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그는 어떻게 비도덕의 끝판왕이 됐나?
이건희의 취임 30주년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발행 : 2017-12-04 08:54:41 | 수정 : 2017-12-04 17:53:03
전 세계 경영의 역사를 돌아봐도 이토록 비도덕적인 경영자가 이토록 오랫동안 글로벌 기업을 경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재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르면 이 정도 비도덕적 경영자는 주주총회장에서 쫓겨나도 한참 전에 쫓겨났어야 했다.
지난 1일, 이건희가 삼성그룹 총수에 취임한지 30주년을 맞았다. 삼성은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이후 처음으로 그룹 차원의 행사를 열었다. 삼성의 전 계열사에서 이건희의 취임 30주년 특별 제작 영상을 방송한 것이다.
그에 맞춰 언론들도 이건희의 취임 30주년을 기념해 그의 업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그가 어떤 경영자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서 말하는 ‘이건희 용비어천가’는 합당한 사실일까? 무릇 한 경영자에 대한 평가는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종합’에는 당연히 경영자로서 가져야 할 도덕성이 포함된다.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허지만 우리는 이건희라는 인물이 한국 사회에 남긴 비도덕성을 잊지 못한다. 단언컨대 그는 21세기를 주도했던 글로벌 기업 경영자 가운데 ‘비도덕의 끝판왕’이라 불릴만한 인물이었다.
자동차 마니아로 알려진 이건희는 삼성그룹 회장에 오른지 한 달 만에 “승용차 사업 진출 방안을 수립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삼성자동차는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마무리됐다.
1995년 김영삼으로부터 사업 승인을 받은 삼성은 거칠게 자동차 사업 진출을 밀어붙였다. 상식을 넘어서는 막대한 투자가 이어졌고 부채는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4조 3000억 원까지 불어났다. 당연히 이 막대한 채무의 담보는 삼성의 우량 계열사들이 떠맡았다. 그리고 삼성자동차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물론 경영은 실패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건희가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국민들을 기만하는 사기극을 펼쳤다는데 있다. 이건희는 삼성자동차의 무리한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4조 원이 넘는 부채를 갚기 위해 사재를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건희가 내놓은 사재가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건희는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70만 원으로 계산해 400만 주의 가치를 2조 8000억 원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건희는 사재 출연을 발표하기 바로 직전 해,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고작 9000원에 아들 이재용(정확히는 이재용이 지배하던 에버랜드)에게 팔았다.
1995년 이건희가 베이징에서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발언을 했을 때 재계 일각에서는 황당하다는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시 이건희가 “삼성과 정부에 대해 밀월관계란 말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안티(anti, 적대적)’한 관계입니다. 자동차 허가도 부산시민이 반발하니까 내준 것뿐이지요”라고 말한 대목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삼성은 YS 시절 가장 잘 나갔던 재벌이었다. 자동차 진출이라는 숙원사업도 따냈다. 그런 삼성이 정부의 ‘안티’를 자처하니 실소가 터져 나온 것이다. 당연히 YS는 격노했고, 문민정부 시절 잘 나가던 삼성의 행보에 급제동이 걸렸다. “정치는 4류”라며 패기만만하게 외쳤던 이건희는 이 사건 이후 철저히 정치권력에 줄을 대는 방식으로 경영방식을 변화시켰다.
1997년 삼성이 제작한 내부 문건 <신수종 보고서>에는 삼성이 아예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삼성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고 통신사업에 진출한다’는 복안이 실려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아차가 겪었던 자금난이 삼성과 YS 정부의 합작품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삼성의 정경유착은 2005년 폭로된 X파일 사건에서 실체가 드러났다. 이건희의 복심으로 불렸던 삼성 2인자 이학수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과 만나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에게 줄을 댈 방안을 고민하고 실천했다.
홍석현이 브로커 노릇을 한 이 X파일 사건에 따르면 이건희는 1997년 9월 3일 “이 대표(이회창)가 어려울 텐데 도와드리라”고 지시했고. 이 지시는 일사천리로 이행됐다. 이건희의 지시에 따라 홍석현은 60 억 원을 이회창 캠프에 직접 전했다.
