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노무현마저도 실패 이러다 후손 발등까지 찍는다”
[다시, 역사 바로 세우기 기획인터뷰 ①] 김삼웅 전독립기념관 관장
[오마이뉴스] 손우정 | 15.08.11 19:00 | 최종 업데이트 15.08.11 19:00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들... 이한열 열사, 박종철 같은 분들... 얼마나 많이 죽었나?"
과거의 고문 후유증을 이야기하던 노학자는 갑자기 눈시울을 적셨다. 과거 자신을 고문한 이들을 원망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지난 아픈 상처가 떠올랐을 거라는 짐작은 빗나갔다. 그는 자신의 상처보다 더한 고문으로 쓰러져간 이들을 떠올리며 흐느꼈다.
김삼웅. 올해 73세의 노학자. 과거 야당 기관지 주간과 언론사 주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편찬부 원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을 거쳐 2008년 3월까지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낸, 우리 과거사 청산운동의 산증인이다.
한편 그는 여전히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역' 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써낸 평전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백범 김구를 비롯해 신채호, 한용운, 김창숙, 전봉준, 장준하, 김원봉, 안중근, 조봉암, 김대중, 리영희, 송건호, 노무현, 김근태, 박현채, 함석헌, 안창호, 홍범도, 김상덕, 박열, 이승만, 안두희 등의 평전을 썼다.
올해에도 <몽양 여운형 평전>을 비롯해 <역사의 절망을 넘어> <10대를 위한 독립운동가 이야기> <해방 70주년 70가지 사건> <민주화운동가 이야기> 등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역사책을 펴내고 있다.
이제 70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후 그의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역사는 뒤집혀 있다. 평생을 과거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헌신해온 노학자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난 7일, 여전히 청년과 같은 뜨거운 가슴을 가진 그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 2008년 3월, 이명박 정부 등장 직후 독립기념관 관장을 그만두시고 공식적인 활동은 거의 없으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제가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예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과제 같은 것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와 학생들을 모시고 1년에 한두 차례 현장도 갑니다. 평전 작업도 계속하고 있고 시민단체나 학회에서 강연도 하면서 나름대로 바쁘게 살고 있어요(웃음)."
- 평생을 역사 바로 세우기에 헌신하며 살아오셨습니다. 2008년 독립기념관 관장직을 그만두실 때도 보수언론과 마찰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독립기념관장을 2004년부터 3년 임기로 맡았어요. 정부산하기관이 한 200개 되는데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면 임기를 1년 연장해 줍니다. 그래서 원래 2007년에 (임기가) 끝나게 되어 있었지만 2008년까지로 연장됐어요. 그 사이에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임기가 6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조선일보>에서 (사표를 쓰지 않는다고) 난리가 났어요.
독립기념관 전시실에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일보>를 찍어내던 윤전기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게 일제 시절 친일 어용신문을 찍던 겁니다. 그래서 그 윤전기를 지하창고로 내리고, 대신 하와이에서 독립신문 찍던 윤전기를 전시했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나 봐요.
그렇지 않아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제가 독립기념관 관장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서 사표를 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걸 못 참고 사퇴하라고 요구하고... 결국 예정되어 있던 해외 행사를 다녀와서 사표를 썼어요."
- 아마도 선생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눈엣가시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도 외압이 들어옵니까?
"글쎄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예정된 강연이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합니다. 그게 정보기관이 방해하는 건지 어떤지는 제가 알 수 없지요(웃음)."
- 강연도 많이 하시지만, 책도 엄청나게 펴내고 계세요. 이렇게 많은 책을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다 쓰십니까? 젊은 학자들도 엄두를 못 내는 일입니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관련한 자료를 2만8천 권 정도 가지고 있어요. 지금은 별로 할 일이 없으니까 책 쓰는 것밖에 할 게 없어요. 사실 이게 생계수단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재야생활을 하다보니까 연금 같은 걸 받지 못하고 있어요. 국민연금 32만 원 받는 게 전부입니다(웃음)."
지금 우리의 가슴 아픈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 영화 <암살>이라는 영화가 개봉하고 흥행에 성공하면서 다시 역사 청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그도 영화를 보았을까?
"봤습니다. 사실 지금 같은 시기에 이런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생각해요. 제작진과 배우가 단호하고 결연하게 용기를 내지 않으면 찍기 어려운 영화죠. 우리 국민들도 대단하죠. 이렇게 역사의 정도(正道)를 밝히는 영화를 7백만이나 봤다더군요(인터뷰가 진행된 7일, 영화 <암살>의 관람객은 8백만 명을 넘어섰다-기자 말)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역사가 후퇴하고 사회정의가 증발해 버린 시대에 이런 영화를 이렇게 많은 분들이 보아주셨다는 게 한 가닥 희망 같아요."
