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음모' 확인 후 100일 침묵...국정원 미스터리
[게릴라칼럼] '무능하거나 교활한' 국정원을 개혁해야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손우정 | 13.09.03 20:39 | 최종 업데이트 13.09.03 20:39
촛불 위에 돌덩어리 하나가 '퍽'하고 떨어졌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어느덧 내란을 음모한 이들을 조롱하는 목소리에 묻히고 있다. 이것이 노골적인 불법행위를 자행한 이들의 생존전략이라는 것이 뻔한 상황임에도 전쟁, 총, 사제폭탄, 군사행동이 넘실대는 언론 보도 앞에 무력해진다.
국정원은 이번 사건 하나로 개혁의 대상에서 반란 선동자들을 척결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순식간에 거듭나는 모양새다. 민주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국정원 개혁을 위한) '촛불시위와 내란예비음모 사건은 별개'라고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국정원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는 준간첩들을 어떻게 검거할 수 있었겠나?", "이런 저런 불법을 저질렀더라도 그 불법으로 내란음모자들을 검거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는 논리가 개혁의 당위성을 뒤덮는다.
검찰이 아닌 국정원이 직접 나서 수사권을 휘두른 이유도 뻔하다. 불법적인 국내 정치개입으로 인한 국내파트와 수사파트 축소, 혹은 해체 여론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로 뒤집고 있다. 국정원의 화려한 부활을 위한 타깃으로 이미 악마화 된 속칭 경기동부연합을 골라낸 것은 이견 없는 최선책이었다. 예상대로, 국정원 개혁을 위한 촛불을 들었던 이들 사이에는 큼지막한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꼼짝없이 포위당한 통합진보당
100일 전에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은 특출한 기억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국정원의 화려한 언론플레이로 관심의 초점이 모두 '5월 12일 합정동 강당'으로 모아지고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기란 무척이나 고단하다. 국정원은 녹취록을 슬금슬금 언론에 흘리면서 여론을 주도하는 것에 비해 통합진보당(진보당)의 대응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나 안 했나?"는 질문 앞에 "우리의 취지는..."으로 대응하는 것은 무엇인가 회피하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물론 당시 강당에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조사 하나, 토씨 하나에도 어감이 달라지고, 뭘 빼고 뭘 넣는지에 따라 취지가 왜곡될 수 있음은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논란에서 확인된 바다. 이것을 반박해야 겠는데 의존할 것은 기억밖에 없으니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변명이 아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100일 이전에 참여한 강연회나 토론회, 혹은 누군가와 진지하게 대화한 경험을 떠올려 보라. 토씨하나, 조사 하나의 왜곡을 짚어낼 방도는 없다. 막연히 "내가 말한 취지는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법정증거로 사용될 수 있느냐의 논란과는 별개로, 당시 무슨 말들이 오고갔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국정원이 확보했다는 동영상 (편집본 말고) 원본 공개 밖에 없다. 국정원이 자신감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법적 효력이 없더라도 지금까지의 언론 플레이처럼 공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법적인 해결이라기보다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5월 12일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본질이 보인다. 이 사건 역시 좋게 봐줘도 '국정원의 무능'일 수밖에 없다.
추론해 보자. 소위 '녹취록'이 상당부분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통합진보당에서도 발언 취지에 대해서는 크게 부정하지 않는 만큼, 5월 12일 합정동 강당에서 '한반도 전쟁 상황'에 대한 논의들이 오고 간 것은 사실로 보인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런 저런 짜깁기 보도가 판을 치고 있지만, 주요 논지를 골라내면 "만일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물리적 수단을 포함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부 참석자가 장난감 총 개조, 사제폭탄, 통신시설 마비 등의 엄청난 이야기를 꺼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정원은 이 사실을 즉시 인지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한 국민들도 '이러다 정말 전쟁 터지는 것 아니야?'라고 한번 쯤 생각했을 5월 당시, 국정원은 100여 명의 무리들이 '정말 전쟁이 터진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국가 기간 시설을 마비시키려는 모의를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사실을 파악한 국정원의 반응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이후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사라졌다. 이것은 내란음모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이 만에 하나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조건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국정원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임박했던 5월 12일에는 내란을 막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그 가능성이 사라진 시점에 관련자를 구속하고 사건을 공개하는 난리법석을 떤 것이다.
