 또다른 모델이었다. 그는 군부 내의 동료들과 밤새 통음하면서 “2·26 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 아닌가 하고 토로”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술친구였던 소설가 이병주는 박정희가 “일본의 군인이 천황절대주의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일본의 국수주의 장교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했는데 일본이 망한 게 뭐냐. 지금 잘해나가고 있지 않나….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일본 국민의 저변에 흐르고 있어. 그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의회정치의 타도, 구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일소, 재벌 해체, 빈부격차 해소 등을 주장한 박정희의 생각은 소화유신을 추진하다가 진압당한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생각을 빼닮았다. 1930년대 일본의 급진파 청년장교들이 10년 정도의 다이쇼데모크라시를 못 견디고 뛰쳐나갔다면 박정희는 1년여에 불과했던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을 혼란이라며 판을 깨버렸다.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가 ‘어게인(Again) 1966’을 구호로 들고나왔다면 소화유신의 청년장교들이나 그들의 직계 후배인 다카기 마사오는 ‘어게인 명치유신’을 들고나온 것이다. 명치유신으로부터 70년이 지난 뒤 명치유신의 영광을 재현하자고 2·26 사건을 일으킨 황도파 장교들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로부터 우리가 일제의 지배를 받은 기간만큼인 36년이 지나 다시 ‘어게인 명치유신’을 들고나온 것은 더더욱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친일잔재가 청산되지 못했다는 것은 단지 식민지 시대에 고관을 지낸 자가 대한민국에서 또 고관을 지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강력한 식민지 체험이 만들어 놓은 내면화된 세계관이 해방 30년이 다 되어서 제도로, 체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황도파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뒤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유신체제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화 같은 정책은 황도파보다는 황도파와 대립했던 통제파의 구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헝가리 국민’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
헝가리 국민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일각에서는 유신헌법을 헝가리헌법이라 불렀다.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깊이 간여한 사람들의 성을 따서 ‘한갈이 헌법’이라 부른 것이 음이 좀 변한 것이다. 한갈이에서 한은 한태연, 갈은 갈봉근인데 이씨를 두고는 사람들마다 엇갈린다. 누구는 이후락을 들고 누구는 박정희가 존경했던 군 선배인 이용문 장군의 아들인 검사 이건개를 들고 또 누구는 유정회 의원을 지낸 교수 이정식을 꼽는다. 유신의 주역이었던 이후락은 한태연, 갈봉근에 비해 역할이 너무 크고, 이건개는 역할이 좀 달랐던 거 같고, 이정식은 1기 유정회에 들지 못한 것으로 볼 때 역할이 너무 작았던 것 같다. 아마도 호사가들이 이씨 한 사람을 더해 헝가리에 운을 맞춘 게 아닌가 싶다.
문헌으로 확인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 박정희의 행태를 보면 그는 천황을 꿈꾸었던, 꿈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몹시 부러워했던 것은 틀림없다. 유신헌법의 긴급조치권을 드골 헌법이나 자유중국 헌법과 비교하지만, 사실 긴급시에 의회를 거치지 않고 ‘칙령’을 반포할 수 있는 천황대권이 보장된 메이지 헌법이야말로 긴급조치권의 원형이 아닐까. 제국 일본에서 천황은 엄청난 권위를 지녔지만 그 자신이 헌법에 명시된 국가권력을 실제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박정희는 1960년대에 이미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한 데 이어 유신을 통해 절대적인 권위까지 차지하려 하였다. 이준식이 잘 지적한 것처럼 유신체제하의 한국 사회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것은 “천황과 황실에 대한 어떤 불경한 언행도 용납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과 일제의 패전을 입에 올리는 행위 자체를 중죄로 다스리던 일제 말기의 군국주의 통치”였다.
유신체제가 성립된 뒤 한국의 헌정사는 크게 바뀌었다. 4월혁명 직후를 제외하고는 유신 이전에는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에서 보듯이 개헌을 시도하는 쪽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쪽이고, ‘호헌’을 주장하는 쪽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쪽이었다. 유신을 분기점으로 호헌과 개헌 사이에 공수 교대가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고 헌법을 사유물로 만들었다. 유신헌법은 헌법이 아니었다. 이제 호헌, 그 유신헌법을 지키자는 자들은 독재의 앞잡이이고 개헌을 요구하는 쪽이 민주세력이 된 것이다.