- 사실 영화가 아쉬운 점도 있지 않았습니까? 영화에서는 변절 후 친일 경찰이 된 사람이 결국 응징을 당합니다만, 사실 우리 역사는 그 반대였습니다. 응징은커녕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면서 뻔뻔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천수를 누리고 국립묘지에 묻힌 친일파가 부지기수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는 그렇죠. 그렇지만 영화는 그런 팩트보다 국민의 기대나 바람, 역사의 순기능을 더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나마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역사교육에 큰 기여를 했다고 봐요."
- 듣고 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얼마 전에 부친(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이 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에서 시사회를 열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일도 있었습니다.
"삐뚤어진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지요. 친일파 일본군 장교 딸이 대통령을 하고 친일파 아들이 집권당 대표가 되는 삐뚤어진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지금 우리가 비틀거리고 있는 겁니다."
- 이제 역사 청산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 청산의 산 증인으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셨는데, 우리 역사가 제대로 청산됐다고 보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느끼실 것 같은데요?
"개인적인 아쉬움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현대사가 여전히 앞으로 진보해 나가지 못하고 퇴행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헤겔이 역사는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온다고 했는데, 에릭 홉스봄이라는 학자가 1차대전을 보면서 이 말을 정정했어요. 첫 번째가 비극이라면 두 번째는 희극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물론 홉스봄이 우리 현대사를 염두하고 이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얼마나 우리 상황과 비슷합니까? 박근혜 정부의 등장은 우리 현대사의 희극이 아니라 절망입니다. 민주주의를 역행 시키고 남북관계를 파탄 시키고, 서민대중의 삶을 파탄 시켰지요. 그리고 권력을 삼권분립이 아니라 '삼권귀일'로 만들어 버리고 정당까지 해산했어요. 전임 정권의 4대강, 자원외교, 방위방산업체 비리도 그냥 덮어버린 비리 공화국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상위 1%가 GDP의 24%를 차지하고 있다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희극입니까, 절망이지."
- 왜 이런 절망이 반복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조선 후기에 노론이 (나라를) 지배한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300년 동안 노론 세력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어요. 이들은 대단히 보수적이고 사대주의적입니다. 나라를 지배해 온 사람들은 친명, 친청, 친일, 친미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외세 지향성을 보인 집단입니다. 해방 후만 보더라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빼면 (이들이 나라를 지배해 온 게) 60년이에요. 중간 10년 동안 뭘 바꾸기에는 인적 한계는 물론이고 언론, 기업, 대학들을 든든한 물적 기반을 갖춘 반민족 세력이 다 장악해서 역부족이었어요.
이들에게 도전하고 비판하는 세력은 물적 기반이 없어요. 진보적인 언론도 광고가 없어서 고사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전과 비판의 중심에 서야 할 야당이 오히려 기득권에 편입되어서 정권교체의 의지도 안 보이고 있어요. 대안세력이라는 야당을 보면 더 절망적입니다."
김삼웅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70년이다. 20대 초반에 당시 최고의 지성지였던 <사상계>의 신인논문상에 입상한 그는 1970년에 사상계 입사가 확정됐다. 그러나 <사상계>는 바로 그 해 박정희 정권의 부패를 비판한 김지하의 <오적> 게재를 빌미로 폐간되어 버렸고, 김삼웅은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들어간다.
보수·족벌언론들이 판을 치던 시절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와도 같았던 야당 기관지는 어둠의 시대를 밝혀줄 한줄기 빛과 같았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김삼웅은 1972년과 1980년, 1981년에 필화사건을 겪으며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 선생님께서 처음 몸담은 <민주전선>은 당시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한 정론지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 때 <민주전선>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원래 1970년에 사상계 신입 사원으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문을 닫으면서, 유진오 박사가 총재로 있던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에 편집·취재 기자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같이 있던 사람들이 1년, 2년을 못 버티고 다 나가버려서 결국 혼자 만들다시피 했어요.
당시 <민주전선>은 할 말은 하는 기관지였습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소식도 한 페이지에 걸쳐 실을 정도로 비록 야당 기관지였지만 자부심이 대단했죠. 일반인들도 많이 봤습니다. 광화문에 나가서 팔면 일주일에 10만 부, 20만 부가 팔렸어요. 당시 가격이 10원인가 했는데, 어떤 사람은 100원도 두고 가고 그랬죠. 그때 가두판매에 나선 사람들이 잡혀가서 감옥살이도 많이 했습니다."