만일 국정원의 주장처럼, 그것이 단순한 '농담'이나 몇몇 무리들의 '과대망상'이 아니라 실제 내란의 가능성이었다면, 왜 그것을 파악하고도 좌시했는가? 실제 내란이 일어나 국가 기간시설이 파괴되고, 요인이 암살당하고, 개조한 장난감 총알이 휭휭 날아다닌 이후에 잡으려고?
표창원 경찰대 전 교수 역시 시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표 전 교수는 지난 8월 29일 그의 블로그에 "3년 간의 내사', '2012년 5월 비밀집회에서의 발언' 이 핵심증거...라면, 그리고 '총', '폭파', '인명살상' 등의 극히 위험한 내란 예비음모라면, 보다 일찍 전면적인 압수수색과 체포를 했었어야 하지 않나요?"라고 물으며 "특히, 핵심인 이석기 의원을 체포하려면 국회 회기 중이 아닌 시기에 영장 발부받아 체포할 수 있었잖아요?"라고 질문했다.
더구나 그것이 정말 이견의 여지가 없는 내란예비음모였다면, 복잡한 국회동의절차와 상관없이 5월 12일에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정원은, 그들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나라가 뒤집힐 내란음모'를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에 파악하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절차가 복잡하지만 언론에 지속적으로 보도될 국회 체포동의안 절차를 밟았다. 이것은 국정원의 주장을 모두 순수하게 신뢰하더라도 심각한 무능에 다름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묻는다. 이런 국정원에게 정말 나라와 자신의 안위를 맡길 수 있는가?
내란음모 파악하고도 국정원 왜 안 움직였나
물론 국정원은 자신의 주장을 언론에 찔끔찔끔 흘리는 방식으로 '시점'에 대한 변명을 늘어놨다. 지난 8월 31일 <국민일보>는 '공안 당국 관계자'의 입을 빌려 "최근 주시하던 RO조직 연락책이 잠적하고 내부 조력자와 연락이 끊기는 등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어 "국가정보원 등은 내사가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지난 28일 전격적으로 압수수색과 체포에 나서며 공개수사로 전환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5월 12일 행사에 참여해 관련 자료를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내부 조력자'가 일주일 이상 연락이 두절된 것이 갑작스런 언론노출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내부 조력자로 일려진 이아무개씨는 압수수색 한달 전부터 주변을 정리했고, 압수수색 직전인 8월 26일까지 정상출근 했으며, 사표를 제출한 것은 압수수색 다음 날인 8월 29일로 알려졌다. 게다가 국회에 제출한 체포동의안에 따르면 이아무개씨는 '중요 참고인'으로 적시되어 있는데, "본 사건의 실체진실 규명에서 제보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언급해 현재 그의 신변을 국정원이 보호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8월 28일 압수수색 시점에 대한 '공안 당국자'의 변명이 거짓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추가 자료 확보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도 변명이 되기엔 부족하다. 구속영장이나 국회 체포동의안에 명시된 근거들은 대부분 '5월 12일'로 좁혀 있을 뿐, 그 후 추가 자료를 확보한 것은 없다. 다만 '내란예비음모'와는 거리가 멀거나 온갖 의심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자극적인 내용을 언론에 지속적으로 흘리고 있을 뿐이다. 만일 국정원이 5월 12일 사건 파악 후에 더 확실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면, 그 시간의 결과 역시 국정원의 무능을 증명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모두 국정원의 주장에 근거한 판단이다. 국정원의 주장에 근거하더라도, 국정원은 한국사회의 내란예비음모를 즉시 파악하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내란음모자들이 내란을 일으키겠다는 전제조건이 사라진 뒤에야 뒷북을 쳤다. 이런 국정원, 어찌 무능하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만일, 국정원의 주장에 왜곡이 있거나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극적인 내용만 발췌하거나 단어 몇 개를 슬쩍 바꿈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북에 넘겼다고 주장했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처럼, 5월 12일의 사실 마저 마음껏 부풀린 것이라면? 만일 그렇다면 국정원은 '무능'의 혐의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추악한 범죄사실이 또 하나 추가된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자행한 자신의 범죄행위를 감추기 위해 '교활한 유능함'을 발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능이든 새로운 범죄이든, 국내 정치를 좌지우지하려고 초법적인 행동을 한 국정원은 대대적으로 개혁하거나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번 소위 '내란예비음모'사건의 본질은 '5월 12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어떤 경우의 수라도, 국정원이 더 이상 국민의 안위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국정원 개혁의 당위성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촛불, 녹취록-종북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문제는 우리 안의 자중지란이다. 