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노기자의 ‘끝나지 않은 인혁당 사건’
[한겨레] 글 : 이명선, 진실탐사그룹 셜록 기자, 사진 : 셜록 제공 | 등록 : 2017-06-17 10:14 | 수정 : 2017-06-17 10:22
▲ 박근혜는 거짓말을 했다. “과거사 피해자들을 만나고,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겠다”던 약속은 2013년 정부 출범 직후 없던 말이 됐다. “인혁당에는 2개의 판결이 있다”며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의 실체를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대중의 뭇매를 맞고 뱉은 약속이었다. 최악의 사태는 그 후에 찾아왔다. 박근혜 정권 출범 5개월 뒤인 2013년 7월, 국가정보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무기수·유기수 가족 77명에게 가지급된 배상금 일부를 반환하라고 소송을 걸었다. 2011년 1월 대법원이 ‘지연 이자가 과하다’며 30여 년 치 이자액을 삭제하자, 국정원이 이들이 앞서 받았던 491억여 원 중 원금 271억여 원 등을 제외한 돈을 이자까지 쳐서 갚으라고 한 것이다. 법원은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고, 피해자 가족들은 되레 돈을 갚아야 할 채무자 신세가 됐다. 연 20%에 이르는 연체 이자율은 하루가 무섭게 빚 덩치를 키워간다. ‘물고문’, ‘전기고문’이 끝나더니 어느덧 ‘이자 고문’이 시작됐다. 한국 사회는 이들의 고통에 과연 뭐라 답해야 할까. 글 이명선 진실탐사그룹 셜록 기자, 사진 셜록 제공
▲ 구순의 노기자 강창덕은 고문으로 조작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포함해 모두 7번의 투옥, 13년의 수감생활을 했다. 강창덕의 서재 겸 안방. 책 사이로 한반도기가 꽂혀 있다
대구 봉덕시장 인근의 한 여관방. 그날도 어김없이 ‘유신 반대 삼총사’가 시린 추위를 뚫고 한자리에 모였다. 벽지가 누렇게 바랜 허름한 여관방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좋았다. 맏형 강창덕(당시 47살)은 동생들이 도착하자마자 곧장 문을 걸어 잠갔다. 창문 틈 사이로 인기척도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강창덕은 미닫이 창문의 걸쇠를 돌려 잠그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경일(당시 44살)과 이재문(당시 40살)도 그제야 온돌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취재노트를 꺼냈다. 1974년 2월 어느 겨울밤, 셋은 유신 반대 지하신문인 <참소리> 창간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니들 여기 올 때 뒤밟히면 안 된다. 우리 다 죽는다.”
셋은 1974년 초 박정희 유신독재의 진실을 알리고자 지하신문을 만들기로 결의했었다. 신문이 완성되면 새벽녘 대구 중앙로 인근에 몰래 뿌리자는 계획을 세웠다. 신문의 제호는 <참소리>, 논단은 <진실로>로 정했다. 제 목소리를 잃은 언론을 대신해 세상의 참된 소리, 즉 진실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서였다. 강창덕은 언론계와 정계, 나경일은 노동계, 이재문은 학계로 영역을 나눴지만 그들의 주요 취재 대상은 대학이었다.
그해 겨울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1974년 1월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선포해 전국민의 입을 꽁꽁 얼려버렸다. 막걸리를 마시고 술기운에 유신 반대 발언을 했다가 영장 없이 체포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하자는 발의 또한 금지됐고, 보도와 출판은 정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자유는 박탈됐고, 인권은 유린됐다.
‘유신(維新)헌법’이 아니라 ‘유신(有神)헌법’이었다. 낡은 제도를 새롭게 하겠다는 유신(維新)헌법은 사실 대통령 박정희를 대한민국의 신(神)으로 만드는 법이었다. 이를 좌시하지 못한 이들은 대학생이었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이 철창행을 각오하고 반유신 운동에 나섰다. 4·19 혁명이 이승만 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이번에도 민중의 힘으로 독재를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민주화란 꽃봉오리가 대학가에 조금씩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학생들 데모 분위기 어떻노? 유신 반대 선언문 가져왔제?”
