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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노동과 삶

공개변론 리허설은 관행…재판연구관이 내용까지 ‘제동’

공개변론 리허설은 관행…재판연구관이 내용까지 ‘제동’
대법원 ‘변론 간섭’ 논란
대법 “공개변론때마다 변론내용 의견조율 한다”
박 대통령 얼굴 자료 등 법정모독인지 의문
“재판부 불쾌할 수는 있어”

[한겨레] 이경미 기자 | 등록 : 2013.09.05 08:23 | 수정 : 2013.09.05 11:07


▲ 대법원의 통상임금 소송 공개변론에서 원고 대리인이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위해 준비한 전체 33쪽 분량의 자료 가운데 대법원으로부터 삭제 요구를 받은 부분.
5일 열리는 통상임금 소송 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을 앞두고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사전에 소송 당사자한테 일부 변론 내용을 삭제하도록 요구한 사실이 4일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대법원 연구관이 문제삼은 노동계 쪽 변호인의 변론 내용은 “금번 전원합의체 판결이 정치적·경제적 논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있음을 감안하여 주시기 바란다”는 대목이다. 또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이 들어간 파워포인트 화면 자료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변호인은 말하고 있다. 그 이유로 재판연구관은 “사법부 모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법조계 인사들은 노동계 쪽 변호인의 변론 내용을 사법부 모독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한 부장판사는 “재판부가 이런저런 압력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라는 취지로 말했다면 법정 모독이 될 수 있지만, 정치·경제적 논리가 아니라 법적 논리로 판단해 달라고 했다면 법정 모독이 되긴 어렵다”고 말했다. 또다른 판사는 “변호사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얘기다. 계속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라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법정 모독은 아니어도 재판부로서는 불쾌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변호인의 취지가 ‘압력에 굴하지 말고 독립적으로 판단해달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사법부가 압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한 변호사는 “재판부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다. 원고에게 유리한 변론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재판 전에 법원이 특정 내용의 변론을 하지 말라고 요청할 수 있는지는 또다른 문제다. 법정에서는 소송 당사자들이 쟁점을 벗어나거나 부적절한 발언을 하는 경우 재판장이 발언을 금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재판장이 아닌, 단순히 재판을 준비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사전에 변론 내용의 일부가 문제 있다고 보고 변론을 막으려 한 것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이에 따를 의무가 없다. 그럼에도 재판연구관들의 단순한 의견 표명 정도가 아니라 변론을 막으려는 의도였다면 부적절한 처사라는 게 공통적 의견이다. 한 변호사는 “사전검열도 아니고 미리 변론서를 제출하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은 공개변론을 앞두고 지난 3일 진행된 예행연습 과정에서 비롯됐다. 일반 재판에서는 예행연습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없다. 대법원이 공개변론 및 인터넷중계를 하면서 사전 예행연습이 필요해진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원·피고 양쪽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변론하고, 재판부가 파악한 쟁점을 벗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 예행연습을 한다. 통상임금 문제는 노사합의로 해결될 수 없는데도, 피고(회사) 쪽 파워포인트 자료에도 노사 양쪽이 악수하는 사진을 싣고 노사합의로 풀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변론과 관련없는 내용이라 빼달라고 요청했다. 피고도 반발했지만 결국 수용했다. 공개변론 때마다 변론 내용에 대해 의견조율을 한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법원 요구도 부적절하지만, 재판부가 불쾌해할 내용을 굳이 하겠다는 것도 법원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닐 수 있다. 순수하게 보면 의뢰인에게 도움이 되는 변론 내용인지는 의문이다”라고 말했다.


출처 : 공개변론 리허설은 관행…재판연구관이 내용까지 ‘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