이건희의 비도덕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또 다른 사건은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었다. 막대한 미술품이 비자금 조성에 사용됐고, 떡값 로비의 실체도 드러났다. 중앙일보 위장 계열 분리, 서울통신기술의 편법 전환사채 발행,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배정 사건, e삼성의 변칙 지분 거래 등 세세한 사건까지 ‘삼성 비자금 사건’이라는 이름 아래 다뤄졌다. 삼성 비자금 사건은 대한민국 유사 이래 한 기업이 저지른 가장 종합적이고 광범위한 ‘비리와 편법의 백화점’ 같은 사건이었다.
당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건희가 삼성 임원들의 이름으로 관리한 비자금의 규모는 무려 4조 5000억 원이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비자금에 대해 특검은 철저한 봐주기 수사로 일관한 끝에 이건희를 불구속 기소했다.
이건희는 구속을 면하기 위해 경영쇄신안을 발표하고 “비자금을 나와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사회의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올해 10월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4조 5000억 원의 비자금은 사회의 유익한 일에 쓰이기는커녕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건희가 이 돈을 모조리 빼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4조 5000원의 자금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금까지 밝혀진 비자금의 사용 출처는 단 두 곳이다. 한 곳은 지난해 이건희가 성매매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 성매매의 장소로 추정되는 논현동 빌라 전세자금이었다. 다른 한 곳은 최근 경찰이 이건희 일가의 자택 인테리어 공사 비리를 추적하면서 밝혀진 사실인데 비자금 중 일부가 한남동 이건희 자택 공사에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는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졌다. 그래서 실제 그가 어떤 삶을 사는지 도무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삼성이 전하는 대로, 언론이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대로만 알려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김용철 변호사(<삼성을 생각한다>의 저자)에 따르면 이건희는 애초부터 도덕적 자질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영자였다. 김용철은 이건희 일가를 유럽 귀족 흉내를 몹시도 내고 싶어 했고, 생일잔치를 태연히 회사 돈으로 치루는 공사 구분이 안 되는 경영자로 묘사했다.
그러다보니 그 자식인 이재용 부회장조차 “비자금이나 차명계좌는 모든 기업이 공공연하게 갖고 있는 것인데 왜 삼성에 대해서만 문제 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짜증스러워 하는 인물로 자랐다. 비자금이 왜 잘못됐는지를 모르니, 당연히 정경유착을 통해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일도 뭐가 잘못됐는지를 모른다.
취임 30주년을 맞은 이건희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의 비도덕성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이 남지 않는다면, 우리 후손들은 그저 이건희에 대한 용비어천가만 들으며 왜곡된 평가를 주입받게 된다.
출처 이건희의 취임 30주년, 그는 어떻게 비도덕의 끝판왕이 됐나?
이건희의 취임 30주년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발행 : 2017-12-04 08:54:41 | 수정 : 2017-12-04 17:53:03
전 세계 경영의 역사를 돌아봐도 이토록 비도덕적인 경영자가 이토록 오랫동안 글로벌 기업을 경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재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르면 이 정도 비도덕적 경영자는 주주총회장에서 쫓겨나도 한참 전에 쫓겨났어야 했다.
지난 1일, 이건희가 삼성그룹 총수에 취임한지 30주년을 맞았다. 삼성은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이후 처음으로 그룹 차원의 행사를 열었다. 삼성의 전 계열사에서 이건희의 취임 30주년 특별 제작 영상을 방송한 것이다.
그에 맞춰 언론들도 이건희의 취임 30주년을 기념해 그의 업적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그가 어떤 경영자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언론에서 말하는 ‘이건희 용비어천가’는 합당한 사실일까? 무릇 한 경영자에 대한 평가는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종합’에는 당연히 경영자로서 가져야 할 도덕성이 포함된다.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허지만 우리는 이건희라는 인물이 한국 사회에 남긴 비도덕성을 잊지 못한다. 단언컨대 그는 21세기를 주도했던 글로벌 기업 경영자 가운데 ‘비도덕의 끝판왕’이라 불릴만한 인물이었다.