당연히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운동과 선언문이 주요 기삿감이었다. 당시 서울대의 경우 학생운동이 상대적으로 덜 활발했던 의대와 공대에서도 민주화운동 바람이 불고 있었고, 여러 여자대학교 학생들도 데모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때마침 1969년 3선 개헌 운동과 1971년 교련 반대 데모 때 강제 징집됐던 학생들이 복학하면서 점차 그 세가 확대되고 있었다.
<참소리>의 편집장은 강창덕이었다. 강창덕은 1956년 서른의 나이로 <영남일보> 공채 1기로 입사하고 모두 5년간 기자로 일했다. 그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기자였다. 영남일보 사주가 이승만 대통령이 창당한 자유당 배지를 달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자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냈었다. 강창덕은 그 뒤 <대구매일신문>으로 이직해 ‘이승만 저격수’가 됐다. 이승만 정권의 비리를 파헤치는 기사를 지칠 줄 모르고 써 내려 갔다. 그중 하나가 이승만 정권의 만행 중 하나였던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이었다. 강창덕은 고향 경북 경산에 특파원으로 내려가 부락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폐갱 속에 묻힌 수천구의 억울한 죽음을 기사로 옮겼다.
그런 그에게 <참소리>는 다시 참기자로 거듭나는 계기였다. 신문사를 퇴사하고 14년 만에 다시 펜을 잡았지만, 저격의 대상이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바뀌었을 뿐, 끓어오르는 기자 정신은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 강창덕의 책상. 안중근 의사가 남긴 ‘견리사의 견위수명’(눈앞 이익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등사판 작업할 때는 꼭 고무장갑 끼고 하래이.”
경찰의 사찰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야 했다. 지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신문을 만질 때마다 늘 고무장갑을 꼈고, 수첩은 늘 빈 상태로 남겨두었다. 책잡힐 만한 메모는 애초에 남기지 않았다. 뜻을 함께한 동지들끼리 사진을 찍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진실은 드러나도 그들은 얼굴 없는 기자로 남아야 했다. 강창덕과 알고 지냈던 동생인 백정호(당시 32살)는 이 소식을 듣고 기꺼이 <참소리>의 물주가 되기로 했다. 미술학도였던 백정호는 미술학원에서 번 돈을 형들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등사판과 종이는 백정호의 주머닛돈으로 마련했다.
그 무렵 유신 정권의 칼날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1974년 4월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서울의 봄을 꿈꾸다가 경찰에 발각됐다. 곳곳에 심어진 사복경찰의 감시를 결국 피하지 못했다. 결국 중앙정보부는 관련 학생들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란 명칭을 달아 1024명을 연행하고 180여명을 구속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곧장 4월3일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관련된 단체와 그 구성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는 일을 금한다”고 공표하면서 전국을 유신의 손아귀에 넣어버렸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도 이때다.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했다.
“안 되겠어. <참소리> 모두 태워야겠어.”
1974년 4월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가 발표한 수사상황은 결정적으로 강창덕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도록 했다. “민청학련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순단체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이 연루됐다”는 방송을 듣고 강창덕 자신도 이에 연루될 수 있다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1964년 터진 인혁당 사건에 대해 전혀 아는 바는 없었지만, 이 불똥이 자신에게도 튈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날 밤 강창덕은 바로 짐을 싸서 대구를 떠났다. 하지만 도피 열흘째인 5월6일, 동서가 운영하던 양복점에서 남대구경찰서 보안 경찰들한테 붙잡히고 말았다.
▲ 강창덕이 법원에 제출한 재산 목록.