- 그런 기관지이면 정권에서도 가만 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저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생을 좀 했지요. 겉으로는 사상계에서 싣지 않기로 했던 <오적>을 <민주전선>에 실었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사실 진짜 이유는 정인숙 사건(고급 요정 종업원이었던 정인숙이 정부 최고위급 인사들과의 섹스 스캔들을 벌이다 1970년 3월 17일 의문의 암살을 당한 사건-기자 말)과 서울대생 여론조사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정인숙 사건을 두고 야당 의원들이 정인숙의 아들 이름이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정성일이냐,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박성일이냐고 따지는 걸 실었습니다. 또, 서울대 학생들이 '서울 빈민들이 1년에 쇠고기를 몇 번 먹어봤느냐?', '쌀밥은 몇 번 먹느냐?'는 내용으로 여론조사를 한 것도 실었어요. 그런데 이 내용이 북한 방송에서 나오는 겁니다.(웃음) 그래서 이적(利敵) 보도로 잡혀 갔는데, 사실 정인숙 이야기 같은 것이 나오면 자기들한테도 불리하니까 <오적> 게재를 명분으로 잡아간 거죠.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취조를 받았는데, 그 후유증인지 요즘도 근육통이 심해요."
- 전두환 정권 시절은 어땠습니까? 더 심했을 것 같은데요.
"<민주전선>이 1980년 전두환의 5.17 쿠데타 때 폐간됐어요. 그 때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죽도록 두들겨 맞았죠. 그래도 당이라는 배경이 있어서 그런지 기소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는 민주한국당(민한당) 당보 편집국장을 했는데, 1982년에 장영자 사건(남편 이철희와 함께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과시하면서 2천억 원대의 사기 행각을 벌인 사건-기자 말)을 1면 톱기사로 올리면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썼죠.
그때도 보안사에 끌려가서 이틀간 혼쭐나게 맞았습니다. 이번에도 당이 배경에 있으니까 얻어맞고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는 각서만 쓰고 나왔어요. 그런데 당시 민한당 사무총장이 '지금 여당하고 정치자금 협상하고 있는데 왜 그 따위 신문을 만들었냐'면서 뭐라고 하더군요."
- 그때 받은 상처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여전하실 것 같아요.
"지금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근육통 약, 심장약을 먹고 있어요. 구둣발로 엄청나게 차였으니까요. 한번 끌려갔다 오면 시골에 내려가서 어린 조카들 변을 마포로 짜서 소주에 담궈 먹었어요. 이게 조선시대부터 우리 민초들이 고문받고 옥살이하고 나면 해왔던 민간치료법이라더군요.
그렇게 10일을 먹었더니 이번에는 위장에 탈이 나요.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아이들 변에 푸른 대나무를 꽂아두고 올라오는 물 같은 거를 먹는 거더라고요. 어쨌든 그렇게 하니까 멍은 없어졌는데... 젊었을 때는 어떻게든 견뎠는데 나이가 드니까 심장도 안 좋아지고 근육통도 심해져요."
- 그때 선생님을 구타하고 고문한 사람들을 원망하지는 않으십니까?
"독립운동가라든가, 사육신들..."
모든 질문에 차분하게 힘주어 답해주던 73세의 노학자는 순간 말을 멈췄다. 지그시 감은 눈 사이로 이슬이 맺히고 순간 축 처진 어깨가 가냘프게 떨렸다. 30~40년이 지난 일이다. 그러나 그의 긴 인생에 비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았을 그 순간의 기억은 불현듯 눈 앞에 나타난 밤손님과 같았다. 예측 못한 질문을, 아니 충분히 예측 가능한 질문이었지만 예측할 수 없었던 자기 몸의 반응을 순간의 침묵이 겨우 막고 있었다.
"그런 분들을... 그리고 이한열 열사, 박종철... 이런 분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그런 분들에 비하면 전 양반이지요. 그래서 제가 이런 책도 쓰고.... 이 왜곡된 시대에 청소년이나 젊은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삽니다."
그가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책을 쓰고, 고령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여전히 강연을 계속하는 이유에는 자신에게 가하진 고문의 상처를 '양반'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잔혹했던 이 역사를 올곧게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현대사의 참모습은 울지 않고서는 기억해낼 도리가 없는 통곡의 역사다.