취미와 경영을 혼동했던 삼성자동차의 대실패
자동차 마니아로 알려진 이건희는 삼성그룹 회장에 오른지 한 달 만에 “승용차 사업 진출 방안을 수립하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삼성자동차는 결과적으로 대실패로 마무리됐다.
1995년 김영삼으로부터 사업 승인을 받은 삼성은 거칠게 자동차 사업 진출을 밀어붙였다. 상식을 넘어서는 막대한 투자가 이어졌고 부채는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4조 3000억 원까지 불어났다. 당연히 이 막대한 채무의 담보는 삼성의 우량 계열사들이 떠맡았다. 그리고 삼성자동차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물론 경영은 실패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건희가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국민들을 기만하는 사기극을 펼쳤다는데 있다. 이건희는 삼성자동차의 무리한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4조 원이 넘는 부채를 갚기 위해 사재를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건희가 내놓은 사재가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건희는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70만 원으로 계산해 400만 주의 가치를 2조 8000억 원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건희는 사재 출연을 발표하기 바로 직전 해,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고작 9000원에 아들 이재용(정확히는 이재용이 지배하던 에버랜드)에게 팔았다.
1년 전 아들에게는 9000원에 넘긴 주식을 1년 뒤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이 주식은 주당 70만 원이다”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가격 차이가 무려 80배에 이른다. 삼성자동차는 4조 원이 넘는 부채 중 대부분을 9000원짜리 주식을 70만 원으로 포장하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남은 부채 1조 원 가량은 모두 삼성 계열사들이 물었다. 이건희는 이후에도 한국 제1의 재벌 총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자동차 사업을 말아먹은 이건희는 그 책임을 그룹 전체와 한국사회가 나누어지게 하고 자신은 유유히 그 책임에서 벗어났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진원지
1995년 이건희가 베이징에서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발언을 했을 때 재계 일각에서는 황당하다는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시 이건희가 “삼성과 정부에 대해 밀월관계란 말도 있지만 사실은 가장 ‘안티(anti, 적대적)’한 관계입니다. 자동차 허가도 부산시민이 반발하니까 내준 것뿐이지요”라고 말한 대목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삼성은 YS 시절 가장 잘 나갔던 재벌이었다. 자동차 진출이라는 숙원사업도 따냈다. 그런 삼성이 정부의 ‘안티’를 자처하니 실소가 터져 나온 것이다. 당연히 YS는 격노했고, 문민정부 시절 잘 나가던 삼성의 행보에 급제동이 걸렸다. “정치는 4류”라며 패기만만하게 외쳤던 이건희는 이 사건 이후 철저히 정치권력에 줄을 대는 방식으로 경영방식을 변화시켰다.
▲ 삼성전자 이건희 홍라희 ⓒ뉴시스
1997년 삼성이 제작한 내부 문건 <신수종 보고서>에는 삼성이 아예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삼성이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고 통신사업에 진출한다’는 복안이 실려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기아차가 겪었던 자금난이 삼성과 YS 정부의 합작품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삼성의 정경유착은 2005년 폭로된 X파일 사건에서 실체가 드러났다. 이건희의 복심으로 불렸던 삼성 2인자 이학수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과 만나 당시 한나라당 후보였던 이회창에게 줄을 댈 방안을 고민하고 실천했다.
홍석현이 브로커 노릇을 한 이 X파일 사건에 따르면 이건희는 1997년 9월 3일 “이 대표(이회창)가 어려울 텐데 도와드리라”고 지시했고. 이 지시는 일사천리로 이행됐다. 이건희의 지시에 따라 홍석현은 60 억 원을 이회창 캠프에 직접 전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수사를 지휘한 서울중앙지금 2차장 황교안 검사에 의해 관련자 모두 무혐의로 마무리됐다. 이건희를 용서한 황교안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중앙일보>는 그해 연말 황교안을 ‘사회분야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는 희대의 개그를 벌였다.