고문은 숨 쉴 틈 없이 계속됐다. 남대구경찰서 수사관들은 강창덕을 기다란 나무 의자에 손발을 묶어 누인 다음,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물을 부었다. 경찰봉으로는 손바닥과 발바닥을 거침없이 때렸다. 퍼렇게 멍이 들어가는 몸을 보면서 그는 ‘이 고문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두려움에 떨었다. 중앙정보부로 옮겨가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 모를 창문 없는 고문실에서, 온 감각을 도려내고 싶은 끔찍한 고문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이승만 저격수’ 기자 출신 강창덕, <참소리> 만들어 박정희 정권에 맞서
1974년 민청학련 배후로 지목돼 구속... 중정,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조작
함께 잡힌 이창복·전창일 등 동료도 불법 고문 등 시달리다 목숨만 건져
강령·규약 등 물증도 없는 조작사건, 선고 18시간 뒤 8명 전격 사형집행
재심 통해 무죄 확정판결 내려지자... 정부, 원심확정일 이후 이자 포함
491억 원을 피해자 77명에게 배상... 평화재단 출연, 사회단체 등 기부해
2011년 대법원이 이자과다지급 판결... 국정원,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 내
연 20% 연체이자율에 시달리고... 재산 압류, 부동산 강제경매 내몰려
원칙대로면 고문은 유신헌법에서도 금지사항이었다. 유신헌법 제10조 2항에는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고문은 늘 편하게 가져다 쓸 수 있는 값싼 도구가 됐다.
“공산주의 책 보면서 북한 사주 받은 거 아니야? 북한 방송 몰래 훔쳐 들었다고 실토해!”
고문 기술자들은 조작된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선수였다. ‘살아서 못 나간다’고 협박은 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토해낼 때까지 어떻게든 살려 둬야 했다. 고문을 하다 기절을 하면 군용 담요를 덮어 주물러서 혈액순환을 시켰다. 그러고 다시 깨어나면 멱살을 잡아 고문 의자에 앉혔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강창덕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대화가 있었다. 바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명이 만들어진 경위였다. 조서를 작성하던 중 조사관들끼리 나누던 대화를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명명된 배경을 들었다. 일단 잡아 놓고 입맛에 맞게 사건명을 붙인 것이었다.
“이 사건 명칭을 뭐라고 했으면 좋겠냐?”
“서도원, 도예종 등 1차 인혁당 관련자들이 많으니 인혁당 재건위라고 하면 어떻겠냐?”
검찰로 넘어가도 모든 게 똑같았다. 군 검찰관에게 신문을 받는 동안에도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함께 입회했다. 죽음만은 피하고 싶어 피눈물 흘리며 받아 적은 거짓 진술서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말하면 검사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며 자리를 떴고, 그사이에 중앙정보부 사람들은 또다시 고문 협박을 했다.
고문으로 주물러 만든 허위 사실은 재판에서도 뒤집어지지 못했다. 1974년 7월8일 서울 중구 필동 헌병사령부 법정에서 열린 인혁당 첫 재판은 잘 짜인 연극과도 같았다. 긴급조치 4호가 발동하고 두 달 남짓 지나는 동안 강창덕을 비롯한 사건 연루자 25명은 중앙정보부가 쓴 대본을 완벽히 외웠다. 1964년 ‘인혁당’ 자체가 조직된 적이 없었으니, ‘인혁당 재건위’라는 말은 사실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재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유신반대 운동을 잠재울 희생양만 있으면 됐다.
▲ 강창덕의 가족사진. 아버지가 없는 가족사진에 불과했지만 사진 뒤에는 ‘출소 시까지 반려'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 중 고문으로 받아낸 진술 말고는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다. 반국가 단체 결성을 위한 강령이나 규약, 체계, 조직활동에 대한 어떠한 물증도 제시되지 못했다. 증거물이라고 해봤자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라디오와 사회주의와 관련된 서적 몇 권이었다. 증거가 부족하면 재판 도중 검사가 피고인들을 끌고 내려가기도 했다. 이창복(당시 42살)이 그러한 경우였다. 공소장을 읽던 검사가 휴정 중에 보통군법회의 밑에 있는 사무실로 데리고 가 이창복에게 추가 진술서에 지장을 찍도록 강요했다.
“이창복! 북한 노동당 제5차 대회 보고문 써 있는 노트 본 거 다 알고 있어. 빨리 지장 찍어.”
“맹세코 그런 노트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헛소리 말고 목숨이라도 부지하려면 지장 찍어!”
누군가 죽어야 이 일이 끝난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전창일(당시 47살)이었다. 중앙정보부 6국 ‘윤 계장’은 그를 따로 불러내 사형수 명단에서 빠졌으니 안심하라고 미리 언질을 줬다. 극동건설에서 중동지역 수주를 담당하던 전창일은 외국어와 무역에 능통했다.