출처 : 박정희 취임식서 일본 특사 “아들 경사 보러왔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④ 유신의 정신적 뿌리
오노와 박정희는 ‘부자관계’였단 말이냐
[한겨레] 한홍구 역사학자 | 등록 : 2012.03.09 20:20 | 수정 : 2012.03.09 21:28
▲ 1961년 11월 미국 방문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환담하는 박정희(왼쪽). 그가 롤모델로 삼았던 메이지(명치)유신의 지사들.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마스카,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가운데), 역시 그가 따라 배우고 싶었던 일본 쇼와(소화)유신의 2·26 쿠데타. 황도파 군인들이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5권 |
아기가 태어날 때 미리 이름을 지어놓는 경우도 있지만, 박정희는 비상조치를 준비하면서 이 조치를 무엇이라 부를지를 미리 정해놓은 것 같지 않다. 이 조치는 한동안 ‘10·17 특별선언’이나 ‘10·17 비상조치’라고 불렸다. 이 조치로 탄생한 비상국무회의는 열흘 뒤인 10월27일 태어나서는 안 될 이 아이의 이름을 유신이라고 지었다. 유신이란 말은 일본의 명치유신(메이지유신)을 통해 익히 알려진 말이긴 했지만, 역사책에나 나오는 단어였지 이렇게 현실로 툭 튀어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10월17일에 발표했던 특별선언에도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나올 뿐 유신이 특별히 강조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유신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전인 <시경>의 대아문왕편(大雅文王篇)에서 문왕의 국정 혁신을 칭송하며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개혁으로) 그 명을 새롭게 했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데서 나온 말이다. <서경>의 하왕윤정편(夏王胤征篇)에도 하왕의 명으로 윤후가 적을 정벌하러 갈 때 “저들 괴수들은 섬멸할 것이로되 협박에 의하여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예전에 물든 더러운 습속을 모두 새로워지도록 해 주겠소”(舊染汚俗 咸與維新)라고 한 고사에 함여유신이라는 말이 나온다. 철종이 후사 없이 죽어 조대비가 고종으로 대통을 잇게 하면서 내린 교서에도 함여유신을 강조하여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함여유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박정희의 주변을 맴돌았던 권력형 역사학자 이선근이 원래 대원군 시대를 전공했기에 일부에서는 유신이란 이름을 이선근이 붙인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유신의 전 과정에 깊숙이 간여했던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은 중국 역사와 한학에 조예가 깊은 박종홍과 그의 제자였던 임방현 두 특별보좌관이 <시경>과 <서경>의 고사를 빌려 10·17 조치를 10월유신이라 부를 것을 건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명치유신’ 못 떠올리도록 <시경> 등 끌어대
박종홍이나 이선근이 <시경>, <서경>이나 대원군을 끌어댄 것은 대중들이 유신 하면 당장 명치유신을 떠올리게 되는 것을 호도하려 한 것으로, 요즘의 유행어로 표현하면 유신이라는 말에 담긴 치명적인 일본색을 적당히 ‘마사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10월 이전, 박정희에게 유신이란 명치유신이며, 유신에 다른 근거를 갖다 붙인 이데올로그들도 이 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왜 하필 이름을 지어도 명치유신을 베껴 10월유신이라 지었나 한심하게 여겼지만, 권력의 생리를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유신의 이데올로그들은 박정희가 10·17 특별선언과 10월24일 유엔의 날 기념식 치사에서 연이어 ‘유신적 개혁’이란 말을 쓰는 것을 보고 박정희의 속마음에 들게끔 아예 ‘적’자를 떼어준 것이다. 이에 비하면 국무총리 김종필은 차라리 솔직했다. 그는 정부가 굳이 비상조치를 유신이라고 이름붙인 까닭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일본의 명치유신과 정신적으로 통하는 점이 있다”고 답했다.
박정희는 명치유신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감추지 않았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1963)에서 작은 섬나라 일본이 “명치유신이란 혁명과정을 겪고 난 지 10년 내외에는, 일약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실로 아시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며 “금후 우리의 혁명 수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박정희에게 명치유신은 한국이 계속 따라가야 할 모델이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961년 11월12일 박정희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 등 일본의 만주 인맥과 아카사카의 요정에서 만나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며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라고 밝혀 동석한 일본 정객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박정희의 롤모델이었던 명치유신의 지사들이 누구였을까. 사카모토 료마, 다카스기 신사쿠,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이 일찍 암살당하여 신화화된 인물도 있지만, 정한론을 펼친 사이고 다카모리,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바로 박정희가 감탄해 마지않은 명치유신의 지사들이었다.
5·16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그 실력자가 박정희 소장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본 정가는 매우 긴장했다고 한다. 극도로 반일적인 자세를 취했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장면 정권이 들어섰는데 갑자기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는 거의 대부분 민족주의와 친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박정희 사진이 박힌 호외를 본 일본 정객들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아냐?”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들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다카기 마사오라는 조선 청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본명이 박정희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박정희가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교장인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 중장에게 큰절을 올린 행위가 일본의 보수인맥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사이고 다카모리, 이토 히로부미 ... 메이지유신 전설적 지사들은 그가 감탄했던 롤모델이었다
62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의 일 경축특사 오노 반보쿠 왈 “아들의 경사를 보러 왔다”
소화유신 쿠데타 장교들을 선망하다
▲ 자민당 부총재와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일본 정계의 거물로 1962년 말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와 두 차례 회담을 했던 오노 반보쿠. ‘박정희의 아버지’를 자인했다. 일본 위키피디아 |
오노는 비록 총리를 지내지는 못했지만,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일본 정계의 거물로 망언만이 아니라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 떨어지면 ×도 아니다”라는 명언도 남긴 자이다. 그는 일본의 <중앙공론> 1960년 1월호에 일본, 한국, 대만을 합쳐 일본합중국을 만들고 나아가 동남아 국가를 합쳐 아세아연방을 만들자는, 즉 대동아공영권을 부활시키자고 주장하는 자였다. 그는 1962년 말 서울을 방문했을 때 김종필과의 회담에서 독도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영유’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오노가 박정희와 ‘피차’ 부자관계임을 인정하는 사이였다니 박정희를 아버지로 떠받드는 수많은 뉴라이트들은 오노의 손자가 되는가 보다. 친일파는 근대화의 아버지이고,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이고, 박정희는 근대화의 아버지라니 아버지가 많은 자들은 할아버지도 많은 법이다.
