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어떻게 인류의 본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나?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발행 : 2017-10-09 08:05:23 | 수정 : 2017-10-09 11:14:49
대학에서 경제학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화. 교수님께서 경제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균형(equilibrium)’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예를 들었다.
“우리 집에 딸이 둘이 있거든. 둘 다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엄청 좋아해. 그래서 내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가져가면 서로 더 먹겠다고 싸워요. 그래서 내가 게임을 제안했지.”
게임의 내용은 이렇다. 먼저 언니에게 칼을 쥐어준다. 대신 언니에게 “너 마음대로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나눠라. 단 조건이 있다. 케이크를 2등분 하는 건 네 마음인데, 뭘 먹을지 고르는 권한은 동생에게 먼저 준다”는 것이다.
언니의 머리에 온갖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케이크를 더 먹고 싶은 언니는 케이크를 이렇게도 쪼개보고 저렇게도 쪼개본다. 하지만 어떻게 쪼개도 손해다. 왜냐하면 더 크게 보이는 조각을 냉큼 동생이 채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 언니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케이크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이처럼 케이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균형이다. 그런데 이 설명을 듣던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대학 교수가 너무 쪼잔한 거 아닙니까? 애들이 그렇게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데, 그냥 두 개 사서 하나씩 나눠 먹이세요!”
아담 스미스 이후 자본주의 경제학은 시장의 존재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류가 탄생한 이래 늘 존재했고, 모든 것을 상품으로 사고파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온갖 이론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인간은 이기적이고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자. 인류 문명의 역사 7,000년 동안 인류는 도대체 언제 이기적이고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였었나? 인간이 언제부터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고 승리하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였느냐는 말이다.
반례를 들어보라면 수천, 수만 가지를 들 수 있다. 지난겨울 우리는 매주 토요일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다. 우리가 진짜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면 무슨 경제적 이익이 있다고 모금함에 돈까지 집어넣으면서까지 주말을 헌납하고 함께 싸웠을까?
역사를 살펴봐도 인류는 개인의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파편적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며 사회를 지키려 했던 존재였다. 인류 삶의 토대는 이기적 개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얽혀 모여 사는 사회의 공존이었다는 이야기다.
경제학 교수님이야 딸들에게 ‘균형’을 가르치고 싶어서 케이크를 둘로 쪼개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자녀를 위해 케이크를 충분히 사서 오순도순 나눠먹는 게 인류의 본성에 더 가깝지 않은가? 가정도 하나의 사회고 그곳에도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에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와 교환이 인류의 본성이라고?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인류의 본질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영국 자본주의 형성기를 깊이 연구한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단언한다. “자유방임 시장경제는 인류 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이 창출한 계획의 산물이다”라고 말이다.
특히 폴라니는 시장이 자기조정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황당한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폴라니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인류 본성과 한참 거리가 먼 시장이라는 착취의 제도를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다. 시장 자본주의는 사회를 맷돌처럼 통째로 갈아 인간의 본성을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것도 처참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시장 자본주의의 숭배자들이 떠드는 대로 시장에 자기조정 기능이 있기만 하다면 그런대로 자본주의를 봐줄만 하다고 칠 수도 있다(물론 그래도 자본주의는 전혀 봐줄만 하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런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란 건 완전한 기만임이 수차례 증명됐다. 자기조정 기능이 있다면서 왜 완전고용은 늘 요원한 꿈이 된 걸까? 자기조정 기능이 있다면서 1930년 대공황은 왜 벌어졌고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왜 생긴 것일까? 가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짜잔~! 하고 조절된다는 주장은 인류 경제 역사의 기본만 알아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시장은 자기조정 기능이 충분치 않다. 따라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두면 경제가 망가지는 것은 자명하다. 이 와중에 시장은 인간의 본성까지 맷돌에 갈아버린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공유하는 인류 본성의 ‘사회’는 씨가 말라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고 경쟁하는 개인만 부각된다.
폴라니는 인류가 7000년 간 유지해온 사회를 말살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를 복원코자 하는 반발적 운동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하고, 공동체를 복원코자 하는 이 운동을 폴라니는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이 이중운동이 꼭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때로는 이 이중운동이 사회의 공동체성을 복원하는 바람직한 시도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붕괴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폭력적으로 복구하려는 시도(예를 들어 나치즘이나 파시즘)로 연결되기도 한다.
지난해 미국 대선은 이중운동의 양면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좋은 예다. 낙수효과가 경제적 번영을 안겨줄 거라던 신자유주의의 거짓 선전이 종말에 이르자, 미국 민중들의 절반은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시장의 폭압에 맞서자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이중운동의 바람직한 사례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코자 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이중운동의 부정적 사례다.
그래서 우리는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에 맞설 때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를 복원하고, 공동체를 빛나게 하며, 연대와 협동이 넘치도록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자본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든 것을 시장 아래 두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시장을 우리가 사는 사회 아래에 두고 인간을 보호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을 맷돌에 갈아버리는 이 악마적 자본주의에 맞서 공동의 사회를 재건하자는 칼 폴라니의 제안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출처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류의 본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나? _ 칼 폴라니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발행 : 2017-10-09 08:05:23 | 수정 : 2017-10-09 11:14:49
대학에서 경제학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화. 교수님께서 경제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균형(equilibrium)’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예를 들었다.
“우리 집에 딸이 둘이 있거든. 둘 다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엄청 좋아해. 그래서 내가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가져가면 서로 더 먹겠다고 싸워요. 그래서 내가 게임을 제안했지.”
게임의 내용은 이렇다. 먼저 언니에게 칼을 쥐어준다. 대신 언니에게 “너 마음대로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나눠라. 단 조건이 있다. 케이크를 2등분 하는 건 네 마음인데, 뭘 먹을지 고르는 권한은 동생에게 먼저 준다”는 것이다.
