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할 권리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
교과서 국정화 조치, 형식 너머를 봐야
[민중의소리]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최종업데이트 2015-10-18 11:16:18
나는 국정교과서 세대다. 박정희 독재자가 죽었을 때 나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교실에서 펑펑 울었다. 왜냐면 나는 그가 독재자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보며 퍼스트레이디였던 육영수 여사의 선행 소식만을 접했던 나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나의 사회인식과 감수성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였다.
그가 독재자인 걸 안 것은 중학교 들어가서였다. 집안에 떠돌던 잡지 <신동아>에 나온 신군부의 등장에 대한 심층 취재기사를 보며 어렴풋이 알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시위하다 쫓겨 동네로 들어오는 소리를 통해, 사회 선생님이 해주신 교과서에 없는 얘기를 통해, 박정희가 좋은 대통령이 아니었고 전두환 대통령도 입 뻥긋 못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여전히 무서운 시대라는 걸 알게 됐다. 교과서에 없는 것들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국정교과서가 된다고 해도 역사적 진실을 완전히 덮지는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 태도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우연히 진실을 말해줄 사람을 만나길 기대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탄탄하게 권력이 구조화된 시대에 우연을 기대하는 것은 로또를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한국사 국정화 조치가 ‘과거로의 회귀’, ‘후퇴적 조치’이기에 가만히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1972년 유신독재로 장기독재를 꿈꾸던 정부는 1973년 문교부 발표 이후 검인정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8개월 만인 1974년부터 국정교과서로 바꿨다. 그러다 민주화가 되면서 서서히 검인정으로 바뀌었다.
특히 한국 교육이 입시 위주의 암기형 교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정교과서가 차지하는 위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가 참고자료만 되고 토론식으로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는 교육이 아닌 현실에서 ‘국정교과서’로 바뀐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다. 독재 정권을 독재라 말할 수 없고 친일파를 친일파로 일컬을 수 없게 만든다. 아니 알기 어렵게 된다. 결국 이는 우리 사회의 ‘진실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다.
국제사회에서 진실에 대한 권리는 독재자들에 의해 사라진 실종자 가족들의 '사건의 진실’을 알 권리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다 극악한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과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 권리는 사회적 차원에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할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진실에 대한 권리는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도 포함한다. 진실에 대한 권리의 침해는 기록에 대한 권리 침해를 동반한다.
국정교과서로 바뀌면서 독재정권이 저질렀던 만행은 지워지고 친일파의 행적도 종적을 감출 것이다. 다시 독재는 부활하고 민주주의는 뒷걸음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다.
따라서 검인정교과서냐 아니냐 라는 교과서를 정하는 제도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형식이 아닌 그 형식을 통해 달성하려는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교과서는 교육부가 편찬하는 국정교과서, 국가의 검정을 받아 민간에서 편찬하는 검정교과서, 관련 부처 장관의 인정을 받아 민간에서 편찬하는 인정교과서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획일적이고 검정교과서는 좀 자유롭고 인정교과서는 완전 자유롭다는 식의 사고는 지금의 사태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한다.
이미 경험했던 교학사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검정교과서도 사실 왜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다가 정부는 집필기준, 수정명령, 검정기준 등으로 개입한다. 즉 검정교과서가 자동적으로 다원성과 창의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검정교과서도 국가가 정한 집필기준에 의해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왜곡될 수 있다. 따라서 검정교과서나 인정교과서가 자동적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인 양 바라봐서는 안 된다. 지금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원적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거사, 과거의 인권침해-에 대한 부정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2011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가 배포한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역사·국어·도덕·경제 등 4개 과목의 중학 교과서 집필기준]에 잘 드러난다. 집필기준에는 이승만·박정희의 '독재' 부분을 “자유민주주의가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로 시련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를 극복하였으며 ...(중략)... 역대 정부의 공과를 서술할 경우에는 균형 있게 다루도록 유의한다”고 되어있다. 독재정권이라 평가하지 말라는 소리다.