녹취록이 과연 진실인지, 정말 무력을 동원해 국가 기간시설을 파괴하려 했는지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동영상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모두 국정원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국정원이 흘려주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쓰는' 역할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을 대하는 시각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국정원의 수사결과와 언론보도를 사실로 인정하고 비판할 수도 있고, 이제까지의 경험처럼 조작에 무게를 둘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언들은 여전히 조건부 가정, 즉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면'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모든 주장 앞에 '만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할 상황이라면 그것에 얽매여 설레발을 치기보다 더 큰 그림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시선을 불확실하고 모호한 퍼즐 속으로 돌려 세우길 원할 때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사실관계를 넘어선 마녀사냥이 득세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비판도 지지도 합리적으로 진행되기 쉽지 않다. 정보기관의 사건 조작이 적지 않았던 우리 역사가 말해 주는 교훈이 있다면 언론이 이상스러울 만치 광기에 휩싸인 보도를 쏟아낼 때, 그 광기에 함께 올라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대개 그런 광기는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진실을 덮지 않았나.
지금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내란으로부터 국민을 지켜내지 못하는 국정원의 무능함이거나, 정신 못 차리고 큰 거짓말로 위기를 넘어서보려는 교활한 유능함을 가진 국정원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다.
자신에게까지 덧씌워질 종북 이미지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출처 : '내란음모' 확인 후 100일 침묵...국정원 미스터리
[게릴라칼럼] '무능하거나 교활한' 국정원을 개혁해야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손우정 | 13.09.03 20:39 | 최종 업데이트 13.09.03 20:39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촛불 위에 돌덩어리 하나가 '퍽'하고 떨어졌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어느덧 내란을 음모한 이들을 조롱하는 목소리에 묻히고 있다. 이것이 노골적인 불법행위를 자행한 이들의 생존전략이라는 것이 뻔한 상황임에도 전쟁, 총, 사제폭탄, 군사행동이 넘실대는 언론 보도 앞에 무력해진다.
국정원은 이번 사건 하나로 개혁의 대상에서 반란 선동자들을 척결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순식간에 거듭나는 모양새다. 민주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국정원 개혁을 위한) '촛불시위와 내란예비음모 사건은 별개'라고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국정원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는 준간첩들을 어떻게 검거할 수 있었겠나?", "이런 저런 불법을 저질렀더라도 그 불법으로 내란음모자들을 검거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는 논리가 개혁의 당위성을 뒤덮는다.
검찰이 아닌 국정원이 직접 나서 수사권을 휘두른 이유도 뻔하다. 불법적인 국내 정치개입으로 인한 국내파트와 수사파트 축소, 혹은 해체 여론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로 뒤집고 있다. 국정원의 화려한 부활을 위한 타깃으로 이미 악마화 된 속칭 경기동부연합을 골라낸 것은 이견 없는 최선책이었다. 예상대로, 국정원 개혁을 위한 촛불을 들었던 이들 사이에는 큼지막한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꼼짝없이 포위당한 통합진보당
▲ 진보당원 "이석기 체포동의안 결사 반대"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와 의원단, 당원들이 2일 오전 국회본청 계단에서 '국가정보원의 내란음모 조작 규탄 및 체포동의안 원포인트 본회의 반대'를 위한 전국지역위원장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체포동의안 결사 반대, 국정원 해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남소연 |
100일 전에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은 특출한 기억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국정원의 화려한 언론플레이로 관심의 초점이 모두 '5월 12일 합정동 강당'으로 모아지고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기란 무척이나 고단하다. 국정원은 녹취록을 슬금슬금 언론에 흘리면서 여론을 주도하는 것에 비해 통합진보당(진보당)의 대응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나 안 했나?"는 질문 앞에 "우리의 취지는..."으로 대응하는 것은 무엇인가 회피하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물론 당시 강당에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조사 하나, 토씨 하나에도 어감이 달라지고, 뭘 빼고 뭘 넣는지에 따라 취지가 왜곡될 수 있음은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 논란에서 확인된 바다. 이것을 반박해야 겠는데 의존할 것은 기억밖에 없으니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변명이 아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100일 이전에 참여한 강연회나 토론회, 혹은 누군가와 진지하게 대화한 경험을 떠올려 보라. 토씨하나, 조사 하나의 왜곡을 짚어낼 방도는 없다. 막연히 "내가 말한 취지는 그것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법정증거로 사용될 수 있느냐의 논란과는 별개로, 당시 무슨 말들이 오고갔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국정원이 확보했다는 동영상 (편집본 말고) 원본 공개 밖에 없다. 국정원이 자신감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법적 효력이 없더라도 지금까지의 언론 플레이처럼 공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법적인 해결이라기보다 여론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5월 12일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본질이 보인다. 이 사건 역시 좋게 봐줘도 '국정원의 무능'일 수밖에 없다.