언니의 머리에 온갖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케이크를 더 먹고 싶은 언니는 케이크를 이렇게도 쪼개보고 저렇게도 쪼개본다. 하지만 어떻게 쪼개도 손해다. 왜냐하면 더 크게 보이는 조각을 냉큼 동생이 채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 언니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케이크를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이처럼 케이크를 정확히 반으로 나누는 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균형이다. 그런데 이 설명을 듣던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대학 교수가 너무 쪼잔한 거 아닙니까? 애들이 그렇게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데, 그냥 두 개 사서 하나씩 나눠 먹이세요!”
인간의 본성을 갈아 마신 악마의 맷돌
아담 스미스 이후 자본주의 경제학은 시장의 존재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류가 탄생한 이래 늘 존재했고, 모든 것을 상품으로 사고파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온갖 이론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인간은 이기적이고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자. 인류 문명의 역사 7,000년 동안 인류는 도대체 언제 이기적이고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였었나? 인간이 언제부터 경쟁을 통해 남을 짓밟고 승리하려는 본성을 가진 존재였느냐는 말이다.
반례를 들어보라면 수천, 수만 가지를 들 수 있다. 지난겨울 우리는 매주 토요일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다. 우리가 진짜로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면 무슨 경제적 이익이 있다고 모금함에 돈까지 집어넣으면서까지 주말을 헌납하고 함께 싸웠을까?
역사를 살펴봐도 인류는 개인의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파편적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며 사회를 지키려 했던 존재였다. 인류 삶의 토대는 이기적 개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 얽혀 모여 사는 사회의 공존이었다는 이야기다.
경제학 교수님이야 딸들에게 ‘균형’을 가르치고 싶어서 케이크를 둘로 쪼개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자녀를 위해 케이크를 충분히 사서 오순도순 나눠먹는 게 인류의 본성에 더 가깝지 않은가? 가정도 하나의 사회고 그곳에도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에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경제와 교환이 인류의 본성이라고?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인류의 본질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영국 자본주의 형성기를 깊이 연구한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단언한다. “자유방임 시장경제는 인류 본능에 따른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이 창출한 계획의 산물이다”라고 말이다.
▲ 칼 폴라니 ⓒ기타
시장을 무한 예찬하는 자본가들은 “시장은 너무나 위대하고 인간의 본성에 잘 맞아서 정부가 시장에 절대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하지만 폴라니는 인간의 노동력까지 사고파는 이 저급한 시장경제가 서로 돕고 사는 인간 사회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고 통박했다.특히 폴라니는 시장이 자기조정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황당한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폴라니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인류 본성과 한참 거리가 먼 시장이라는 착취의 제도를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다. 시장 자본주의는 사회를 맷돌처럼 통째로 갈아 인간의 본성을 가루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장이 아니라 ‘사회’를 복원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을 맷돌로 갈아버리는 것도 처참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시장 자본주의의 숭배자들이 떠드는 대로 시장에 자기조정 기능이 있기만 하다면 그런대로 자본주의를 봐줄만 하다고 칠 수도 있다(물론 그래도 자본주의는 전혀 봐줄만 하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런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란 건 완전한 기만임이 수차례 증명됐다. 자기조정 기능이 있다면서 왜 완전고용은 늘 요원한 꿈이 된 걸까? 자기조정 기능이 있다면서 1930년 대공황은 왜 벌어졌고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왜 생긴 것일까? 가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수요와 공급이 짜잔~! 하고 조절된다는 주장은 인류 경제 역사의 기본만 알아도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시장은 자기조정 기능이 충분치 않다. 따라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두면 경제가 망가지는 것은 자명하다. 이 와중에 시장은 인간의 본성까지 맷돌에 갈아버린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공유하는 인류 본성의 ‘사회’는 씨가 말라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고 경쟁하는 개인만 부각된다.
폴라니는 인류가 7000년 간 유지해온 사회를 말살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를 복원코자 하는 반발적 운동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저항하고, 공동체를 복원코자 하는 이 운동을 폴라니는 이중운동(double movement)이라고 불렀다.
문제는 이 이중운동이 꼭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때로는 이 이중운동이 사회의 공동체성을 복원하는 바람직한 시도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붕괴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폭력적으로 복구하려는 시도(예를 들어 나치즘이나 파시즘)로 연결되기도 한다.
지난해 미국 대선은 이중운동의 양면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좋은 예다. 낙수효과가 경제적 번영을 안겨줄 거라던 신자유주의의 거짓 선전이 종말에 이르자, 미국 민중들의 절반은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시장의 폭압에 맞서자고 주장했던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이중운동의 바람직한 사례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코자 했던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이중운동의 부정적 사례다.
그래서 우리는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에 맞설 때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를 복원하고, 공동체를 빛나게 하며, 연대와 협동이 넘치도록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
자본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든 것을 시장 아래 두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시장을 우리가 사는 사회 아래에 두고 인간을 보호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을 맷돌에 갈아버리는 이 악마적 자본주의에 맞서 공동의 사회를 재건하자는 칼 폴라니의 제안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
188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급진적 사고를 가진 ‘클럽 갈릴레이’를 만들어 활동했는데 이 클럽에는 게오르크 루카치 같은 위대한 사상가도 참여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에 파시즘의 기운이 감돌자 폴라니는 런던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 폴라니는 영국 자본주의 처참한 참상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폴라니는 영국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통찰과 비판을 담은 『거대한 전환』을 1944년 출간했다. 『거대한 전환』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후 자본주의에 관해 가장 심도 깊은 분석과 비판을 가한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류의 본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나? _ 칼 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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