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를 찾게 만드는 세상, 한국판 ‘게 공선’ 현상
[민중의소리] 김애화 마을활동가 | 최종업데이트 2015-12-27 18:25:38
“980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정글의 세상에서 생존경쟁을 벌이며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새누리당의 비정규 악법은 그나마 2년 뒤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과 기회마저 없애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규제 없는 파견확대로 합법적인 사람장사인 파견노동으로 좋은 일자리를 뺏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이 50이 넘으면 당연히 파견노동을 해야 하는 법안이기도 합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됐다. 위원장은 기자회견문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법 개혁을 규탄했다. 민주노총이 12월 16일 3차 총파업을 했고,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해서 내년 초까지 비상투쟁태세를 유지한다는 입장이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법 개악 움직임을 보며, 노동자의 내일을 상상해본다.
2008년 일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1929년에 고바야시 다키지가 쓴 소설, 『게 공선(工船)』이 무려 80만부가 팔리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소설은 법적인 보호 장치 없이 게잡이 어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노동착취를 견디다 못해 자연발생적으로 조직적 저항에 나서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80년이 지난 소설을 현재로 불러온 배경은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현실이다. 일본에서는 1985년 노동자파견법 제정으로 노동자 파견에 대한 법적 규제가 풀렸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영향으로 노동자 파견이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불안정한 노동, 프레카리아트 계급을 탄생시켰다.
프레카리아트는 1920년대 고립된 어선의 노동자의 처지에서 자신을 보았다. 현재 일본 프레카리아트의 노동조건이 아무리 열악한들 1920년대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선동적인 목적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과거를 불러온 것이다, 라고 혹자는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프레카리아트들은 1920년대 노동자와 자신과의 근본적이며 중요한 공통점을 찾았는데, 그것은 캄치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노동자와 자신들이 일회용으로 사용되는 노동력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게 공선』의 표현대로라면 ‘버리는 종이’와 같은 신세라는 점이다.
프레카리아트가 『게 공선』을 통하여 얻은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우리 말고는 같은 편이 없다’는 의식일 것이다. 책 속에서 이러한 노동자들의 각성은 구축함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갑판에서 일하고 있으면, 수평선을 가로질러 남하하는 구축함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 후미에 일본 국기가 펄럭이는 모습이 보였다. 어업노동자들은 흥분해서, 눈물을 글썽이며 모자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저것뿐이다. 우리 편은 저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편이라 믿었던 구축함의 군인은 파업 후 공선에 올라와 파업의 핵심 노동자를 호송해가고, 자신들을 감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를 보고 노동자들은 ‘우리나라의 군함이 국민의 편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렇게 ‘게 공선 현상’은 2000년대 일본의 프레카리아트의 심각성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그들 스스로의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한국의 비정규직 상황은 일본보다 더 심각하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노동 관련 지표가 OECD 회원국 가운데 거의 모든 주요부문에서 최하위권이란 결과가 나왔다. 한국의 비정규직은 2013년 8월 기준 409만2000명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OECD 국가 평균의 두 배이다. 이 비율은 일본보다 높다. 이 수치가 놀라운 일이지만, 민주노총이나 한국노동사회연구원이 파악하는 비정규직 규모는 정부의 자료보다 훨씬 크다. OECD보고서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이 OECD 평균의 절반치보다 낮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노동법 개악을 통해서 노동의 유연화를 더욱 심화시키려 한다.
불행하게 박근혜 정부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문화 현상이 나타날까 상상해본다. 일본의 프레카리아트가 『게 공선』를 선택했다면, 한국의 프레카리아트는 『객지』를 불러오지 않을까?
『객지』는 황석영의 1971년 작품이다. 이 소설은 60년대 말과 70년 초, 한창이던 간척사업 현장의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객지』 속 노동현장은 마치 캄치카 바다에 떠있는 게잡이 배와 같다. 무법천지, 아니 그 시대의 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객지』의 시대적 배경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기이다. 『객지』 속 식당에 붙여 있는 구호, ‘건설은 국력의 상징이다’가 보여주듯이 국력과 국민이 모순 없이 인식되던 시기이며, 개발국가의 국민으로서 의식이 고취되던 시대이다. 산업화,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이 가능했던 때이다. 이런 기조는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노동자와 서민을 희생시키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간척사업 현장에는 부랑노동자들이 일한다. 이들의 위에는 ‘십장-감독-소장’이라는 복잡한 질서가 있다. 누구 하나 노동자에 대한 직접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과 권력만 자유롭게 발휘되는 곳, 바로 오늘의 비정규직, 파견노동의 현장과 비슷하다.