“전창일, 넌 대한민국 제거 대상에서 제외됐어. 극동건설의 김용산 회장에게 고마워하게. 이 일을 다 끝내고 예전처럼 국가를 위해 외화벌이를 해야 하지 않겠나?”
“무슨 말씀입니까? 제거 대상이라뇨?”
“그러니까 극형은 면했단 소리요.”
실제로 극형을 위한 작업은 밀실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대법원 재판을 앞두고 공판조서가 변조된 것이다. 대법원은 공판을 따로 열지 않고 공판조서와 증거를 근간으로 법률적 해석만을 검토하기 때문에, 공판조서 조작은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실제 답변과 다르게 적힌 부분은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위해 비밀조직을 구성하기로 했다” 등 반국가단체 결성과 관련된 핵심 증언들이었다. 사실상의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검찰이 유일하게 법원에 내민 증거이기도 했다.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이수병, 송상진,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 8명 사형!”
비극적인 예감은 들어맞았다. 8명에게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사형수 8명은 선고가 난 지 불과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강창덕은 자신이 무기징역을 받은 사실보다 8명의 사형 집행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독방에 홀로 앉아 ‘과연 이 땅에 법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사실에 되레 환멸을 느꼈다.
강창덕의 반골 기질은 어린 시절부터 다분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7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강창덕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일본제국주의가 벌인 만행에 대해 들으며 성장했다. 그런 영향으로 17살이 된 강창덕은 만주 일대에서 벌어지는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소식을 듣는 대로 바로 주변에 알렸다. 일본 순경은 강창덕을 주재소 땅굴에 가뒀다. 1944년 8월, 강창덕의 첫 옥고는 이때 시작됐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1945년 6월, 해방을 두어 달 앞둔 시점에 일본 순사로부터 일본 해군 지원병에 자원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이를 당당히 거부했다. 일본군이 되는 것도 싫었고, 조국이 아닌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없었다.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던 그는 이내 잡혔고, 인생 두 번째 옥고를 18살에 치렀다.
해방이 되고 갓 20살이 된 강창덕은 분단된 나라가 싫었다. 대구상업중학교(현 대구상원고) 학생이었던 강창덕은 1947년 11월 학생 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가 ‘미국과 유엔에 의해 한반도가 분단될 위기에 처했다’며 좌중을 설득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한 우익 학생 단체가 갑자기 들이닥치면서 강당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은 이 모든 책임을 연사인 강창덕에게 지웠다.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1개월 옥살이를 하고 석방됐지만 결국 학교에서는 퇴학처분을 받았다.
네 번째 옥살이도 비슷하다. 통일을 주창하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됐다. 조선정치대학(현 건국대)을 다니고 있었던 강창덕은 서상일 의원의 국회의원 보궐선거 찬조 연설에 나가 평화통일을 얘기했다가 1952년 2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붙잡혔다. 옥살이를 하고 나온 강창덕은 1956년 조봉암 진보당 대표의 경산지역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경산에서 조봉암의 표가 이승만의 2배 이상 앞지른 것은 그의 평생 자랑거리다.
신문사 퇴사 이후 강창덕은 1960년 5월 장면 정부가 제정한 반공임시특별법(현 국가보안법과 유사)과 데모규제법(현 집시법과 유사)을 2대 악법으로 규정하고 결사반대 운동을 벌였다. 반공임시특별법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단체를 결성하는 것을 금지했고, 데모규제법은 사실상 데모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2대 악법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강창덕은 이 일로 약 한 달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마자 다시 문제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반국가행위 특별법’을 소급입법으로 제정해 강창덕을 다시 잡아들였다. 무려 징역 12년을 구형하고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여섯 번째 투옥은 2년8개월 만에 끝이 났지만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강창덕을 연루시켰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총 8년8개월을 복역한 뒤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됐다. 강창덕이 그때까지 항일운동, 민주화운동, 평화통일운동의 대가로 치른 옥고는 총 7번, 그 기간은 13년이었다.
