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왜 일본식 석등이?
경복궁역 5번 출구의 비밀
숭유억불 정책 폈던 조선궁궐 입구에 불교 석등 설치는 모순
더구나 일본신사 형태 배열…이순신 장군 사당엔 일본 금송
[하니Only] | 등록 : 20120121 14:01 | 수정 : 20120121 14:39
아직도 친일파들이 숨어서 일본의 지령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하고 생각을 접지만, 그들의 음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장면들을 직접 목도하곤 한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에 일본식 조경을 했다든가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일본 특산종 금송을 심은 일들이 그렇다. 지나가는 말로 지인들과 시시덕대다가도 문득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든다.
진짜 누군가의 음모의도로 그런 상징들이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까?
12월 2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다시 찾은 조선왕실 의궤와 도서’ 특별전에 다녀왔다. 일본으로부터 되찾은 조선왕실의궤의 환수된 조선왕실의궤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전시회였다. 그날 나는 좀 들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대중들에게 ‘의궤’가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인 만큼, 설레이는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당일. 문화재청장을 비롯한 관련 공무원들의 표정에도 감개무량함이 역력했다. 민간과 정부가 호흡을 맞춰 이뤄낸 ‘민족적 쾌거’란 청장의 인사가 있었고, 참석한 주요 인사들도 의궤를 실제로 관람하며 ‘상세하고 방대한 기록’에 모두들 탄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실의궤의 귀환’이 갖는 ‘역사적 상징성’에 비추어 본다면, 그날의 행사는 좀 초라한 행사였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총리나 장관의 참석없이 문화재청장 주관으로 이루어진 것이 좀 아쉬웠을뿐만 아니라, 고궁박물관 자체가 ‘의궤의 환국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축사를 하는 사람들도 ‘일본이 그동안 잘 보관해 주어 고맙다’는 발언으로 일본 정부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전시장에서도 ‘조선왕실의궤 환수’를 위해 그간 아무런 댓가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햐 혼신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에 대한 감사는 한 구절도 없었다. 의궤 환수 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2010년 일본 총리 담화’로 의궤 환수가 결정된 뒤, 정부 인사들이 추진해 온 경과만이 반환경과로 소개되어 있었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을 통해 내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종이와 먹’으로 쓰여진 한권의 책이 아니었다. 내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들의 칼날에 쓰러진 명성황후의 죽음. 그리고 2년 2개월이란 역사상 가장 길고 슬펐던 장례식의 기록.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마저 일본에 빼앗기고 살았던 지난 100년의 설움, 일제의 칼등에 쫓겨 만주로 시베리아로 남양군도로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가 되었던 민족. 하루아침에 남의 노예가 되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던 슬픈 민족의 자존심을 나는 되찾아 오고 싶었다. 백제 왕릉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고, 놋그릇까지 공출당하며 모든 것을 빼앗기고 울먹이며 살아남았던 슬픈 ‘조선혼’을 달래는 일, 나아가 남북으로 허리가 잘려 서로 으르렁 대는 7천만 겨레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하고 싶었던 것이 이번 운동을 통해 내가 실현하고 싶었던 진실한 가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선왕실의궤는 단순히 하나의 문화재 반환을 넘는 의미를 부여 받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왕실의궤 환수는 완전한 성공이 아닌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 버린 듯 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려고 고궁박물관에서 나오다가 나는 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아니 여기 왜 국보 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이 서 있지?
거기에는 석등이 서 있었다. 서울시에 질의해 본 결과, 이 석등은 조선총독부를 중앙청으로 썼던 시절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은 건설당시 중앙청역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지하철 건설본부 주관하에 시공사인 삼성종합건설(주)에 의해 1985년에 건설되었다. 건설당시 중앙청역의 디자인 주제는 김수근 교수 외 4인의 디자인 자문을 거친 “석조전(石造殿)”으로서 화강석에 의한 우리고유의 전통미와 건축미를 부각하고, 십장생도 등을 벽화로 표현하였으며, 석등도 이 당시 설치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역에 설치된 석등은 국보 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조선시대 궁궐의 대표격인 경복궁에 불교식 대웅전 앞에 위치한 석등을 설치한 것은 왜 일까? 숭유억불 정책을 폈던 조선정치의 핵심장소에 부처님께 바치는 석등이 설치된 것은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석등의 배치 양식이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미술사에서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현재 역시 경복궁을 제외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로 석등이 설치 되어 있었다. 그건 일본 신사의 진입로- 참배를 위한 길이란 뜻에서 참도(參道)라고 부름 – 에서만 나타나는 형식이었다. 우리나라 석등은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 오직 1기만이 설치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경복궁 5번 출구처럼 여러 개의 석등을 1열로 배치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형태이고, 거의 모든 일본 신사가 따르는 일본만의 전통이다.
도대체 왜 경복궁 진입로를 일본 신사처럼 만든 것일까? 조선 역사의 최고 상징인 경복궁의 진입로를 일본 신사 진입로처럼 만든 것도 우연일까? 이래도 우리나라에 음모의 세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2012년 정월을 맞으며 나는 심각한 고민에 잠긴다.