- 주제를 바꿔 보겠습니다. 최근 우리 역사 속의 반헌법 행위자들에 대한 행적을 기록하고 역사적 심판을 내리자는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사업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동안 역사 청산 작업의 선두에 서 오셨는데,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저도 이런 열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누구보다 공감합니다. 당대의 현행법으로는 처벌하지 못했지만 역사적 심판은 받게 해야 한다는 원칙과 필요성은 너무나도 강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이 열전 사업의 대상이 대부분 현재 권력자들입니다. 사법부를 포함해서 정계, 언론계, 학계 다 영향권에 있어요. 슬기롭게 가야 합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처럼 많은 이들을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전에 김대중 선생이 민주화 운동하실 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혼자 100미터 가려고 하지 말고 백 명이 50미터를 함께 가야 역사가 바뀐다'고요. 혁명의 시대에는 선각자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많은 국민들, 연구자들, 법률가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특히 과거에 잘못된 일을 했지만 참회하는 사람들을 발굴해서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사업이 누군가에게 보복하려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역사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잘 알려 나가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 또 과거사 타령이냐고 폄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학자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지요. 정말 잔인하고 악한 일을 벌인 사람들도 생활 속에서는 평범한 누군가의 가장이었다고. 저를 고문하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고문하다 말고 쉴 때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음담패설하고... 평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가 '영구화'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서정주가 변절한 게 일본 제국주의가 200년은 더 갈 줄 알고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밝은 햇볕이 비출 날이 없을 줄 알고 변절한 겁니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권력에서 물러나고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역할을 수행해 줘야 할) 지금 야당의 모습에서 많은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겁니다."
- 역사 청산만큼은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신채호 선생이 '우리 역사에는 역성혁명도 있었고, 반정도 있었고, 쿠데타도 있었는데, 혁명적인 정화(淨化)가 한 번도 없었다'고 했어요. 민족반역자, 민중학살자들을 한 번도 처벌한 혁명적인 정화가 없었다는 거예요. 이게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쓴 글인데 근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매국노도 하나 처벌 못했고, 4.19혁명, 광주항쟁 때 총질한 자, 독재자들도 제대로 처벌한 적이 없어요.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면 벌을 받는다는 역사의 준엄한 모습을 보여 줬어야 했는데, 그게 없으니까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다른 나라를 보세요. 과거 청산은 가차 없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정권 때에도 마치 성인군자나 된 것처럼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고만 했어요. 당사자들은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사과도 안 하는데 말이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어떻게 보면 아마추어 정권이었습니다. 정권교체도 했고, 대통령은 진솔하고 역사의식도 있었는데, 정부 핵심 브레인 중에는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실패한 겁니다."
- 그래서 뒤틀린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 역사를 제대로 정화하는 작업은 전문가들이나 지식인들과 함께 국민들의 참여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역사를 '감계(鑑戒)'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감(鑑)은 거울 감자를 써요. 역사라는 거울에다가 자기를 비춰보고 교훈을 얻는 것이라는 의미지요. 당대의 실정법으로 잘못된 일들을 걸러내지 못하면 역사가 걸러내고, 역사도 걸러내지 못하면 하늘이 걸러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 사가들의 글을 필주(筆誅)라고 그랬습니다. 사마천 같은 사람이 역사에 필주를 가했다고 합니다. 역사에 필주를 가할 수 있는 이번 열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는 학자들, 지식인들의 참여가 절실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는 것은 국민 각자의 소임입니다. 투표만 해서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청산을 못하면 도끼로 자기발등만이 아니라 후손들의 발등까지 찍는 겁니다. 반민족, 반민주, 반평화, 독재세력에 대한 역사청산은 국민들이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가 투표를 잘못해서 역사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더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헌법의 이름을 앞세워 헌법을 유린해온 우리 역사 속의 반헌법 행위자. 지난 7월 16일, 현행법으로는 처벌하지 못한 이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자는 (가칭)반헌법 행위자 열전편찬 사업이 제안됐다. 오는 8월 12일 오후 3시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는 열전 편찬을 위한 첫 번째 토론회가 개최된다. 역사에 필주를 가할 국민들의 참여를 기대한다.
출처 "김대중-노무현마저도 실패 이러다 후손 발등까지 찍는다"
[다시, 역사 바로 세우기 기획인터뷰 ①] 김삼웅 전독립기념관 관장
[오마이뉴스] 손우정 | 15.08.11 19:00 | 최종 업데이트 15.08.11 19:00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 우리 현대사는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와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준비위'는 뒤틀린 우리 역사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촉구하는 기획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무수히 많은 독립운동가들... 이한열 열사, 박종철 같은 분들... 얼마나 많이 죽었나?"
과거의 고문 후유증을 이야기하던 노학자는 갑자기 눈시울을 적셨다. 과거 자신을 고문한 이들을 원망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진 직후였다. 지난 아픈 상처가 떠올랐을 거라는 짐작은 빗나갔다. 그는 자신의 상처보다 더한 고문으로 쓰러져간 이들을 떠올리며 흐느꼈다.
