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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권력형 개인 비리 최태민, 총체적 국정농단 최순실

권력형 개인 비리 최태민, 총체적 국정농단 최순실
‘같고도 다른 역사’ 반복되지 않게 할 우리의 선택은?
[경향신문] 한흥구 교수(성공회대·한국현대사) | 입력 : 2016.11.04 21:07:00 | 수정 : 2016.11.04 21:18:09


▲ 1976년 박정희가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박근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최태민 총재(왼쪽부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고 말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웃음거리로. 온 나라를 뒤흔든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 마르크스의 진단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틀린 것 같기도 하다. 40여 년 전 최태민 목사를 둘러싼 사건이 현재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비하면 차라리 가벼운 코미디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에서 최순실 게이트의 뿌리인 최태민 사건을 조망했지만 대체로 두 사건의 공통점만 지적했을 뿐, 심각한 차별성이 있다는 점이 종종 간과되고 있다. 첫째, 최태민은 대통령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다. 둘째, 최태민 사건은 박근혜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 권력형 개인 비리이지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 사건은 아니었다. 셋째, 박정희에게는 그래도 김정렴이나 박승규, 김재규처럼 자리를 걸고 최태민 문제의 심각성을 직간하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었다. 넷째, 최태민 문제는 권력의 핵심부에서는 최대의 골칫거리였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온 나라를 뒤흔드는 사건은 최순실 게이트라 불러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적어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또는 박근혜 게이트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 박근혜(당시 영부인 대행)과 최태민씨(사진 가장 왼쪽)가 1975년 서울 배재고등학교에서 열린 한국 구국십자군 창군식에 참석한 모습.


최태민은 1975년 3월쯤 박근혜와 처음 만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채 두 달이 안 된 1975년 5월 초부터 반공구국기도회나 구국기도대회를 열고, 구국선교단을 만들고 목사 100여 명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급기야 구국십자군을 창건해버렸다. 아무리 남베트남 정권이 패망한 극도의 안보위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사천리로 유신 후반기 가장 영향력 있는 관변단체가 만들어지고 그 이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최태민이 갑자기 명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태자마마와 유신공주

사적으로는 어머니의 피살, 공적으로는 남베트남 정권의 패망이라는 최대의 안보위기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박근혜에게 ‘구국’과 ‘십자군’이라는 깃발은 지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십자군’이라는 비유는 박정희가 먼저 쓴 것이기도 했다. 베트남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면서 박정희는 이들에게 자유 세계의 반공 십자군이 되라고 당부했다.

1973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을 때 박정희는 이들에게 이제는 유신 십자군이 되라고 강조했다. 최태민이 영악하게 구국 십자군을 내세운 것은 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십자군 원정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던 것처럼, 박근혜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십자군 알바단(십알단)’의 도움을 받아 권좌를 차지했다. ‘십자군’이라는 명칭은 조물주의 ‘칙사’나 ‘태자마마’라 자처했던 사이비 종교의 교주 최태민이 목사로 행세하는 데 훌륭한 위장망 노릇을 해주었다.

▲ 1990년대 초반 육영재단 분규 현장 등에 뿌려진 최태민 목사 비난 소책자.


당시 기독교계에서는 그야말로 ‘갑툭튀’인 최태민이 기독교계를 휘어잡아 구국선교단이나 구국 십자군으로 편제하려 할 때, 최태민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랬던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안타깝게도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최태민 편에 줄을 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최태민이 목사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은 일러야 1975년 4월이었을 텐데 그가 다음 달 ‘구국선교단’을 만들고 스스로 총재 자리에 올랐을 때 그 밑에서 구국선교단 단장을 한 사람은 놀랍게도 교계에서 존경을 받던 강신명 목사였다.

▲ 1990년대 초반부터 암암리에 돌다가 2006년쯤 공개된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 일부.