추론해 보자. 소위 '녹취록'이 상당부분 악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통합진보당에서도 발언 취지에 대해서는 크게 부정하지 않는 만큼, 5월 12일 합정동 강당에서 '한반도 전쟁 상황'에 대한 논의들이 오고 간 것은 사실로 보인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런 저런 짜깁기 보도가 판을 치고 있지만, 주요 논지를 골라내면 "만일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다면 물리적 수단을 포함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부 참석자가 장난감 총 개조, 사제폭탄, 통신시설 마비 등의 엄청난 이야기를 꺼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정원은 이 사실을 즉시 인지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한 국민들도 '이러다 정말 전쟁 터지는 것 아니야?'라고 한번 쯤 생각했을 5월 당시, 국정원은 100여 명의 무리들이 '정말 전쟁이 터진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국가 기간 시설을 마비시키려는 모의를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사실을 파악한 국정원의 반응이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이후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사라졌다. 이것은 내란음모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이 만에 하나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조건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국정원의 주장대로라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임박했던 5월 12일에는 내란을 막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그 가능성이 사라진 시점에 관련자를 구속하고 사건을 공개하는 난리법석을 떤 것이다.
만일 국정원의 주장처럼, 그것이 단순한 '농담'이나 몇몇 무리들의 '과대망상'이 아니라 실제 내란의 가능성이었다면, 왜 그것을 파악하고도 좌시했는가? 실제 내란이 일어나 국가 기간시설이 파괴되고, 요인이 암살당하고, 개조한 장난감 총알이 휭휭 날아다닌 이후에 잡으려고?
표창원 경찰대 전 교수 역시 시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표 전 교수는 지난 8월 29일 그의 블로그에 "3년 간의 내사', '2012년 5월 비밀집회에서의 발언' 이 핵심증거...라면, 그리고 '총', '폭파', '인명살상' 등의 극히 위험한 내란 예비음모라면, 보다 일찍 전면적인 압수수색과 체포를 했었어야 하지 않나요?"라고 물으며 "특히, 핵심인 이석기 의원을 체포하려면 국회 회기 중이 아닌 시기에 영장 발부받아 체포할 수 있었잖아요?"라고 질문했다.
더구나 그것이 정말 이견의 여지가 없는 내란예비음모였다면, 복잡한 국회동의절차와 상관없이 5월 12일에 현행범으로 체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정원은, 그들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나라가 뒤집힐 내란음모'를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기에 파악하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절차가 복잡하지만 언론에 지속적으로 보도될 국회 체포동의안 절차를 밟았다. 이것은 국정원의 주장을 모두 순수하게 신뢰하더라도 심각한 무능에 다름 아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묻는다. 이런 국정원에게 정말 나라와 자신의 안위를 맡길 수 있는가?
내란음모 파악하고도 국정원 왜 안 움직였나
물론 국정원은 자신의 주장을 언론에 찔끔찔끔 흘리는 방식으로 '시점'에 대한 변명을 늘어놨다. 지난 8월 31일 <국민일보>는 '공안 당국 관계자'의 입을 빌려 "최근 주시하던 RO조직 연락책이 잠적하고 내부 조력자와 연락이 끊기는 등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어 "국가정보원 등은 내사가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지난 28일 전격적으로 압수수색과 체포에 나서며 공개수사로 전환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5월 12일 행사에 참여해 관련 자료를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내부 조력자'가 일주일 이상 연락이 두절된 것이 갑작스런 언론노출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주장했다.