김삼웅. 올해 73세의 노학자. 과거 야당 기관지 주간과 언론사 주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편찬부 원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을 거쳐 2008년 3월까지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낸, 우리 과거사 청산운동의 산증인이다.
한편 그는 여전히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고 있는 '현역' 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써낸 평전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백범 김구를 비롯해 신채호, 한용운, 김창숙, 전봉준, 장준하, 김원봉, 안중근, 조봉암, 김대중, 리영희, 송건호, 노무현, 김근태, 박현채, 함석헌, 안창호, 홍범도, 김상덕, 박열, 이승만, 안두희 등의 평전을 썼다.
올해에도 <몽양 여운형 평전>을 비롯해 <역사의 절망을 넘어> <10대를 위한 독립운동가 이야기> <해방 70주년 70가지 사건> <민주화운동가 이야기> 등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역사책을 펴내고 있다.
이제 70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후 그의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역사는 뒤집혀 있다. 평생을 과거사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헌신해온 노학자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난 7일, 여전히 청년과 같은 뜨거운 가슴을 가진 그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올해 73세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편찬부 원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 독립기념관 관장을 역임한 과거사 청산 운동의 산증인이다. ⓒ 손우정
“왕성한 집필 활동은 오랜 재야생활로 인한 생계수단”
- 2008년 3월, 이명박 정부 등장 직후 독립기념관 관장을 그만두시고 공식적인 활동은 거의 없으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제가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예요.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과제 같은 것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와 학생들을 모시고 1년에 한두 차례 현장도 갑니다. 평전 작업도 계속하고 있고 시민단체나 학회에서 강연도 하면서 나름대로 바쁘게 살고 있어요(웃음)."
- 평생을 역사 바로 세우기에 헌신하며 살아오셨습니다. 2008년 독립기념관 관장직을 그만두실 때도 보수언론과 마찰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독립기념관장을 2004년부터 3년 임기로 맡았어요. 정부산하기관이 한 200개 되는데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면 임기를 1년 연장해 줍니다. 그래서 원래 2007년에 (임기가) 끝나게 되어 있었지만 2008년까지로 연장됐어요. 그 사이에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임기가 6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조선일보>에서 (사표를 쓰지 않는다고) 난리가 났어요.
독립기념관 전시실에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일보>를 찍어내던 윤전기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게 일제 시절 친일 어용신문을 찍던 겁니다. 그래서 그 윤전기를 지하창고로 내리고, 대신 하와이에서 독립신문 찍던 윤전기를 전시했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나 봐요.
그렇지 않아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제가 독립기념관 관장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서 사표를 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걸 못 참고 사퇴하라고 요구하고... 결국 예정되어 있던 해외 행사를 다녀와서 사표를 썼어요."
- 아마도 선생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눈엣가시였던 것 같습니다. 요즘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도 외압이 들어옵니까?
"글쎄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예정된 강연이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합니다. 그게 정보기관이 방해하는 건지 어떤지는 제가 알 수 없지요(웃음)."
- 강연도 많이 하시지만, 책도 엄청나게 펴내고 계세요. 이렇게 많은 책을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에 다 쓰십니까? 젊은 학자들도 엄두를 못 내는 일입니다.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관련한 자료를 2만8천 권 정도 가지고 있어요. 지금은 별로 할 일이 없으니까 책 쓰는 것밖에 할 게 없어요. 사실 이게 생계수단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재야생활을 하다보니까 연금 같은 걸 받지 못하고 있어요. 국민연금 32만 원 받는 게 전부입니다(웃음)."
“지금은 친일파 자녀들이 권력을 잡는 삐뚤어진 시대”
지금 우리의 가슴 아픈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 영화 <암살>이라는 영화가 개봉하고 흥행에 성공하면서 다시 역사 청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그도 영화를 보았을까?
"봤습니다. 사실 지금 같은 시기에 이런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생각해요. 제작진과 배우가 단호하고 결연하게 용기를 내지 않으면 찍기 어려운 영화죠. 우리 국민들도 대단하죠. 이렇게 역사의 정도(正道)를 밝히는 영화를 7백만이나 봤다더군요(인터뷰가 진행된 7일, 영화 <암살>의 관람객은 8백만 명을 넘어섰다-기자 말)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역사가 후퇴하고 사회정의가 증발해 버린 시대에 이런 영화를 이렇게 많은 분들이 보아주셨다는 게 한 가닥 희망 같아요."
- 사실 영화가 아쉬운 점도 있지 않았습니까? 영화에서는 변절 후 친일 경찰이 된 사람이 결국 응징을 당합니다만, 사실 우리 역사는 그 반대였습니다. 응징은커녕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면서 뻔뻔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천수를 누리고 국립묘지에 묻힌 친일파가 부지기수입니다.