최태민이 조직한 구국선교단은 기독교계의 반발이나 대통령의 딸이 너무 특정 종교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 때문에 1976년 4월 ‘구국여성봉사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남성이면서 이 단체의 총재가 된 최태민은 박근혜를 등에 업고 봉사활동을 하는 여러 관변 여성단체들을 구국여성봉사단으로 통합하고 그 예산을 독차지하려 했다. 그 때문에 김재규가 10·26사건 후의 재판과정에서 지적했듯이 많은 여성단체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구국여성봉사단이 1979년 5월 명칭을 새마음봉사단으로 바꾼 것은 그동안 주요 사업으로 추진해 온 ‘새마음운동’이 여성만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포괄하기 때문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여성계의 반발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즐긴 박근혜

어린 시절의 박근혜는 그렇게 남들 앞에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태민이 박근혜 안에 숨어있던 권력의지를 끄집어냈다. 박근혜도 처음에는 어색했을지 몰라도 여기저기 다녀보니 대접도 받고 재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가 과히 멀지 않은 것 같지만, 그때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박근혜가 나타나면 공주님 오셨다며 흙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던 때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20대 중반의 젊은 처자가 갓 쓰고 도포 입은 노인들을 세워 놓고 충효에 대해 두 시간씩 강연하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어색한 일이었다.

박근혜가 조금 성숙했더라면 절대 그런 경우를 만들면 안 되었고, 그런 대접에 도취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최태민이 만드는 자리에 기꺼이 참석하여 사명감으로 연설했다. 오죽했으면 김재규가 육영수 여사도 그러지 않으셨다는 말까지 해야 했을까.

▲ 2007년 한나라당 경선과정에서 유포돼 논란이 됐던 ‘최태민 파일’ 표지. 연합뉴스·경향신문 자료사진


박근혜는 최태민이 인도해 준 새로운 세계를 매우 즐겼다. 최태민이 마련한 구국봉사단 행사는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참석하는 여느 행사와는 또 달랐다. 다른 행사에서 박근혜는 극진한 대접을 받는 귀빈이었지만, 최태민이 마련한 행사에서는 주인이었다.


냉철한 독재자, 무력한 아버지

최태민이 구국선교단 등을 빙자하여 돈을 뜯은 것과 최순실이 미르재단 등을 만들면서 수금한 것을 똑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최태민이 돈을 뜯을 때는 청와대 수석이 기업에 압력을 가하는 따위의 행동은 없었다. 호가호위하는 최태민 앞에 기업이 알아서 기거나, 최태민에게 선을 대 더 큰 이익을 보려고 스스로 갖다 바친 것이 대부분이었다.

정말 박근혜는 최태민의 비리와 무관했던 것일까?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햇수로 10년을 지낸 김정렴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절, 자신의 회고록에 엄청난 사실을 고백했다.

하루는 박근혜가 자신에게 구국선교단을 지원하는 어느 건설회사와 섬유 공업회사의 현안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당시는 비서실장 김정렴이 모든 정치자금을 관리하고 있을 때였다. 어린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놀아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김정렴은 즉각 박정희에게 자신이 박근혜의 활동자금을 마련할 터이니 박근혜가 금전 문제에 개입되는 일이 없도록 원천 봉쇄해 달라고 건의했고, 박정희는 김정렴의 건의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김정렴은 박정희의 양해를 얻어 모든 수석 비서관들에게 구국선교단에 이용당하지 말도록 당부했다는 것이다. 요즘 엄격해진 김영란법을 거론할 것 없이 당시의 법으로도 딱 떨어진 제3자 알선수재에 해당하는 형사범죄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친·인척 문제를 책임진 민정수석 박승규는 몇 차례 구두보고에도 불구하고 구국선교단 문제가 계속 터져 나오자 ‘잘릴 각오’를 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에게 제출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보고서를 읽은 박정희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보고서를 박승규에게 돌려주면서 “자네가 직접 근혜한테 얘기 좀 해봐. 나한테 보고 안 한 거로 하고…”라고 하더란다! 냉철한 독재자 박정희도 자식 이기는 부모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면죄부 준 친국사건

박승규가 박정희에게 최태민 문제로 보고서를 올렸다가 박정희의 수령 거부라는 황당한 사태를 당한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지만 아마도 1977년 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흥미 있는 변화는 매달 한두 차례는 꼬박꼬박 신문 지상에 등장하던 최태민의 이름이 1977년 3월 24일 경로병원 관련 기사를 끝으로 사라졌다는 점이다. 유신정권이 나름 최태민 문제로 고심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 지상에 이름이 나오지 않을 뿐 박근혜에 대한 최태민의 영향력은 지속하고 있었다. 최태민 대신 언론에 등장한 것은 그의 딸 최순실이었다. 단국대 대학원생이던 최순실은 1979년 6월 10일 새마음제전에서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개회선언을 했다.