▲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강창덕(1927년생, 왼쪽부터), 전창일(1928년생), 이창복(1933년생) 세 사람이 옛 서울구치소였던 서대문형무소 앞에 나란히 서 있다. 세 사람은 이곳에서 오랜 투옥 생활을 했다
아들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달갑지 않았다. 장남 강상호(52)는 늘 가족보다는 나라를 위해 싸우는 아버지가 미웠다. 어머니 허숙자의 어깨에 올려진 무거운 짐을 늘 곁에서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아버지 때문에 교사였던 어머니는 1971년 겨울 갑작스레 대구에서 경북 영천 평천리로 발령이 났다. 도시에서 연고가 없는 촌으로 발령이 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구나 가재도구는 챙길 틈도 없이 어머니는 어린 세 아들을 데리고 평천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 강창덕은 대구에 남아 민주화운동을 계속했다.
평천으로 이사 가면서 아들들은 아버지를 일 년에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했다. 돈은 엄마가 벌었다. ‘소매치기도 교사 지갑에는 손을 안 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시 교사의 월급은 쥐꼬리만했던 터라, 어머니는 돈을 벌고자 방문판매를 하기 시작했다. 오후 무렵 교사 일이 끝나면 집에서 양은으로 된 찜통을 머리에 가득 이고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찜통을 팔았다. 당연히 잘 팔릴 리가 만무했지만 어머니는 세 아들의 반찬 값이라도 벌고자 했다.
어머니는 세 아들에게 ‘절대 어디서도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지 말라’고 자주 당부했다. 경찰들이 이따금씩 집에 찾아와 가택수색을 했는데 혹시라도 어린 자식들 일기장에 아버지 이야기가 쓰여 있으면 문제가 될까 노심초사했다. 실제로 사복경찰들은 아들들의 학교 앞으로 찾아가 몰래 감시하고 돌아가곤 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들 앞에서 단 한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장남 강상호는 기절하듯 쓰러져 주무시는 어머니의 이불을 묵묵히 목 끝까지 덮어드렸다.
아버지를 면회하러 가는 길은 너무도 멀었다. 1년에 딱 두 번, 방학 때만 겨우 갔다. 쌀가마니만한 자루에 책 100여권을 담아 들고 이동하는 일은 어린 강상호에게 너무도 힘들었다. 면회 시간은 10분 남짓이었지만 책을 빼오고 다시 넣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책 안에 불순한 내용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받는 데 시간을 다 썼다. 면회 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영천에서 전주교도소까지 가려면 버스 두 번, 기차 두 번을 타야 했다. 어렵사리 전주역에 도착하면 어머니와 아들 셋은 급히 국밥을 말아 먹고 택시를 타고 전주교도소에 도착해 숨을 고르기 바빴다.
1982년 12월 아버지가 출소한 후에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빚을 청산하기 위해 지내던 집의 보증금을 빼야 했다. 가족은 어쩔 수 없이 허름한 양계장을 헐값에 빌려 집처럼 꾸몄다. 여름이면 닭똥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그래도 다섯 가족이 함께 몸을 누일 수 있게 돼 행복했다. 어렵게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일을 구했지만, 벌어온 돈은 몽땅 빚을 갚는 데 썼다. 서울에서 유학을 하던 둘째 동생 강상우(당시 18살)는 잘 곳이 없었으나 가족들이 걱정할까 말은 하지 못하고 학교 근처 공공 화장실에서 쭈그려 자며 등하교를 했다.
2008년 1월, 천신만고 끝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강창덕은 2009년 8월 손해배상금 15억2200여만 원을 받았다.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인용된 금액의 65%를 가지급받은 것이다. 30여 년 만에 빨갱이 딱지를 떼고,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사과의 대가를 받은 것이지만 기쁨보다는 설움이 먼저 터졌다. 박정희 정권의 희생양이 되어 송두리째 날아간 그의 젊음과 자유는 화폐로 보상될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죽은 아내였다. 아내는 시외 분교로 출근하는 버스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2년간 병상에만 누워 있다가 1987년 여름 세상을 떠났다. 평생 남편 없이 아들 셋만 키우다 호강 한번 못 하고 떠난 아내에게 참 미안했다. 아들 셋과 공놀이 한번 못 한 것은 평생의 한이 됐다. 인혁당 사건으로 8년 8개월을 꼬박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아들들에게 살가운 포옹도 못 해줬었다. 강창덕이 받은 15억여 원은 아내의 목숨값이자 아들 셋의 파괴된 행복의 대가였다.