"역사적인 팩트는 그렇죠. 그렇지만 영화는 그런 팩트보다 국민의 기대나 바람, 역사의 순기능을 더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나마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역사교육에 큰 기여를 했다고 봐요."
- 듣고 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얼마 전에 부친(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이 친일 의혹을 받고 있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에서 시사회를 열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일도 있었습니다.
"삐뚤어진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지요. 친일파 일본군 장교 딸이 대통령을 하고 친일파 아들이 집권당 대표가 되는 삐뚤어진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지금 우리가 비틀거리고 있는 겁니다."
“박근혜 정부의 등장은 우리 사회의 절망, 야당은 더 절망”
▲ 반민특위의 재판 모습. 반민특위의 일제 잔재 청산 활동은 미완으로 그쳤다.
- 이제 역사 청산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 청산의 산 증인으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셨는데, 우리 역사가 제대로 청산됐다고 보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느끼실 것 같은데요?
"개인적인 아쉬움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현대사가 여전히 앞으로 진보해 나가지 못하고 퇴행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헤겔이 역사는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온다고 했는데, 에릭 홉스봄이라는 학자가 1차대전을 보면서 이 말을 정정했어요. 첫 번째가 비극이라면 두 번째는 희극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물론 홉스봄이 우리 현대사를 염두하고 이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얼마나 우리 상황과 비슷합니까? 박근혜 정부의 등장은 우리 현대사의 희극이 아니라 절망입니다. 민주주의를 역행 시키고 남북관계를 파탄 시키고, 서민대중의 삶을 파탄 시켰지요. 그리고 권력을 삼권분립이 아니라 '삼권귀일'로 만들어 버리고 정당까지 해산했어요. 전임 정권의 4대강, 자원외교, 방위방산업체 비리도 그냥 덮어버린 비리 공화국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상위 1%가 GDP의 24%를 차지하고 있다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희극입니까, 절망이지."
- 왜 이런 절망이 반복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조선 후기에 노론이 (나라를) 지배한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300년 동안 노론 세력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어요. 이들은 대단히 보수적이고 사대주의적입니다. 나라를 지배해 온 사람들은 친명, 친청, 친일, 친미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외세 지향성을 보인 집단입니다. 해방 후만 보더라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빼면 (이들이 나라를 지배해 온 게) 60년이에요. 중간 10년 동안 뭘 바꾸기에는 인적 한계는 물론이고 언론, 기업, 대학들을 든든한 물적 기반을 갖춘 반민족 세력이 다 장악해서 역부족이었어요.
이들에게 도전하고 비판하는 세력은 물적 기반이 없어요. 진보적인 언론도 광고가 없어서 고사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전과 비판의 중심에 서야 할 야당이 오히려 기득권에 편입되어서 정권교체의 의지도 안 보이고 있어요. 대안세력이라는 야당을 보면 더 절망적입니다."
“예전 언론은 고문 당해도 할 말은 했다”
김삼웅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70년이다. 20대 초반에 당시 최고의 지성지였던 <사상계>의 신인논문상에 입상한 그는 1970년에 사상계 입사가 확정됐다. 그러나 <사상계>는 바로 그 해 박정희 정권의 부패를 비판한 김지하의 <오적> 게재를 빌미로 폐간되어 버렸고, 김삼웅은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들어간다.
보수·족벌언론들이 판을 치던 시절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를 위한 마지막 보루와도 같았던 야당 기관지는 어둠의 시대를 밝혀줄 한줄기 빛과 같았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김삼웅은 1972년과 1980년, 1981년에 필화사건을 겪으며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 선생님께서 처음 몸담은 <민주전선>은 당시 민주주의와 인권 옹호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한 정론지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 때 <민주전선>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원래 1970년에 사상계 신입 사원으로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문을 닫으면서, 유진오 박사가 총재로 있던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에 편집·취재 기자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같이 있던 사람들이 1년, 2년을 못 버티고 다 나가버려서 결국 혼자 만들다시피 했어요.
당시 <민주전선>은 할 말은 하는 기관지였습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소식도 한 페이지에 걸쳐 실을 정도로 비록 야당 기관지였지만 자부심이 대단했죠. 일반인들도 많이 봤습니다. 광화문에 나가서 팔면 일주일에 10만 부, 20만 부가 팔렸어요. 당시 가격이 10원인가 했는데, 어떤 사람은 100원도 두고 가고 그랬죠. 그때 가두판매에 나선 사람들이 잡혀가서 감옥살이도 많이 했습니다."