최태민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은 우직한 김재규였다. 여전히 최태민이 박근혜를 손에 쥐고 흔드는 것을 본 김재규는 검사로 중앙정보부에 파견 나와 특명수사를 전담하는 6국장으로 있던 백광현에게 최태민의 비리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지시했다. 청와대 면담일지에 보면 김재규는 1977년 9월 12일 오전 백광현과 함께 1시간가량 보고차 박정희를 면담했고, 백광현을 내보내고 10분간 단독으로 박정희와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되어있다.

김재규가 작심하고 올린 보고서를 박정희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박승규의 보고서처럼 보고받지 않은 것으로 하고 수령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는 이 보고서를 박근혜에게 주었고, 당연히 박근혜는 이를 최태민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공보비서관이었던 선우련의 증언에 의하면 9월 12일 저녁 청와대에서는 기묘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박정희가 최태민의 비리를 조사한 보고서를 올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6국장 백광현을 한편에 앉혀 놓고 다른 편에 박근혜와 최태민을 앉힌 채 대질신문을 벌인 것이다. 흔히 ‘친국’이라 알려진 사건이다.

여기서 박근혜는 울며불며 최태민을 옹호했고 분위기는 ‘아니라잖아’ 하는 식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아버지로서 박정희는 대단히 무기력했고 또 무책임하기까지 했다. 박정희가 천하의 중앙정보부장이 올린 보고서를 믿지 않고 딸의 눈물에 넘어가자 김재규는 극도의 실망감과 모욕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는 이미 그가 알던 박정희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이제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판단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김재규가 10·26사건 후 자신이 박정희에게 총을 쏜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동기의 하나로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한 큰 영애의 문제”를 꼽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최태민 문제로 고심하던 박정희는 의전비서관 최필립(뒤에 정수장학회 이사장)에게 박근혜 옆에 최태민 같은 자들이 꼬이지 않도록 잘 돌봐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최필립의 직속 상관은 의전수석 최광수였고, 그의 외무부 대선배가 국무총리 최규하였다. 박정희의 마지막 비서실장 김계원에 따르면 자신이 “판단을 잘못해서” 박정희에게 대외활동이 많은 박근혜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하여 의전수석 최광수의 추천으로 최필립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최 씨 몇이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담 마크맨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을 보면 최태민의 수완이 좋았던 것은 틀림없다.

박정희는 최태민 문제에서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지만 고민한 흔적은 역력하다. 측근들의 회고에 박정희가 최태민 관련 보고가 올라오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느니, 눈물을 보였다느니, “저 년이 저 놈에게 홀딱 빠져서(최태민은 박정희보다도 다섯 살이나 많았다)” 헤어나질 못한다느니 탄식했다는 것이 과장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조갑제에 따르면 박정희는 1979년 5월 최태민이 여전히 박근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자는 백해무익한 놈이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할 놈이다”라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정희를 붙들어 맨 것은 “야단치려고 해도 어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라는 동정심이었다. 이 동정심이 결국은 자신과 박근혜를 망친 것이다.


영남대·육영재단·정수장학회에 드리운 최태민의 그림자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자 새마음봉사단(구국봉사단)은 신군부의 실세 허화평의 주도하에 12월 1일 해체되었다. 박근혜의 권력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최태민은 이제 구악의 표본으로 구속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박근혜는 이때도 최태민의 구속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새마음봉사단이 해체된 뒤 박근혜가 다시 공적 직함을 맡은 것은 박정희가 퇴임(!) 후 총장으로 가려 했던 영남대의 이사장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열기가 한창이던 1980년 4월 뚱딴지같이 28세의 박근혜가 이사장이 되자 영남대 학생과 교수들이 들고일어났다. 5·17이 터지고 전두환이 집권했지만, 전두환은 박근혜의 이사장 자리를 지켜주지 않아 박근혜는 1980년 11월 이사장에서 평이사로 물러앉았다.

박근혜 계열의 사람들이 영남대 이사로 대거 들어간 것은 1986년 7월부터였다. 1986년 7월 육영재단 전무 송재관과 영남투자금융 회장 김정욱이, 12월에는 최태민의 사촌으로 어린이회관 관장을 지낸 김창환이, 1987년 8월과 1988년 4월에는 영남투자금융의 강재구와 어린이회관의 손미자가 각각 영남대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사회의 구성상 학교 측 인사는 한 명도 없고 박근혜와 최태민의 측근들로 이사진이 구성된 것이다.