2009년 9월 인혁당 무기수·유기수 관련자와 그 가족 77명이 가지급받은 손해배상금은 모두 491억여 원이었다. 원심 확정판결이 있었던 1975년 4월 9일부터 지급 시점까지 밀린 이자를 포함해 계산한 금액이었다. 강창덕, 전창일, 이창복 세 사람 모두 돈을 받자마자 신세 진 곳에 가장 먼저 빚을 갚았다. 가장 없이 가정을 꾸리느라 그간 부채가 많았다. 십시일반 돈을 걷어 재단도 만들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피해자 일가족들이 8명 사형수 가족들과 함께 돈을 모아 4·9평화통일재단을 만든 것. 인혁당 진실 규명을 위해 싸운 천주교인권위원회에도 일부 기부를 했다. 반통일·반평화·반인권 행위를 뿌리 뽑고자 다 같이 힘을 모았다.
77명의 피해자는 당연히 손해배상 대법원 판결이 나면 나머지 35%의 배상금도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원금은 인정했지만, 이자가 너무 많이 계산됐다며 30여 년 치 이자를 삭제해 판결했다. 이자 지급 기준일이 2심 변론 종결일로 바뀌면서 손해배상금은 280억 원가량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대법원이 내세운 근거는 사건이 벌어졌던 1974년으로부터 ‘장시간의 세월이 흘러 통화 가치의 변동이 생겼고, 이로 인해 예외적으로 지연 이자의 기산점을 변론 종결일부터 잡아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간의 세월’과 ‘통화 가치의 변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은 없었다. ‘장기간’, 또는 ‘상당한’이라는 추상적인 표현만 담겨 있을 뿐이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 그해 7월 국정원은 결국 77명에 대해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다. 가지급받은 491억여 원 중 대법원이 인정한 280억 원을 제외한 금액뿐 아니라, 심지어 대법원 판결 이후부터 현재까지 갚지 않은 기간에 대한 이자를 포함해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법원은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고, 피해자 가족들은 졸지에 국정원에 손해배상금 일부를 도로 돌려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
연 20%에 달하는 연체 이자율은 반환금을 눈덩이처럼 불려 나갔다. 강창덕의 경우, 2013년 10월 기준 8억3300만 원이었던 반환금은 2017년 6월 기준 13억 원을 넘겼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하루에 37만7700원이 이자로 붙었다. 법원의 명령에 따라 강창덕이 법원에 제출한 재산 목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월 30만 원짜리 월세방의 보증금 300만 원과 월 18만 원씩 지급되는 6·25 참전 보상금, 그나마 집에서 값이 나가는 에어컨과 침대가 적혀 있었다.
전창일과 이창복의 사정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창일의 딸 셋은 연 20%에 달하는 이자율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갚았다. 은행 이자가 국정원에 내야 할 이자보다 싸기 때문이다. 이창복의 집은 부동산 강제 경매에 부쳐질 예정이다. 작은 정원과 텃밭을 일구며 부인과 여생을 보내고자 마련한 집을 ‘채권자’ 국정원을 위해 압류한다며 법원이 통지를 해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가해자인 중앙정보부의 후신 국정원이 인혁당 피해자들의 채권자가 되었다.
“아버지 박정희는 몸을 고문하더니, 딸 박근혜는 경제적 고문을 하네요.”
인혁당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처 박정희가 물고문·전기고문하더니 박근혜가 ‘이자고문’ 하더라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우는 위장계열사’ 삼성임원 녹취록 나왔다 (0) | 2017.06.19 |
---|---|
기어코 박정희 우표 발행할 모양입니다 (0) | 2017.06.19 |
통신사들 “차라리 우릴 국유화해라” 적반하장 (0) | 2017.06.17 |
이명박근혜정권 9년 '대형게이트' 터질 조짐 보인다 (1) | 2017.06.16 |
서울대병원이 당황한 세가지 질문 (0) | 2017.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