▲ 사진 왼쪽은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완용, 오른쪽은 친일단체 '일진회' 간부를 지낸 송병준. ⓒ 병합기념조선사진첩
- 그런 기관지이면 정권에서도 가만 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저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생을 좀 했지요. 겉으로는 사상계에서 싣지 않기로 했던 <오적>을 <민주전선>에 실었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사실 진짜 이유는 정인숙 사건(고급 요정 종업원이었던 정인숙이 정부 최고위급 인사들과의 섹스 스캔들을 벌이다 1970년 3월 17일 의문의 암살을 당한 사건-기자 말)과 서울대생 여론조사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정인숙 사건을 두고 야당 의원들이 정인숙의 아들 이름이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정성일이냐,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박성일이냐고 따지는 걸 실었습니다. 또, 서울대 학생들이 '서울 빈민들이 1년에 쇠고기를 몇 번 먹어봤느냐?', '쌀밥은 몇 번 먹느냐?'는 내용으로 여론조사를 한 것도 실었어요. 그런데 이 내용이 북한 방송에서 나오는 겁니다.(웃음) 그래서 이적(利敵) 보도로 잡혀 갔는데, 사실 정인숙 이야기 같은 것이 나오면 자기들한테도 불리하니까 <오적> 게재를 명분으로 잡아간 거죠.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취조를 받았는데, 그 후유증인지 요즘도 근육통이 심해요."
- 전두환 정권 시절은 어땠습니까? 더 심했을 것 같은데요.
"<민주전선>이 1980년 전두환의 5.17 쿠데타 때 폐간됐어요. 그 때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죽도록 두들겨 맞았죠. 그래도 당이라는 배경이 있어서 그런지 기소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는 민주한국당(민한당) 당보 편집국장을 했는데, 1982년에 장영자 사건(남편 이철희와 함께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과시하면서 2천억 원대의 사기 행각을 벌인 사건-기자 말)을 1면 톱기사로 올리면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썼죠.
그때도 보안사에 끌려가서 이틀간 혼쭐나게 맞았습니다. 이번에도 당이 배경에 있으니까 얻어맞고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는 각서만 쓰고 나왔어요. 그런데 당시 민한당 사무총장이 '지금 여당하고 정치자금 협상하고 있는데 왜 그 따위 신문을 만들었냐'면서 뭐라고 하더군요."
- 그때 받은 상처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여전하실 것 같아요.
"지금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근육통 약, 심장약을 먹고 있어요. 구둣발로 엄청나게 차였으니까요. 한번 끌려갔다 오면 시골에 내려가서 어린 조카들 변을 마포로 짜서 소주에 담궈 먹었어요. 이게 조선시대부터 우리 민초들이 고문받고 옥살이하고 나면 해왔던 민간치료법이라더군요.
그렇게 10일을 먹었더니 이번에는 위장에 탈이 나요.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아이들 변에 푸른 대나무를 꽂아두고 올라오는 물 같은 거를 먹는 거더라고요. 어쨌든 그렇게 하니까 멍은 없어졌는데... 젊었을 때는 어떻게든 견뎠는데 나이가 드니까 심장도 안 좋아지고 근육통도 심해져요."
- 그때 선생님을 구타하고 고문한 사람들을 원망하지는 않으십니까?
"독립운동가라든가, 사육신들..."
모든 질문에 차분하게 힘주어 답해주던 73세의 노학자는 순간 말을 멈췄다. 지그시 감은 눈 사이로 이슬이 맺히고 순간 축 처진 어깨가 가냘프게 떨렸다. 30~40년이 지난 일이다. 그러나 그의 긴 인생에 비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았을 그 순간의 기억은 불현듯 눈 앞에 나타난 밤손님과 같았다. 예측 못한 질문을, 아니 충분히 예측 가능한 질문이었지만 예측할 수 없었던 자기 몸의 반응을 순간의 침묵이 겨우 막고 있었다.
"그런 분들을... 그리고 이한열 열사, 박종철... 이런 분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그런 분들에 비하면 전 양반이지요. 그래서 제가 이런 책도 쓰고.... 이 왜곡된 시대에 청소년이나 젊은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삽니다."
그가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책을 쓰고, 고령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여전히 강연을 계속하는 이유에는 자신에게 가하진 고문의 상처를 '양반'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잔혹했던 이 역사를 올곧게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현대사의 참모습은 울지 않고서는 기억해낼 도리가 없는 통곡의 역사다.
