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 광풍에 무릎 꿇었던 진보세력
1994년 ‘주사파 광풍’에 ‘반성문’ 발표, 2003년 송두율 교수에 ‘전향’ 권유
[진보정치 627호] 권종술 기자 | 2013-10-01 10:06:17
지난 1950년 조셉 매카시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의 “내 손에 205명의 공산당원 목록이 있다”는 발언으로 매카시즘은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원으로 몰려서 체포됐다. 미국에서 시작된 매카시즘이 위력을 발휘한 건 한국이었다.
1963년 8대 대선에선 야당들이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전력 등을 문제 삼았다. 당시 박 후보는 “낡은 매카시즘 수법”이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박정희도 정권을 잡은 뒤엔 매카시즘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시켰다. 매카시즘은 이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987년 6월 항쟁을 지나고, 군사독재정권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리고 1994년과 2003년 우리는 상징적인 사건을 만나게 된다.
1994년 “정당·언론에도 주사파 있다”
1994년 7월 8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북정상회담을 불과 보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조문과 애도 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김영삼 정부는 조문을 불허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안정국 조성으로 야권과 진보진영을 공격했다.
공안정국에 불을 붙인 건 박 홍 서강대 총장이었다. 7월 18일 박 총장은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유학생이 교수로 있다”, “정당·언론에도 주사파 있다”고 발언했다. 바로 다음날 <중앙일보>는 ‘병균은 색출해야 한다’는 사설로 박 총장을 거들었다. 그리고 각종 언론과 국가기관이 총동원돼 주사파 색출 소동이 벌어졌다.
공안세력의 칼날이 거세지자 진보진영 내에선 균열이 일어났다. 8월 9일 민중정치연합(대표 김철수)과 진보정당추진위원회(대표 노회찬) 등 21개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까지의 통일운동이 친북성향 일변도 였다”면서 “주사파 배격”을 선언하고 나섰다. 기자회견 다음 날 노회찬 진보정당추진위 대표는 “국민적인 지지가 없는 학생운동·통일운동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며 “최근 일부 주사파학생들의 친북통일운동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주장은 정권의 공안탄압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7월과 8월 두 달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만 120명이 넘었다. 그해 상반기 구속자 숫자와 맞먹는 수치였다.
경상대학 교양 교재였던 ‘한국사회의 이해’가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았다. 심지어 공안당국은 청소년에게 탈춤과 민족문화활동을 보급하던 청소년단체 ‘샘’ 을 주사파 조직이라며 이적단체 구성 등의 혐의를 씌워 3명을 구속하고, 6명을 불구속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주사파 척결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구속된 이들의 상당수는 무죄로 풀려났다.
2003년 “송두율은 해방이후 최대간첩”
2003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빚어졌다. 그해 9월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국가정보원은 당시 그를 노동당 서열 23위 김철수와 동일인이라고 결론 내리고 체포 영장을 발부한 상태였다. 국정원은 송 교수를 ‘해방 이후 최고 거물급 간첩’으로 몰아세웠다. 그 과정에서 송 교수의 조선노동당 입당 사실이 밝혀졌다. 노동당 입당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보수세력의 공세는 거세졌다.
그의 귀국을 추진했던 참여정부와 진보진영 인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송 교수는 “학술 활동을 위해 북한을 드나들려면 관례적으로 노동당 가입 절차를 치러야 했고, 이후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노동당원임을 의식하지도 않았다”라고 해명했지만 진보진영에서조차 진의를 의심했다.
당시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경계도시2’엔 이런 진보진영의 태도가 잘 담겨 있다. “노동당원이 어떻게 경계인이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진보인사들. 그들은 “현 상황을 원칙이나 진정성으로 생각하지 말고, 축구할 때 골문을 수비하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생각하라”라며 노동당 탈당과 독일 국적 포기를 종용한다.
송 교수는 결국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당 탈퇴와 독일국적 포기를 밝혔다. 하지만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그리고 2004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보름 만에 한국을 떠났다.
4년 뒤인 2008년 대번원에선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여론재판은 모두 끝난 뒤였다.
다시 매카시즘이 태어나던 1950년 당시로 돌아가 보자. 존 매카시 공화당 상원의원의 발언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소동이 벌어지자 미국 민주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칫 자신들도 공산주의자로 몰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지난 1994년과 2003년 한국에서도 진보진영은 침묵하거나, 보수 세력의 공세에 무릎을 꿇었다. 매카시즘을 불러온 건 공안세력이지만 이를 키운 건 탄압에 함께 맞서 싸우지 않은 자칭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출처 :매카시즘 광풍에 무릎 꿇었던 진보세력
1994년 ‘주사파 광풍’에 ‘반성문’ 발표, 2003년 송두율 교수에 ‘전향’ 권유
[진보정치 627호] 권종술 기자 | 2013-10-01 10:06:17
지난 1950년 조셉 매카시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의 “내 손에 205명의 공산당원 목록이 있다”는 발언으로 매카시즘은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원으로 몰려서 체포됐다. 미국에서 시작된 매카시즘이 위력을 발휘한 건 한국이었다.