글 혜문 /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조선왕조실록환수위 간사.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출처 : 거기에 왜 일본식 석등이? 경복궁역 5번 출구의 비밀
경복궁역 5번 출구의 비밀
숭유억불 정책 폈던 조선궁궐 입구에 불교 석등 설치는 모순
더구나 일본신사 형태 배열…이순신 장군 사당엔 일본 금송
[하니Only] | 등록 : 20120121 14:01 | 수정 : 20120121 14:39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의 석등 조형물 |
아직도 친일파들이 숨어서 일본의 지령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하고 생각을 접지만, 그들의 음모(?)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장면들을 직접 목도하곤 한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에 일본식 조경을 했다든가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일본 특산종 금송을 심은 일들이 그렇다. 지나가는 말로 지인들과 시시덕대다가도 문득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든다.
진짜 누군가의 음모의도로 그런 상징들이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까?
12월 2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다시 찾은 조선왕실 의궤와 도서’ 특별전에 다녀왔다. 일본으로부터 되찾은 조선왕실의궤의 환수된 조선왕실의궤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전시회였다. 그날 나는 좀 들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대중들에게 ‘의궤’가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인 만큼, 설레이는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당일. 문화재청장을 비롯한 관련 공무원들의 표정에도 감개무량함이 역력했다. 민간과 정부가 호흡을 맞춰 이뤄낸 ‘민족적 쾌거’란 청장의 인사가 있었고, 참석한 주요 인사들도 의궤를 실제로 관람하며 ‘상세하고 방대한 기록’에 모두들 탄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실의궤의 귀환’이 갖는 ‘역사적 상징성’에 비추어 본다면, 그날의 행사는 좀 초라한 행사였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총리나 장관의 참석없이 문화재청장 주관으로 이루어진 것이 좀 아쉬웠을뿐만 아니라, 고궁박물관 자체가 ‘의궤의 환국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축사를 하는 사람들도 ‘일본이 그동안 잘 보관해 주어 고맙다’는 발언으로 일본 정부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전시장에서도 ‘조선왕실의궤 환수’를 위해 그간 아무런 댓가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향햐 혼신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에 대한 감사는 한 구절도 없었다. 의궤 환수 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2010년 일본 총리 담화’로 의궤 환수가 결정된 뒤, 정부 인사들이 추진해 온 경과만이 반환경과로 소개되어 있었다.
▲ 경복궁 5번 출구의 석등 배열방식 |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을 통해 내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종이와 먹’으로 쓰여진 한권의 책이 아니었다. 내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들의 칼날에 쓰러진 명성황후의 죽음. 그리고 2년 2개월이란 역사상 가장 길고 슬펐던 장례식의 기록.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 마저 일본에 빼앗기고 살았던 지난 100년의 설움, 일제의 칼등에 쫓겨 만주로 시베리아로 남양군도로 뿔뿔이 흩어져 떠돌이가 되었던 민족. 하루아침에 남의 노예가 되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던 슬픈 민족의 자존심을 나는 되찾아 오고 싶었다. 백제 왕릉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고, 놋그릇까지 공출당하며 모든 것을 빼앗기고 울먹이며 살아남았던 슬픈 ‘조선혼’을 달래는 일, 나아가 남북으로 허리가 잘려 서로 으르렁 대는 7천만 겨레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기여하고 싶었던 것이 이번 운동을 통해 내가 실현하고 싶었던 진실한 가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선왕실의궤는 단순히 하나의 문화재 반환을 넘는 의미를 부여 받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왕실의궤 환수는 완전한 성공이 아닌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 버린 듯 했다.
▲ 일본 신사의 석등 배열방식 (도쿄 도쇼궁 신사의 진입로) |
씁쓸한 마음으로 지하철을 타려고 고궁박물관에서 나오다가 나는 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아니 여기 왜 국보 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이 서 있지?
거기에는 석등이 서 있었다. 서울시에 질의해 본 결과, 이 석등은 조선총독부를 중앙청으로 썼던 시절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은 건설당시 중앙청역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지하철 건설본부 주관하에 시공사인 삼성종합건설(주)에 의해 1985년에 건설되었다. 건설당시 중앙청역의 디자인 주제는 김수근 교수 외 4인의 디자인 자문을 거친 “석조전(石造殿)”으로서 화강석에 의한 우리고유의 전통미와 건축미를 부각하고, 십장생도 등을 벽화로 표현하였으며, 석등도 이 당시 설치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복궁 역에 설치된 석등은 국보 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유사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조선시대 궁궐의 대표격인 경복궁에 불교식 대웅전 앞에 위치한 석등을 설치한 것은 왜 일까? 숭유억불 정책을 폈던 조선정치의 핵심장소에 부처님께 바치는 석등이 설치된 것은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 국보 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석등의 배치 양식이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미술사에서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현재 역시 경복궁을 제외한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로 석등이 설치 되어 있었다. 그건 일본 신사의 진입로- 참배를 위한 길이란 뜻에서 참도(參道)라고 부름 – 에서만 나타나는 형식이었다. 우리나라 석등은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 오직 1기만이 설치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경복궁 5번 출구처럼 여러 개의 석등을 1열로 배치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형태이고, 거의 모든 일본 신사가 따르는 일본만의 전통이다.
도대체 왜 경복궁 진입로를 일본 신사처럼 만든 것일까? 조선 역사의 최고 상징인 경복궁의 진입로를 일본 신사 진입로처럼 만든 것도 우연일까? 이래도 우리나라에 음모의 세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2012년 정월을 맞으며 나는 심각한 고민에 잠긴다.
▲ 혜문 스님 |
글 혜문 /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조선왕조실록환수위 간사. 조선왕실의궤환수위 사무처장.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출처 : 거기에 왜 일본식 석등이? 경복궁역 5번 출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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