박정희에게는 명치유신 말고도 따라 배운 또 하나의 유신이 있었다. 바로 유산된 유신, 소화유신(쇼와유신)이다. 군부 내의 급진파 청년 장교들과 기타 잇키(北一輝) 같은 초국가주의자들은 명치유신을 재현해 보자고 1936년 2월26일 천황 친정을 명분으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 대신 여럿을 살해했지만 천황의 복귀명령으로 진압되어 주동자 15명이 사형을 당했다. 이들 황도파 장교들이 5·16 군사반란 이전 박정희의 또다른 모델이었다. 그는 군부 내의 동료들과 밤새 통음하면서 “2·26 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 아닌가 하고 토로”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술친구였던 소설가 이병주는 박정희가 “일본의 군인이 천황절대주의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일본의 국수주의 장교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했는데 일본이 망한 게 뭐냐. 지금 잘해나가고 있지 않나….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일본 국민의 저변에 흐르고 있어. 그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의회정치의 타도, 구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일소, 재벌 해체, 빈부격차 해소 등을 주장한 박정희의 생각은 소화유신을 추진하다가 진압당한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생각을 빼닮았다. 1930년대 일본의 급진파 청년장교들이 10년 정도의 다이쇼데모크라시를 못 견디고 뛰쳐나갔다면 박정희는 1년여에 불과했던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을 혼란이라며 판을 깨버렸다.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가 ‘어게인(Again) 1966’을 구호로 들고나왔다면 소화유신의 청년장교들이나 그들의 직계 후배인 다카기 마사오는 ‘어게인 명치유신’을 들고나온 것이다. 명치유신으로부터 70년이 지난 뒤 명치유신의 영광을 재현하자고 2·26 사건을 일으킨 황도파 장교들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로부터 우리가 일제의 지배를 받은 기간만큼인 36년이 지나 다시 ‘어게인 명치유신’을 들고나온 것은 더더욱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친일잔재가 청산되지 못했다는 것은 단지 식민지 시대에 고관을 지낸 자가 대한민국에서 또 고관을 지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강력한 식민지 체험이 만들어 놓은 내면화된 세계관이 해방 30년이 다 되어서 제도로, 체제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황도파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뒤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유신체제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화 같은 정책은 황도파보다는 황도파와 대립했던 통제파의 구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헝가리 국민’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
▲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깊이 간여했던 헌법학자 한태연(왼쪽)과 갈봉근. 두 사람의 성에다 ‘이’ 하나를 더 붙여 ‘한갈이 헌법’이라 부르던 말이 ‘헝가리’ 헌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
문헌으로 확인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 박정희의 행태를 보면 그는 천황을 꿈꾸었던, 꿈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몹시 부러워했던 것은 틀림없다. 유신헌법의 긴급조치권을 드골 헌법이나 자유중국 헌법과 비교하지만, 사실 긴급시에 의회를 거치지 않고 ‘칙령’을 반포할 수 있는 천황대권이 보장된 메이지 헌법이야말로 긴급조치권의 원형이 아닐까. 제국 일본에서 천황은 엄청난 권위를 지녔지만 그 자신이 헌법에 명시된 국가권력을 실제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박정희는 1960년대에 이미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한 데 이어 유신을 통해 절대적인 권위까지 차지하려 하였다. 이준식이 잘 지적한 것처럼 유신체제하의 한국 사회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것은 “천황과 황실에 대한 어떤 불경한 언행도 용납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과 일제의 패전을 입에 올리는 행위 자체를 중죄로 다스리던 일제 말기의 군국주의 통치”였다.
유신체제가 성립된 뒤 한국의 헌정사는 크게 바뀌었다. 4월혁명 직후를 제외하고는 유신 이전에는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에서 보듯이 개헌을 시도하는 쪽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쪽이고, ‘호헌’을 주장하는 쪽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쪽이었다. 유신을 분기점으로 호헌과 개헌 사이에 공수 교대가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고 헌법을 사유물로 만들었다. 유신헌법은 헌법이 아니었다. 이제 호헌, 그 유신헌법을 지키자는 자들은 독재의 앞잡이이고 개헌을 요구하는 쪽이 민주세력이 된 것이다.
출처 : 박정희 취임식서 일본 특사 “아들 경사 보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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