1963년 8대 대선에선 야당들이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전력 등을 문제 삼았다. 당시 박 후보는 “낡은 매카시즘 수법”이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박정희도 정권을 잡은 뒤엔 매카시즘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시켰다. 매카시즘은 이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987년 6월 항쟁을 지나고, 군사독재정권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리고 1994년과 2003년 우리는 상징적인 사건을 만나게 된다.
1994년 “정당·언론에도 주사파 있다”
1994년 7월 8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북정상회담을 불과 보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조문과 애도 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김영삼 정부는 조문을 불허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안정국 조성으로 야권과 진보진영을 공격했다.
공안정국에 불을 붙인 건 박 홍 서강대 총장이었다. 7월 18일 박 총장은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유학생이 교수로 있다”, “정당·언론에도 주사파 있다”고 발언했다. 바로 다음날 <중앙일보>는 ‘병균은 색출해야 한다’는 사설로 박 총장을 거들었다. 그리고 각종 언론과 국가기관이 총동원돼 주사파 색출 소동이 벌어졌다.
공안세력의 칼날이 거세지자 진보진영 내에선 균열이 일어났다. 8월 9일 민중정치연합(대표 김철수)과 진보정당추진위원회(대표 노회찬) 등 21개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까지의 통일운동이 친북성향 일변도 였다”면서 “주사파 배격”을 선언하고 나섰다. 기자회견 다음 날 노회찬 진보정당추진위 대표는 “국민적인 지지가 없는 학생운동·통일운동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며 “최근 일부 주사파학생들의 친북통일운동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주장은 정권의 공안탄압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7월과 8월 두 달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만 120명이 넘었다. 그해 상반기 구속자 숫자와 맞먹는 수치였다.
경상대학 교양 교재였던 ‘한국사회의 이해’가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았다. 심지어 공안당국은 청소년에게 탈춤과 민족문화활동을 보급하던 청소년단체 ‘샘’ 을 주사파 조직이라며 이적단체 구성 등의 혐의를 씌워 3명을 구속하고, 6명을 불구속했다. 하지만 대대적인 주사파 척결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구속된 이들의 상당수는 무죄로 풀려났다.
2003년 “송두율은 해방이후 최대간첩”
2003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빚어졌다. 그해 9월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국가정보원은 당시 그를 노동당 서열 23위 김철수와 동일인이라고 결론 내리고 체포 영장을 발부한 상태였다. 국정원은 송 교수를 ‘해방 이후 최고 거물급 간첩’으로 몰아세웠다. 그 과정에서 송 교수의 조선노동당 입당 사실이 밝혀졌다. 노동당 입당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보수세력의 공세는 거세졌다.
그의 귀국을 추진했던 참여정부와 진보진영 인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송 교수는 “학술 활동을 위해 북한을 드나들려면 관례적으로 노동당 가입 절차를 치러야 했고, 이후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노동당원임을 의식하지도 않았다”라고 해명했지만 진보진영에서조차 진의를 의심했다.
당시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경계도시2’엔 이런 진보진영의 태도가 잘 담겨 있다. “노동당원이 어떻게 경계인이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진보인사들. 그들은 “현 상황을 원칙이나 진정성으로 생각하지 말고, 축구할 때 골문을 수비하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생각하라”라며 노동당 탈당과 독일 국적 포기를 종용한다.
송 교수는 결국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당 탈퇴와 독일국적 포기를 밝혔다. 하지만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그리고 2004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보름 만에 한국을 떠났다.
4년 뒤인 2008년 대번원에선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여론재판은 모두 끝난 뒤였다.
다시 매카시즘이 태어나던 1950년 당시로 돌아가 보자. 존 매카시 공화당 상원의원의 발언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소동이 벌어지자 미국 민주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칫 자신들도 공산주의자로 몰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지난 1994년과 2003년 한국에서도 진보진영은 침묵하거나, 보수 세력의 공세에 무릎을 꿇었다. 매카시즘을 불러온 건 공안세력이지만 이를 키운 건 탄압에 함께 맞서 싸우지 않은 자칭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출처 :매카시즘 광풍에 무릎 꿇었던 진보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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