“혁명적 정화 없었던 역사... 역사의 심판이라도 받게 해야”
▲ 만주군 소위 임관 직전의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 자료사진
- 주제를 바꿔 보겠습니다. 최근 우리 역사 속의 반헌법 행위자들에 대한 행적을 기록하고 역사적 심판을 내리자는 '반헌법행위자 열전 편찬' 사업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동안 역사 청산 작업의 선두에 서 오셨는데,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저도 이런 열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누구보다 공감합니다. 당대의 현행법으로는 처벌하지 못했지만 역사적 심판은 받게 해야 한다는 원칙과 필요성은 너무나도 강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이 열전 사업의 대상이 대부분 현재 권력자들입니다. 사법부를 포함해서 정계, 언론계, 학계 다 영향권에 있어요. 슬기롭게 가야 합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처럼 많은 이들을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전에 김대중 선생이 민주화 운동하실 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혼자 100미터 가려고 하지 말고 백 명이 50미터를 함께 가야 역사가 바뀐다'고요. 혁명의 시대에는 선각자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많은 국민들, 연구자들, 법률가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특히 과거에 잘못된 일을 했지만 참회하는 사람들을 발굴해서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사업이 누군가에게 보복하려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역사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잘 알려 나가면서 진행해야 합니다."
- 또 과거사 타령이냐고 폄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라는 학자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지요. 정말 잔인하고 악한 일을 벌인 사람들도 생활 속에서는 평범한 누군가의 가장이었다고. 저를 고문하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고문하다 말고 쉴 때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고 음담패설하고... 평범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가 '영구화'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서정주가 변절한 게 일본 제국주의가 200년은 더 갈 줄 알고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밝은 햇볕이 비출 날이 없을 줄 알고 변절한 겁니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권력에서 물러나고 교체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 역할을 수행해 줘야 할) 지금 야당의 모습에서 많은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겁니다."
- 역사 청산만큼은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신채호 선생이 '우리 역사에는 역성혁명도 있었고, 반정도 있었고, 쿠데타도 있었는데, 혁명적인 정화(淨化)가 한 번도 없었다'고 했어요. 민족반역자, 민중학살자들을 한 번도 처벌한 혁명적인 정화가 없었다는 거예요. 이게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쓴 글인데 근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매국노도 하나 처벌 못했고, 4.19혁명, 광주항쟁 때 총질한 자, 독재자들도 제대로 처벌한 적이 없어요.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면 벌을 받는다는 역사의 준엄한 모습을 보여 줬어야 했는데, 그게 없으니까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다른 나라를 보세요. 과거 청산은 가차 없이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정권 때에도 마치 성인군자나 된 것처럼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고만 했어요. 당사자들은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사과도 안 하는데 말이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어떻게 보면 아마추어 정권이었습니다. 정권교체도 했고, 대통령은 진솔하고 역사의식도 있었는데, 정부 핵심 브레인 중에는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실패한 겁니다."
- 그래서 뒤틀린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 역사를 제대로 정화하는 작업은 전문가들이나 지식인들과 함께 국민들의 참여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역사를 '감계(鑑戒)'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감(鑑)은 거울 감자를 써요. 역사라는 거울에다가 자기를 비춰보고 교훈을 얻는 것이라는 의미지요. 당대의 실정법으로 잘못된 일들을 걸러내지 못하면 역사가 걸러내고, 역사도 걸러내지 못하면 하늘이 걸러냅니다. 그래서 역사학자, 사가들의 글을 필주(筆誅)라고 그랬습니다. 사마천 같은 사람이 역사에 필주를 가했다고 합니다. 역사에 필주를 가할 수 있는 이번 열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는 학자들, 지식인들의 참여가 절실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는 것은 국민 각자의 소임입니다. 투표만 해서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청산을 못하면 도끼로 자기발등만이 아니라 후손들의 발등까지 찍는 겁니다. 반민족, 반민주, 반평화, 독재세력에 대한 역사청산은 국민들이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가 투표를 잘못해서 역사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더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헌법의 이름을 앞세워 헌법을 유린해온 우리 역사 속의 반헌법 행위자. 지난 7월 16일, 현행법으로는 처벌하지 못한 이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우자는 (가칭)반헌법 행위자 열전편찬 사업이 제안됐다. 오는 8월 12일 오후 3시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는 열전 편찬을 위한 첫 번째 토론회가 개최된다. 역사에 필주를 가할 국민들의 참여를 기대한다.
▲ 반헌법 행위자 열전 편찬위 첫 번째 토론회 (가칭) 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준비위는 오는 8월 12일 오후 3시, 백범기념관에서 헌법의 이름으로 내란, 고문조작, 부정선거, 각종 인권유린을 자행한 반헌법행위자들의 열전을 편찬하기 위한 첫 번째 토론회를 개최한다. ⓒ 손우정
출처 "김대중-노무현마저도 실패 이러다 후손 발등까지 찍는다"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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