『객지』의 간척사업 현장은 70년대의 노동 상황만을 상징하지 않는다. 70년대의 정치상황의 축약판이라고 보아도 좋다. 강요만이 지배하는 곳, 소통이 전혀 없는 곳이다. 이 현장에 깨어있는 사람과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저항에 대하여 권력은 항상 노동자 분열과 회유, 가차 없는 해고, 폭력으로 대응한다. 노동자들은 좌절하고 떠나지만 또 다른 송곳은 나타나서 외로운 저항을, 다른 내일을 준비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송곳, 동혁의 의연한 결의와 동료 노동자에 대한 믿음으로 맺는다. “꼭 내일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외침으로.
『객지』는 부랑노동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부랑노동자란 누구인가? 사전적 의미로 부랑자는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노동자가 부랑자가 되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다. 『객지』에서는 부칠 땅 조각 하나 없는, 작은 점방 하나 낼 돈이 없는, 대처 공장에서 일할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 부랑노동자가 되며, 이들을 계속 부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과 고용정책이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불안정한 고용 상황이 부랑노동자를 낳는다. 현재적 의미로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박근혜 정부는 『객지』의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 있다.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일을 할 자리가 없는 부랑노동자를 확대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정치상황만 70년대로 돌리려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상황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부랑노동자로 만드는 세상, 개별로 모래알처럼 흩어지라고 주문하는 시대에 『객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게 공선』이 노동자 계급 집단을 강조한다면, 『객지』는 노동자 개인에 대한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준다. 소설은 장씨, 목씨, 한동이, 대위, 동혁 등의 부랑노동자의 이름을 부른다. 회사의 회유에, 기업 편이 되어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린다. 『객지』는 내 옆에 나만큼 힘들어 하는 동료에게 따뜻한 말과 몸짓을 건네게 하는 소설이다. 오늘 우리가 『객지』를 다시 읽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공이지만, 『객지』는 정부와 새누리당 인간과 다른 인간을 성찰하게 한다.
출처 [김애화 칼럼] ‘객지’를 찾게 만드는 세상, 한국판 ‘게 공선’ 현상
[민중의소리] 김애화 마을활동가 | 최종업데이트 2015-12-27 18:25:38
“980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은 정글의 세상에서 생존경쟁을 벌이며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새누리당의 비정규 악법은 그나마 2년 뒤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박한 꿈과 기회마저 없애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규제 없는 파견확대로 합법적인 사람장사인 파견노동으로 좋은 일자리를 뺏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이 50이 넘으면 당연히 파견노동을 해야 하는 법안이기도 합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됐다. 위원장은 기자회견문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법 개혁을 규탄했다. 민주노총이 12월 16일 3차 총파업을 했고, 노동법 개악 저지를 위해서 내년 초까지 비상투쟁태세를 유지한다는 입장이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법 개악 움직임을 보며, 노동자의 내일을 상상해본다.
일본 프레카리아트가 부활시킨 『게 공선』
2008년 일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1929년에 고바야시 다키지가 쓴 소설, 『게 공선(工船)』이 무려 80만부가 팔리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소설은 법적인 보호 장치 없이 게잡이 어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노동착취를 견디다 못해 자연발생적으로 조직적 저항에 나서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80년이 지난 소설을 현재로 불러온 배경은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현실이다. 일본에서는 1985년 노동자파견법 제정으로 노동자 파견에 대한 법적 규제가 풀렸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영향으로 노동자 파견이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불안정한 노동, 프레카리아트 계급을 탄생시켰다.
▲ 게공선 소설책 표지 ⓒ월간 말
프레카리아트는 1920년대 고립된 어선의 노동자의 처지에서 자신을 보았다. 현재 일본 프레카리아트의 노동조건이 아무리 열악한들 1920년대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선동적인 목적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과거를 불러온 것이다, 라고 혹자는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프레카리아트들은 1920년대 노동자와 자신과의 근본적이며 중요한 공통점을 찾았는데, 그것은 캄치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노동자와 자신들이 일회용으로 사용되는 노동력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게 공선』의 표현대로라면 ‘버리는 종이’와 같은 신세라는 점이다.
