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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팀 계약서에 찍힌 국정원 도장의 비밀

해킹팀 계약서에 찍힌 국정원 도장의 비밀
[시사IN 410호] 고제규·김연희·신한슬·이상원 기자 | 승인 : 2015.07.23 14:22:07


“지나친 업무에 대한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 합니다”
“저의 부족한 판단이 저지른 실수였습니다.”

국정원 직원 임아무개씨가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지만,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국정원 직원들조차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왜 그랬는지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국정원 직원 성명)”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내국인을 사찰하지 않았다는 유서 내용대로라면 그가 굳이 자료를 삭제하고, 자살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자살한 임아무개 직원의 발인이 7월 21일 진행되었다. ⓒ시사IN 신선영

<시사IN>은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됐을 수도 있을 ‘단서’ 하나를 확인했다. 바로 해킹팀과 국정원이 주고받은 계약서에 찍힌 영문 국정원 직인이다.

국정원과 이탈리아 해킹팀이 주고받은 계약서에는 두 종류의 직인이 찍혀 있다. 빨간색으로 된 ‘제5163부대장인(사진1)’이라는 한글직인과 파란색으로 된 ‘The 5163 Army Div. The Goverment of ROK(사진2)’라는 영문 직인이다.

▲ 사진 1. '제5163부대장인'이라는 국정원 한글 직인이 찍힌 계약서. 이 직인은 공식적으로 쓰는 직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계약서에 서명한 국정원 직원이 숨진 임아무개씨이다. OOOOO Lim 이라는 가명 영문 이름을 사용했다.

▲ 사진 2. 'The 5163 Army'이라고 찍힌 국정원 영문 직인이 찍힌 계약서. 이 직인은 국정원 밖에서 만든 막도장이다. ㄴ사는 해킹팀에 사진1 계약서를 폐기하고 영문 직인이 찍힌 이 계약서를 사용하라고 요청했다. 해킹팀은 한글 직인이 찍힌 사진1 계약서를 폐기하지 않았다. 해킹팀이 해킹되면서 두 계약서 모두 유출되었다.

<시사IN> 취재 결과 빨간색 한글 직인은 국정원이 사용하는 공식 직인이다. 국정원은 그동안 “‘5163부대’라는 명칭은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쓰지 않은 표현이다”라며 언론에 해명해왔다. 5163부대는 국정원의 외부 명칭이다. 유래는 박정희 정부 시절 중앙정보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5·16 군사쿠데타 때 박정희 소장이 새벽 3시에 한강철교를 넘었다는 데서 숫자만 따와 부대 이름을 지었다(<시사IN> 제322호 ‘국정원 위장 명칭 7452부대, 5163부대’ 참조). 노출된 명칭이지만, 국정원은 여전히 이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국정원 직원들이 금융기관 등에 내는 재직증명서에도 5163부대 직인을 쓴다. 공식 직인인 셈이다.

그런데 해킹팀과 국정원이 주고받은 계약서에서는 영문 직인이 등장한다. <시사IN> 취재결과 이 영문 직인은 숨진 국정원 임아무개 직원이 국정원 밖에서 제작해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시사IN>은 국정원과 해킹팀 계약을 중개한 ㄴ사 주변 도장집을 일일이 탐문 취재했고, 그 중 한 곳에서 계약서에 쓰인 ‘5163 Army’ 직인의 필름 도안이 남아있는 걸 확인했다. 두세 평 남짓한 도장집에는 사장 한 명만 근무했다. 도장은 보통 필름 상태 도안을 먼저 뜬 후 고무 직인으로 만든다. 이 도장집 사장은 계약서에 쓰인 도장에 대해 묻자 필름 상태 도안을 모아놓은 통을 들고 왔다. 이 통에 바로 ‘5163 Army’ 직인 필름 도안이 남아있었다. 계약서와 똑같은 직인이었다. 그 필름 도안을 이용해 똑같은 도장 하나를 새로 만드는 데 시간은 30분, 비용은 1만2000원이 들었다(사진3).

▲ 사진 3. 국정원과 해킹팀 계약을 중개한 ㄴ사 주변의 도장집에서 찾은 국정원 영문 직인 필름 도안. 사진 2에 쓰인 도장과 똑같은 도안이다. ⓒ시사IN 김은지

국정원과 해킹팀 사이의 계약을 중개한 ㄴ사는 처음에 빨간색 공식 직인이 찍힌 계약서를 보낸 뒤, 파란색 영문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해킹팀에 다시 보냈다. 그러면서 ㄴ사는 먼저 보낸 빨간색 한글 직인이 찍힌 계약서를 폐기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해킹팀 본사는 공식직인이 찍힌 계약서를 폐기하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고, 해킹팀 본사가 해킹당하면서 두 종류 직인이 찍힌 계약서가 모두 유출되었다.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임의 도장을 만들어 사용하는 이유는 대개 훗날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 직인이 아니라며 부인하는 구실로 삼기 위한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병호 국정원장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정원은 “(RCS) 구입 회선이 20개로 이 중 18개는 대북용으로, 2개는 연구용으로 각각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내국인은 사찰하지 않고 국정원 정보활동을 위한 정당한 구입이었다는 주장이었다. 또 바로 옆 부서도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차단원칙’을 지키는 국정원 직원들이 이례적으로 낸 성명서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이버 작전은 극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매우 민감한 작업이다. 안보 목적으로 수행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노출되면 외교 문제로도 비화될 수 있다. 그래서 국가안보를 지키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대상으로만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국정원장이나 국정원 직원들의 집단성명대로 정상적인 활동을 위한 구매였다면, 국정원은 왜 굳이 공식 직인을 보냈다가 다시 새 직인을 사용했을까? 국가정보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직인이 필요했다면 왜 국정원 안에서 제작하지 않고 민간에서 제작했을까?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을 내세운 국정원은 연간 1조원 상당의 예산을 쓴다. 그런 국정원이 수억원을 들여 해킹팀 RCS를 들여오면서 1만2000원짜리 도장을 국정원 밖 도장집에서 만들었다(사진 5). 밖에서 만들었다면 보안상 직인을 만든 필름 도안이라도 수거해야 할 텐데 수거하지도 않았다. ‘5163 Army’ 필름 도안은 아직도 도장집에 남아있다.(사진4)

▲ 사진 4. 보안을 생명으로 여긴다는 국정원, 아직도 도장집에 필름 도안이 그대로 남아있다. ⓒ시사IN 김은지

국정원 3차장 산하 과학정보국에서 일한 임 아무개씨가 혼자 이 직인의 사용을 주도했는지, 단장이나 국장 등 윗선의 묵인 하에 만들어 사용했는지 알 수는 없다. 국정원 감찰이나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야 할 대목이다. 국정원은 계약서에 쓰인 영문 직인이 공식 직인인지에 대해 “확인해 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 사진 5. 1만2000원, 30분만에 제작한 국정원 영문 직인. 해킹팀 계약서에 쓰인 그 직인이다. ⓒ시사IN 신선영


출처  [단독] 해킹팀 계약서에 찍힌 국정원 도장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