▲ 1979년 6월 10일 열린 제1회 새마음 제전에 참석한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가운데)가 최순실 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왼쪽)과 함께 봉사단원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뉴스타파 영상 캡처


1988년 영남대는 사립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조선대와 함께 국정감사를 받았는데, 박근혜·최태민의 측근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학교법인 영남학원의 정관 1조를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을 실시”한다고 바꾸어 놓은 것이 밝혀져 물의를 빚었다. 이사진뿐만이 아니었다. 법인 상임이사 김정욱과 최태민의 여섯 번째 부인의 전남편 아들로 알려진 조순제, 최태민의 처남 손윤호, 인척인 곽완석 등이 총장도 인정하는 영남대의 실세 ‘4인방’으로 전횡을 일삼았다. 이들은 아예 1인당 대략 2,000만 원씩 받고 29명을 부정입학 시키기도 했는데, 조순제 등은 돈도 내지 않고 자식을 부정입학 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최순실 게이트가 퍼진 단서가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의혹이었으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중죄로 다스려져야 할 일이었지만 이렇다 할 처벌을 받지 않고, 박근혜와 박근혜 측 이사 4인이 1989년 2월 영남대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때 사임한 사람 중 김창환은 정수장학회 이사장, 김정욱과 손미자는 정수장학회 이사를 겸하고 있었다.

육영재단에서 최태민 일가의 전횡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영남대에 최태민 계열의 사람들이 이사로 등장하는 1986년부터이다. 최순실이 유치원을 경영해서 현재의 부를 축적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처음 유치원 경영에 손을 댄 것은 1986년 3월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 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였다. 육영재단 직원들은 최씨 일가가 재단 운영에 개입하면서 공적 재단을 사기업처럼 운영하려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1987년 9월 육영재단과 어린이회관 직원 150여 명이 ‘어용 간부 퇴진’, ‘족벌인사 체제 종식’ 등 최태민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던 사태는 1990년 11월 박근혜 측과 박근령 측이 몸싸움을 벌이는 등 격렬한 대립 끝에 박근혜가 육영재단 이사장 자리를 동생 박근령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당시에 박근령은 남동생 박지만과 함께 대통령 노태우에게 “진정코 저희 언니는 최태민 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라는 탄원서를 올리기도 했다.


박근혜 검증에 실패한 한국사회

이것이 나라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보면서 우리는 유신 후반기에 최태민 스캔들 같은 대형 사건이 있었고 2007년과 2012년 두 차례나 검증의 기회가 있었는데 도대체 언론과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무엇을 한 것인가 통탄해하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대선 당시 필자도 최태민 문제와 정수장학회, 영남대 문제를 지적하긴 했지만, 더 철저하게 물고 늘어지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2007년 한나라당 내부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최태민 문제와 관련한 검증에서 박근혜 후보가 직접 관련된 것은 없다고 슬렁슬렁 넘어갔었다.

박근혜가 천벌 받을 일이라 발끈했던 출산설이야 사적인 영역이니까 검증대상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정치 입문 이전의 공적 활동인 영남대 재단,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활동은 중요한 검증대상이었다. 이들 재단은 작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지만, 국가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조직이다. 그런데 이 작은 조직에서 박근혜는 최씨 일가나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휘둘리고 있었다.

언론이나 정치권의 무책임과 나태함이 오늘의 화근을 키웠다. 사실 최태민 문제에 대해 가장 자세하게 취재한 것은 조·중·동 특히 조갑제나 김진이었다. 그런데 박근혜가 보수 진영의 후보가 되자 이들 매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닫아버렸다. 진보 언론도 취재력도 의지도 모두 부족했다.


데자뷔, 같으면서도 다른

2016년 4월 13일의 20대 총선은 전문가나 일반인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야당은 분열되어 있고, 여당은 단결되어 있으니 선거는 해보나 마나 여당이 압승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측이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예상을 뒤엎은 선거가 우리 역사에 또 있었을까?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에는 없는 것이 없다. 전문가나 일반인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린 선거는 유신 체제하의 나눠 먹기 선거였던 1978년 12월 12일의 10대 총선이었다. 선거 전의 판세 분석에서는 여당인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막상 투표함을 열어보니 야당인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1.1%를 앞서는 이변이 연출된 것이다. 일반인도 언론도 정치권도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놀라운 결과였지만 이 선거가 열 달 후 18년간 집권한 박정희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적어도 박정희는 박근혜보다는 선거 패배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박정희는 선거 열흘 만인 12월 22일 11개 부처의 장관을 경질했다. 이 인사에서의 핵심은 사실 10년째 자리를 지켜온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을 경질한 것이다. 김정렴이 빠진 공백을 기민하게 파고든 것이 차지철이었다. 선거에서 드러난 민중들의 분노가 권력 핵심부를 흔들어 김재규가 총을 뽑아 들게 되는 10·26 술자리의 구도가 마련된 것이다.