프레카리아트가 『게 공선』을 통하여 얻은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우리 말고는 같은 편이 없다’는 의식일 것이다. 책 속에서 이러한 노동자들의 각성은 구축함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갑판에서 일하고 있으면, 수평선을 가로질러 남하하는 구축함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 후미에 일본 국기가 펄럭이는 모습이 보였다. 어업노동자들은 흥분해서, 눈물을 글썽이며 모자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저것뿐이다. 우리 편은 저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편이라 믿었던 구축함의 군인은 파업 후 공선에 올라와 파업의 핵심 노동자를 호송해가고, 자신들을 감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를 보고 노동자들은 ‘우리나라의 군함이 국민의 편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렇게 ‘게 공선 현상’은 2000년대 일본의 프레카리아트의 심각성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그들 스스로의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객지, 70년대로 역진하는 한국
한국의 비정규직 상황은 일본보다 더 심각하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노동 관련 지표가 OECD 회원국 가운데 거의 모든 주요부문에서 최하위권이란 결과가 나왔다. 한국의 비정규직은 2013년 8월 기준 409만2000명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OECD 국가 평균의 두 배이다. 이 비율은 일본보다 높다. 이 수치가 놀라운 일이지만, 민주노총이나 한국노동사회연구원이 파악하는 비정규직 규모는 정부의 자료보다 훨씬 크다. OECD보고서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이 OECD 평균의 절반치보다 낮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노동법 개악을 통해서 노동의 유연화를 더욱 심화시키려 한다.
불행하게 박근혜 정부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문화 현상이 나타날까 상상해본다. 일본의 프레카리아트가 『게 공선』를 선택했다면, 한국의 프레카리아트는 『객지』를 불러오지 않을까?
『객지』는 황석영의 1971년 작품이다. 이 소설은 60년대 말과 70년 초, 한창이던 간척사업 현장의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객지』 속 노동현장은 마치 캄치카 바다에 떠있는 게잡이 배와 같다. 무법천지, 아니 그 시대의 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객지』의 시대적 배경은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기이다. 『객지』 속 식당에 붙여 있는 구호, ‘건설은 국력의 상징이다’가 보여주듯이 국력과 국민이 모순 없이 인식되던 시기이며, 개발국가의 국민으로서 의식이 고취되던 시대이다. 산업화,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이 가능했던 때이다. 이런 기조는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노동자와 서민을 희생시키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 1974년 아산· 남양 방조제 준공식 ⓒ자료사진
간척사업 현장에는 부랑노동자들이 일한다. 이들의 위에는 ‘십장-감독-소장’이라는 복잡한 질서가 있다. 누구 하나 노동자에 대한 직접 책임은 지지 않고, 권한과 권력만 자유롭게 발휘되는 곳, 바로 오늘의 비정규직, 파견노동의 현장과 비슷하다.
『객지』의 간척사업 현장은 70년대의 노동 상황만을 상징하지 않는다. 70년대의 정치상황의 축약판이라고 보아도 좋다. 강요만이 지배하는 곳, 소통이 전혀 없는 곳이다. 이 현장에 깨어있는 사람과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저항에 대하여 권력은 항상 노동자 분열과 회유, 가차 없는 해고, 폭력으로 대응한다. 노동자들은 좌절하고 떠나지만 또 다른 송곳은 나타나서 외로운 저항을, 다른 내일을 준비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송곳, 동혁의 의연한 결의와 동료 노동자에 대한 믿음으로 맺는다. “꼭 내일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외침으로.
부랑노동자를 부른다
『객지』는 부랑노동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부랑노동자란 누구인가? 사전적 의미로 부랑자는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노동자가 부랑자가 되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다. 『객지』에서는 부칠 땅 조각 하나 없는, 작은 점방 하나 낼 돈이 없는, 대처 공장에서 일할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 부랑노동자가 되며, 이들을 계속 부랑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과 고용정책이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불안정한 고용 상황이 부랑노동자를 낳는다. 현재적 의미로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박근혜 정부는 『객지』의 상황으로 우리를 몰고 있다.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일을 할 자리가 없는 부랑노동자를 확대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정치상황만 70년대로 돌리려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상황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부랑노동자로 만드는 세상, 개별로 모래알처럼 흩어지라고 주문하는 시대에 『객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게 공선』이 노동자 계급 집단을 강조한다면, 『객지』는 노동자 개인에 대한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준다. 소설은 장씨, 목씨, 한동이, 대위, 동혁 등의 부랑노동자의 이름을 부른다. 회사의 회유에, 기업 편이 되어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린다. 『객지』는 내 옆에 나만큼 힘들어 하는 동료에게 따뜻한 말과 몸짓을 건네게 하는 소설이다. 오늘 우리가 『객지』를 다시 읽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공이지만, 『객지』는 정부와 새누리당 인간과 다른 인간을 성찰하게 한다.
출처 [김애화 칼럼] ‘객지’를 찾게 만드는 세상, 한국판 ‘게 공선’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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