세계인권선언의 바탕이 되는 역사적 사실인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성찰했기에 우리는 인권의 가치를 공동의 가치로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인권침해의 역사’를 알고 우리 사회의 인권을 세워가야 한다. 그것은 해석의 영역이 아니다. ‘검정교과서가 더 자유민주주의에 맞다’는 자유주의적 논리가 자칫 보수 집권세력의 근간인 친일독재세력의 역사 왜곡마저도 ‘균형적’이라는 말로 수용될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의 본질은 색깔논쟁을 부추겨 보수 세력을 집결시키는 단기적 효과만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친일독재 세력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 그리고 분단, 군사 독재정권이 이끈 개발독재 시기까지의 민중의 삶을 짓밟았던 그 세력들이 자신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친일과 독재가 문제’라고 보는 정당한 평가를 소수의 흐름으로 만들 것이다. 보수 세력 집권 이후 친일독재가 기여한 것이 있다며 공론의 장을 흩뜨려 놓더니 이제는 공론의 장을 국정화로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왜곡을 바탕으로 하여 역사 담론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박근혜 정부의 국정화 시도는 대통령이 아버지에 대한 찬양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대통령의 개인적 욕망’이 아니다. 역사담론마저도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며, 이는 ‘보수 세력의 집단적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은 보수 세력이 집권한 지 8년째이지만 여전히 지지기반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버젓한 대항세력조차 없는 현실의 역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원래 불가능해 보여도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워서 얻어진 것이 인권이 아니던가.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할 권리를 우리는 놓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암살'에서 친일행위를 했던 염석진이 반민특위 재판을 받으며 사실을 왜곡할 수 있었던 것처럼, 친일독재세력이 과거를 반성하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양 떠드는 뻔뻔한 일이 지속되지 않겠는가. 성공한 쿠테타가 혁명으로 둔갑하지 않도록 막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이 글은 '인권오름'에 함께 실렸습니다.
출처 [명숙 칼럼]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할 권리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
교과서 국정화 조치, 형식 너머를 봐야
[민중의소리]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 최종업데이트 2015-10-18 11:16:18
나는 국정교과서 세대다. 박정희 독재자가 죽었을 때 나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교실에서 펑펑 울었다. 왜냐면 나는 그가 독재자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틀어주는 영상을 보며 퍼스트레이디였던 육영수 여사의 선행 소식만을 접했던 나로서는 당연한 태도였다. 나의 사회인식과 감수성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였다.
그가 독재자인 걸 안 것은 중학교 들어가서였다. 집안에 떠돌던 잡지 <신동아>에 나온 신군부의 등장에 대한 심층 취재기사를 보며 어렴풋이 알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시위하다 쫓겨 동네로 들어오는 소리를 통해, 사회 선생님이 해주신 교과서에 없는 얘기를 통해, 박정희가 좋은 대통령이 아니었고 전두환 대통령도 입 뻥긋 못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여전히 무서운 시대라는 걸 알게 됐다. 교과서에 없는 것들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니 국정교과서가 된다고 해도 역사적 진실을 완전히 덮지는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 태도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우연히 진실을 말해줄 사람을 만나길 기대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탄탄하게 권력이 구조화된 시대에 우연을 기대하는 것은 로또를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더 중요한 것은 한국사 국정화 조치가 ‘과거로의 회귀’, ‘후퇴적 조치’이기에 가만히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1972년 유신독재로 장기독재를 꿈꾸던 정부는 1973년 문교부 발표 이후 검인정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8개월 만인 1974년부터 국정교과서로 바꿨다. 그러다 민주화가 되면서 서서히 검인정으로 바뀌었다.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학생회관에서 학생들이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서명을 하고 있다. ⓒ김철수 기자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할 권리
특히 한국 교육이 입시 위주의 암기형 교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정교과서가 차지하는 위력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가 참고자료만 되고 토론식으로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는 교육이 아닌 현실에서 ‘국정교과서’로 바뀐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다. 독재 정권을 독재라 말할 수 없고 친일파를 친일파로 일컬을 수 없게 만든다. 아니 알기 어렵게 된다. 결국 이는 우리 사회의 ‘진실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다.
국제사회에서 진실에 대한 권리는 독재자들에 의해 사라진 실종자 가족들의 '사건의 진실’을 알 권리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다 극악한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과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 권리는 사회적 차원에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할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진실에 대한 권리는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도 포함한다. 진실에 대한 권리의 침해는 기록에 대한 권리 침해를 동반한다.