▲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지난 5월 경기동부연합이 결성한 지하조직 'RO(Revolutionaary Organization)'로 모임을 개최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종교시설의 모습. 국가정보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이 의원 사무실과 자택 등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선 다음 날인 29일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다. ⓒ 연합뉴스 |
그러나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내부 조력자로 일려진 이아무개씨는 압수수색 한달 전부터 주변을 정리했고, 압수수색 직전인 8월 26일까지 정상출근 했으며, 사표를 제출한 것은 압수수색 다음 날인 8월 29일로 알려졌다. 게다가 국회에 제출한 체포동의안에 따르면 이아무개씨는 '중요 참고인'으로 적시되어 있는데, "본 사건의 실체진실 규명에서 제보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언급해 현재 그의 신변을 국정원이 보호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8월 28일 압수수색 시점에 대한 '공안 당국자'의 변명이 거짓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추가 자료 확보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도 변명이 되기엔 부족하다. 구속영장이나 국회 체포동의안에 명시된 근거들은 대부분 '5월 12일'로 좁혀 있을 뿐, 그 후 추가 자료를 확보한 것은 없다. 다만 '내란예비음모'와는 거리가 멀거나 온갖 의심으로만 점철되어 있는 자극적인 내용을 언론에 지속적으로 흘리고 있을 뿐이다. 만일 국정원이 5월 12일 사건 파악 후에 더 확실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면, 그 시간의 결과 역시 국정원의 무능을 증명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모두 국정원의 주장에 근거한 판단이다. 국정원의 주장에 근거하더라도, 국정원은 한국사회의 내란예비음모를 즉시 파악하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내란음모자들이 내란을 일으키겠다는 전제조건이 사라진 뒤에야 뒷북을 쳤다. 이런 국정원, 어찌 무능하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러나 만일, 국정원의 주장에 왜곡이 있거나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극적인 내용만 발췌하거나 단어 몇 개를 슬쩍 바꿈으로써 노무현 대통령이 NLL을 북에 넘겼다고 주장했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녹취록처럼, 5월 12일의 사실 마저 마음껏 부풀린 것이라면? 만일 그렇다면 국정원은 '무능'의 혐의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추악한 범죄사실이 또 하나 추가된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자행한 자신의 범죄행위를 감추기 위해 '교활한 유능함'을 발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능이든 새로운 범죄이든, 국내 정치를 좌지우지하려고 초법적인 행동을 한 국정원은 대대적으로 개혁하거나 해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이번 소위 '내란예비음모'사건의 본질은 '5월 12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어떤 경우의 수라도, 국정원이 더 이상 국민의 안위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국정원 개혁의 당위성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촛불, 녹취록-종북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문제는 우리 안의 자중지란이다. 녹취록이 과연 진실인지, 정말 무력을 동원해 국가 기간시설을 파괴하려 했는지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동영상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정보를 모두 국정원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국정원이 흘려주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쓰는' 역할에 머물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을 대하는 시각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국정원의 수사결과와 언론보도를 사실로 인정하고 비판할 수도 있고, 이제까지의 경험처럼 조작에 무게를 둘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발언들은 여전히 조건부 가정, 즉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면'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서울역 광장 가득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촛불 국정원 대선개입 및 정치공작 규탄 제10차 범국민촛불대회가 31일 오후 서울역광장에서 국정원 시국회의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
여전히 모든 주장 앞에 '만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할 상황이라면 그것에 얽매여 설레발을 치기보다 더 큰 그림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시선을 불확실하고 모호한 퍼즐 속으로 돌려 세우길 원할 때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사실관계를 넘어선 마녀사냥이 득세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비판도 지지도 합리적으로 진행되기 쉽지 않다. 정보기관의 사건 조작이 적지 않았던 우리 역사가 말해 주는 교훈이 있다면 언론이 이상스러울 만치 광기에 휩싸인 보도를 쏟아낼 때, 그 광기에 함께 올라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대개 그런 광기는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진실을 덮지 않았나.
지금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내란으로부터 국민을 지켜내지 못하는 국정원의 무능함이거나, 정신 못 차리고 큰 거짓말로 위기를 넘어서보려는 교활한 유능함을 가진 국정원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다.
자신에게까지 덧씌워질 종북 이미지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출처 : '내란음모' 확인 후 100일 침묵...국정원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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