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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노동과 삶

어느 날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에 붙은 ‘빨간 딱지’

어느 날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에 붙은 ‘빨간 딱지’
[민중의소리] 양경수 전 금속노조 기아차화성비정규직분회장 | 발행 : 2016-09-17 10:39:17 | 수정 : 2016-09-17 10:39:17


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 딱지가 우리 집에 붙었다.

숨이 턱턱 막히던 7월 어느 날 아내와 퇴근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부부는 잠시간 말문이 막혔다.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에 웬 종이(압류안내장)가 한 장 걸려 있었고, 냉장고 세탁기 소파 등등에 손바닥보다 작은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누군가 들어와서 제멋대로 헤집고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집에 찾아온다는 연락도, 집에 들어온 흔적도 없이 그렇게…. 번호키가 달린 현관문이 그렇게 속절없이 열렸다는 생각에 황당하기도 했고, 원래 압류는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오는 것이라는 안내장 문구는 조용히 목을 졸라오는 느낌이었다.

지난해 6월부터 올해 6월까지 1년 동안 두 명의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옛 국가인권위 옥상에 있는 전광판에서 고공농성을 했다. 나는 두 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분회장이라는 이유로 광고업체로부터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고, 5억4천여만 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법원의 유체동산 압류가 집행된 것이다.

▲ 양경수씨 거실 텔레비전에 붙은 압류 딱지 ⓒ양경수 제공

압류가 진행된 날은 너무 더워 올여름엔 에어컨을 하나 장만하자고 가전제품 매장을 둘러보고 온 그날이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에어컨 사는 건 포기해야 했다. 덕분에 그 더운 여름을 선풍기 한 대로 버텨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무언가 사는 것을 논의할 이유가 사라졌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아내는 한동안 집에 혼자 있기를 두려워했다. 실제로 내가 늦는 날이면 혼자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며 밖에서 시간을 보냈고, 누가 초인종이라도 누르거나 문 앞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놀라고 긴장했다. 누군가 또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난 8월 중순 법원은 압류한 살림살이 9개를 경매에 부쳤다. 이미 은행의 모든 계좌가 압류된 상황이었고, 경매가 진행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는 급여마저 압류되어 150만 원을 제외한 금액은 광고업체에 빼앗기는 신세다. 실제 8월 급여에서는 80여만 원을 압류당하고 월급으로 정확히 150만 원만 받았다. 일해 봐야 빼앗기는 신세 일도 하기 싫어지고, 한푼 두푼 모아 무엇인가를 하자는 희망 따위는 나와 먼 이야기가 되었다.

2016년 8월 현재 민주노총 사업장 20곳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액이 총 1,521억이다. 이명박 정부 때 1,000억을 돌파하고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손배가압류는 노동자들에게 죽으라고 강요하는 간접살인과 다르지 않다. 실제 대부분의 손배가압류 대상자들이 해고자들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아무런 희망도, 대책도 없는 벼랑으로 내몰린다. 유체동산 압류가 되었을 때 곳곳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날아들던 개인회생, 파산신청 등의 대책도 손배가압류 대상자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은 탄압의 도구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그리고 가진 것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빼앗길 것이 뭐 있겠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손해배상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급여 압류는 노동의욕을 꺾었고, 그것은 모든 일상을 파괴한다. 하루하루 성실히 일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일할 의욕을 잃는다는 것은 매 순간이 고통인 삶이다. 150만 원어치만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더는 일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매일 출근하며 일하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출근하는 것이, 일하는 것이 고통이 된다.

또한, 이미 살림살이에 대한 경매마저 끝났지만, 여전히 또다시 비어있는 집에 누군가 들이닥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또다시 빨간딱지가 붙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은 일상 곳곳에서 덜미를 잡는다.

▲ 기아차 비정규직 최정명, 한규협 씨가 고공농성 364일차인 8일 오후 서울 중구 옛 국가인권위 광고탑에서 농성해제를 앞두고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무엇보다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6억 원에 가까운 손해배상액이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것이라는 점이다. 급여 압류로 80만 원, 살림살이경매로 140만 원을 가져갔지만, 그것은 원금은커녕 이자도 안 된다. 고맙게도(?) 나에게 남겨주는 월급까지 모조리 갖다 바친다고 해도 원금을 갚는 데만 30년은 걸린다. 이자 빼고 원금만 70살까지 손해배상액을 갚으며 살아야 한다. 그마저도 요원하다. 의미 없는 계산이다.

그래서 유일한 대책은 투쟁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투쟁을 잘하고 사측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손해배상은 사라진다. 그 외에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을 감당할 방법이란 없다. 그래서 당장 눈앞의 상황은 답답하고 억울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투쟁한다. 벼락 맞을 확률의 로또보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훨씬 더 승률이 높기 때문이다.


출처  [기고] 어느 날 비정규직 노동자의 집에 붙은 ‘빨간 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