국정교과서로 바뀌면서 독재정권이 저질렀던 만행은 지워지고 친일파의 행적도 종적을 감출 것이다. 다시 독재는 부활하고 민주주의는 뒷걸음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다.
검정제냐 아니냐가 핵심이 아니다
따라서 검인정교과서냐 아니냐 라는 교과서를 정하는 제도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형식이 아닌 그 형식을 통해 달성하려는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교과서는 교육부가 편찬하는 국정교과서, 국가의 검정을 받아 민간에서 편찬하는 검정교과서, 관련 부처 장관의 인정을 받아 민간에서 편찬하는 인정교과서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획일적이고 검정교과서는 좀 자유롭고 인정교과서는 완전 자유롭다는 식의 사고는 지금의 사태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한다.
이미 경험했던 교학사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검정교과서도 사실 왜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다가 정부는 집필기준, 수정명령, 검정기준 등으로 개입한다. 즉 검정교과서가 자동적으로 다원성과 창의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검정교과서도 국가가 정한 집필기준에 의해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왜곡될 수 있다. 따라서 검정교과서나 인정교과서가 자동적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인 양 바라봐서는 안 된다. 지금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원적 해석이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거사, 과거의 인권침해-에 대한 부정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는 2011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가 배포한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역사·국어·도덕·경제 등 4개 과목의 중학 교과서 집필기준]에 잘 드러난다. 집필기준에는 이승만·박정희의 '독재' 부분을 “자유민주주의가 장기집권 등에 따른 독재화로 시련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를 극복하였으며 ...(중략)... 역대 정부의 공과를 서술할 경우에는 균형 있게 다루도록 유의한다”고 되어있다. 독재정권이라 평가하지 말라는 소리다.
세계인권선언의 바탕이 되는 역사적 사실인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성찰했기에 우리는 인권의 가치를 공동의 가치로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인권침해의 역사’를 알고 우리 사회의 인권을 세워가야 한다. 그것은 해석의 영역이 아니다. ‘검정교과서가 더 자유민주주의에 맞다’는 자유주의적 논리가 자칫 보수 집권세력의 근간인 친일독재세력의 역사 왜곡마저도 ‘균형적’이라는 말로 수용될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새누리당 국회의원 초청 오찬장에 들어오고 있다. 원유철(왼쪽부터) 원내대표, 박근혜 대통령, 김무성 대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 ⓒ뉴시스
국정화 전환의 본질, 보수세력의 정통성 수립 의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의 본질은 색깔논쟁을 부추겨 보수 세력을 집결시키는 단기적 효과만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친일독재 세력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 그리고 분단, 군사 독재정권이 이끈 개발독재 시기까지의 민중의 삶을 짓밟았던 그 세력들이 자신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친일과 독재가 문제’라고 보는 정당한 평가를 소수의 흐름으로 만들 것이다. 보수 세력 집권 이후 친일독재가 기여한 것이 있다며 공론의 장을 흩뜨려 놓더니 이제는 공론의 장을 국정화로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왜곡을 바탕으로 하여 역사 담론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박근혜 정부의 국정화 시도는 대통령이 아버지에 대한 찬양을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대통령의 개인적 욕망’이 아니다. 역사담론마저도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며, 이는 ‘보수 세력의 집단적 의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은 보수 세력이 집권한 지 8년째이지만 여전히 지지기반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버젓한 대항세력조차 없는 현실의 역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원래 불가능해 보여도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싸워서 얻어진 것이 인권이 아니던가.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할 권리를 우리는 놓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암살'에서 친일행위를 했던 염석진이 반민특위 재판을 받으며 사실을 왜곡할 수 있었던 것처럼, 친일독재세력이 과거를 반성하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양 떠드는 뻔뻔한 일이 지속되지 않겠는가. 성공한 쿠테타가 혁명으로 둔갑하지 않도록 막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
이 글은 '인권오름'에 함께 실렸습니다.
출처 [명숙 칼럼] 진실을 기록하고 전달할 권리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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