박근혜는 20대 총선에서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온 민심의 이반, 특히 헬조선에서 신음하는 흙수저 젊은이들의 분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선거 패배 한 달 만에야 대통령 비서실장을 경질했고, 개각도 넉 달이나 지나 겨우 3개 부처 장관만 찔끔 교체했을 뿐이다. 이 동안 박근혜는 각종 의혹이 제기되어 정상적으로 공직 수행이 불가능해진 민정수석 우병우를 끌어안고 뭉개다가 시간만 허비해버렸다. 최순실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권력 핵심부가 붕괴하는 속도는 1979년에 비해 훨씬 빨랐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12월의 총선이 열 달 뒤 10·26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는 데에서는 권력 핵심부의 와해뿐 아니라 민중들과 야당의 역할도 중요했다. 당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공화당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야당이 잘해서였을까? 10대 총선이 진행될 당시의 신민당은 중도통합론을 내세운 이철승이 당수로 있던 역대 최악의 야당이었다. 선거 후 채 반년이 지나지 않은 1979년 5월 말 신민당은 선명 야당의 깃발을 높이 든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예상 밖의 총선 결과가 김영삼이 야당 총재로 선출되는 결과를 낳았고,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된 것은 또 YH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불러왔다. 이철승이 당수로 있었다면 여성노동자들은 절대로 신민당사를 농성장소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9년 상반기는 유신 반대 정서는 높았지만,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던 시기로, 전국의 주요 대학에서 단 한 건의 학생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던 ‘태평성대’였다.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간 것은 8월 9일이었다. 그로부터 채 80일이 안 되어 10·26 사건이 터진 것이다.

대중들은 유신 말기보다 훨씬 더 준비되어 있다. 과연 지금의 야당 지도부는 1979년 YH 사건-신민당 총재 권한 정지 가처분신청-국회에서의 김영삼 제명-부마항쟁으로 숨 가쁘게 이어진 상황에서 김영삼이 했던 역할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인가?


헬조선·흙수저의 분노

20대 총선에서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온 것은 헬조선·흙수저의 분노 때문이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것이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의혹이라는 점도 흙수저의 분노와 관련한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런데 헬조선·흙수저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 한흥구 교수(성공회대·한국현대사)

2002년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은 이제 비로소 우리 젊은이들이 불의에 맞서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그러기 위해서는 꼭 집권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이 선거유세 과정에서 노무현은 또 학벌, 재산, 부모의 지위 등이 세습되지 않는 사회, 부자 아버지 만나지 않아도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면 노무현처럼 변호사도 되고 장관도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외쳤었다. 그리고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사회, 그를 뽑았던 사람들이 같이 만들고자 했던 사회는 오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한 연설을 한 7년 뒤, 노무현은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려야 했다. 그리고 또 7년 뒤 젊은이들은 자기가 사는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며 흙수저의 처지에 절망하고 있다.

헬조선·흙수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노무현이, 노무현을 뽑았던 사람들이 추구했던 개혁이 실패한 자리가 헬조선·흙수저의 묘판이 된 것이다.

근현대사의 흐름을 보면 역사에서 중요한 기회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자주 온다. 역사가 더디게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기회가 자주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좋은 기회를 우리가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흙수저 젊은이들의 분노는 ‘박근혜 게이트’의 폭로로 이어졌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축구로 치면 발만 대면 되는 기회를 세 번이나 놓쳤다.

1987년 6월항쟁 직후의 대통령 선거를 분열로 망쳤고, 1997년 대통령 선거 승리 직후 국제금융 자본의 대리인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재벌해체를 주장할 때 그 기회를 날려버렸고, 2004년 탄핵 직후 민주개혁 진영이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음에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기회를 흘려보내고 꼭 10년 뒤 국가보안법을 앞세운 공안세력에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했고, 재벌해체 기회를 놓치고 18년 뒤 재벌들이 오히려 노동개혁을 들고나왔다.

지금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막지 못하고 이런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또 어떤 끔찍한 상황을 맞아야 할까? 우리는 지금 정말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출처  [한홍구 교수 기고] 권력형 개인 비리 최태민, 총체적 국정농단 최순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