사라진 비자금은 어디서 발견됐나?
이건희의 비도덕성이 극명하게 드러난 또 다른 사건은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었다. 막대한 미술품이 비자금 조성에 사용됐고, 떡값 로비의 실체도 드러났다. 중앙일보 위장 계열 분리, 서울통신기술의 편법 전환사채 발행,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배정 사건, e삼성의 변칙 지분 거래 등 세세한 사건까지 ‘삼성 비자금 사건’이라는 이름 아래 다뤄졌다. 삼성 비자금 사건은 대한민국 유사 이래 한 기업이 저지른 가장 종합적이고 광범위한 ‘비리와 편법의 백화점’ 같은 사건이었다.
당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건희가 삼성 임원들의 이름으로 관리한 비자금의 규모는 무려 4조 5000억 원이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비자금에 대해 특검은 철저한 봐주기 수사로 일관한 끝에 이건희를 불구속 기소했다.
이건희는 구속을 면하기 위해 경영쇄신안을 발표하고 “비자금을 나와 가족을 위해 쓰지 않고 사회의 유익한 일에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올해 10월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4조 5000억 원의 비자금은 사회의 유익한 일에 쓰이기는커녕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건희가 이 돈을 모조리 빼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4조 5000원의 자금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지금까지 밝혀진 비자금의 사용 출처는 단 두 곳이다. 한 곳은 지난해 이건희가 성매매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을 때, 성매매의 장소로 추정되는 논현동 빌라 전세자금이었다. 다른 한 곳은 최근 경찰이 이건희 일가의 자택 인테리어 공사 비리를 추적하면서 밝혀진 사실인데 비자금 중 일부가 한남동 이건희 자택 공사에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4조 5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그것이 적발되자 사회에 환원하기로 약속한 다음, 이건희는 태연히 그 돈을 성매매나 자택 인테리어 공사에 사용했다. 이건희는 사회 환원 약속 등을 통해 비자금 사건 때 집행유예 5년으로 실형을 피했다. 그리고 딱 4개월 뒤에 이명박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 이명박과 이건희 ⓒ청와대
3대로 이어진 비도덕 경영
이건희는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졌다. 그래서 실제 그가 어떤 삶을 사는지 도무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삼성이 전하는 대로, 언론이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대로만 알려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김용철 변호사(<삼성을 생각한다>의 저자)에 따르면 이건희는 애초부터 도덕적 자질을 완전히 무시하는 경영자였다. 김용철은 이건희 일가를 유럽 귀족 흉내를 몹시도 내고 싶어 했고, 생일잔치를 태연히 회사 돈으로 치루는 공사 구분이 안 되는 경영자로 묘사했다.
그러다보니 그 자식인 이재용 부회장조차 “비자금이나 차명계좌는 모든 기업이 공공연하게 갖고 있는 것인데 왜 삼성에 대해서만 문제 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짜증스러워 하는 인물로 자랐다. 비자금이 왜 잘못됐는지를 모르니, 당연히 정경유착을 통해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일도 뭐가 잘못됐는지를 모른다.
취임 30주년을 맞은 이건희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과제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그의 비도덕성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이 남지 않는다면, 우리 후손들은 그저 이건희에 대한 용비어천가만 들으며 왜곡된 평가를 주입받게 된다.
그가 남긴 엽기적 비도덕성은 과연 한 사회가 기꺼이 용납할만한 일일까? 이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있어야 한국의 미래에 도덕성이라는 굳건한 잣대를 세울 수 있다. 그리고 매우 우스운 사실이지만 이건희 스스로가 1987년 12월 1일 취임 때 남긴 일성은 “도덕 경영을 제일의 가치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출처 이건희의 취임 30주년, 그는 어떻게 비도덕의 끝판왕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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