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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이명박의 우리 말법과 나경원의 영어 말법

이명박의 우리 말법과 나경원의 영어 말법
‘주어가 없다’는 말에 대하여
[오마이뉴스] 김찬곤 | 18.02.05 17:19 | 최종 업데이트 18.02.13 17:51


나경원, 주어가 없다!


'주어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2007년 나경원 의원이 이명박 후보 캠프 대변인 시절 했던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확히 따지면, '주어가 없다'는 말은 나경원 의원이 한 말은 아니고, 나경원 의원의 말을 보도한 뉴스 기사의 '워딩'이다. 나경원 의원이 한 말을 아래에 그대로 받아 적어 본다.

"신당과 이회창 후보 측은 더 이상 이명박 후보의 말뜻을 왜곡하고 호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을, 비비케이가 설립했다, 설립하였다라는 표현만 있을 뿐인데, '내가 설립하였다'라고 광고하는 것은, 역시 그 뜻을 왜곡하는 허위 광고입니다."
— 2007년 12월 17일

신당은 대통합민주신당이고, 후보는 정동영이다. 이회창은 무소속으로 나왔다. 여기서 나 의원은 '내가' 설립했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비비케이는 이명박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기자들이, 나 의원이 '(이명박의 말에는)주어가 없다' 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지금 검찰은 이명박과 관련하여 DAS의 진짜 주인을 찾고 있다. DAS는 자동차 시트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회사이고, 'Driving And Safe'의 줄임말이다. BBK가 무엇의 약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B(Bobby·김경준의 친구 오영석의 미국 이름), B(Bora·김경준의 부인 이보라), K(Kyungjoon·김경준)에서 딴 것으로 본다. 실제로 이 세 사람은 BBK 설립 당시 이사였다. 또 하나는 이명박(B), 김백(B)준, 김(K)경준에서 딴 것으로 보고 있다. BBK 사건의 핵심은 이 회사가 옵셔널벤처스 사의 주식 값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가 조작으로 5252명이 피해를 보았고, 피해액만 1000억 원 가까이 된다는 점이다.

나 의원의 브리핑 하루 전날 대통합민주신당은 동영상 하나를 공개한다. 대통령 선거 투표 3일 전이었다. 2000년 10월 17일 이명박이 서울 광운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특강에서 자신이 그해 1월 투자전문회사 BBK를 차렸다고 자랑하는 동영상이다. 이 동영상에서 그 부분만 받아 적어 본다.

"저는 요즘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인터넷 금융회사를 창립을 했습니다. 해서 금년 1월 달에 비비케이(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 이제 그 투자자문회사가 필요한 업무를 위해서 사이버 증권회사를 설립을 하기로 생각을 해서 지금 정부에다 제출해서 이제 며칠 전에 예비허가 나왔습니다. (중략) 물론 비비케이라는 투자자문회사는 금년에 시작했지만 이미 9월 말로 28.8% 이익이 났습니다."

'사이버 증권회사'는 이명박과 김경준이 같이 세운 BBK의 지주회사 'Lke뱅크'를 말한다.


BBK의 주가 조작 사건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 측이 제기한 사건이고, 이명박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잡아뗀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만에 하나라도 제가 책임이 있다면 대통령이 되어서라도 책임지겠다는 이야기를 한 바가 있습니다."
— 2007년 11월 19일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

"언제든 책임을 지겠다."
— 2007년 11월 21일 KBS 질문 있습니다

"저는 비비케이 관련해서는 대통령에 당선이 되어도 직무를 수행하다가도 비비케이 주가 조작에 제가 관여했다면 책임을 지겠다는 무한책임을 제가 약속했습니다."
— 2007년 11월 30일 여성정책 토론회

그런데 이 모든 말을 무색하게 하는 광운대 동영상이 나와 버린 것이다.


이명박의 우리 말법과 나경원의 영어 말법

나경원은 아주 황당한 말을 한다. 이명박이 한 말, "금년 1월 달에 비비케이(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을 하고"에서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이 말을 '주어가 없다'는 말로 보도했다. 투표를 불과 사흘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글자가 없이 수천 년 동안 입말(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해 왔기 때문에 말과 글의 '현장성' 또는 '상호성'이 아주 발달했다. 또 '하였다' 하지 않고 '했다' 하거나 '수건을 가져와!' 하지 않고 '수건 가져와!' 하는 것처럼 '준말'이 발달했고 조사('을')를 아주 생략해 버린다. 이것은 우리말의 '경제성'이라 할 수 있다. 또 주고받는 말 속에서 문맥을 알아듣기 때문에 시제도 3시제(과거·현재·미래)로 단순하다. 그래서 옛이야기에서는 완료시제 '었었'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현장성(상호성)과 경제성은 우리말의 가장 큰 장점이다. "(너는) 휴가 다녀왔니?", "응. (나는) 부산(에) 갔다 왔어." 같은 말에서 주어 '너는'이나 '나는'을 쓰지 않아도 말하는 이와 듣는 이는 바로 알아듣는다. 그런데 서양 말은 청자와 화자가 현장에서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주어나 전치사('에')를 반드시 써야 한다.

주어와 관련하여 우리말의 특징은 '주체가 바뀔 때에만 밝히어' 적는다는 점이다. 맨 처음에 주체를 밝히고, 그 뒤로도 행위의 주체가 같으면 주어를 안 써도 된다. 그러다 행위의 주체가 바뀔 때 비로소 새 주어를 쓰는 것이다. 이것은 아래 보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옛날에 시골 어느 산골 마을에 가서 한 선비가 사는디. 아주 가난한 선비여. 그런디 ( ) 글은 많이 읽었거든. ( ) 글을 많이 읽었는디 살림이 원청 가난하닝게 조반석도 다 못하고 하리 죽 한 끼니두 먹구, 하리 넘어 가구 잘 먹으면 두어 끼니 먹으믄 잘 먹었다. 그러구 ( ) 그렇게 살어. 그런데 그 선비 친구 한 분이 찾아왔어. ( ) 와서 얘기를 허는디. (중략) 그런 얘기를 듣고 그 친구가 간 뒤에 ( ) 가만히 한 번 생각을 해 봤거든.

주어가 자주 빠지면 뜻이 덜 분명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말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 깔끔해진다. 편집자 시절 한 작가가 문장마다 주어를 알뜰히 써 왔기에 앞에 한번 썼으면 뒤 문장에는 안 써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독자는 그 행위를 누가 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하면 틀리는 것 아니냐고, 문장 속에는 주어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영어 말법에 익숙해 있었다. 나경원이 '주어가 없다'고 했던 것은 그 또한 영어 말법에 따른 것이다. 나경원의 말에 따르면 "영희가 시장에 갔다. 가서 콩나물도 사고 두부도 샀다. 그리고 집에 왔다." 이 문장을 이렇게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영희가 시장에 갔다. 시장에 가서 영희는 콩나물도 사고 두부도 샀다. 그리고 영희는 집에 왔다." 이렇게 써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영희가' 걸리적거리는가.

결론은 이렇다. 이명박은 우리 말법으로 말했고, 나경원은 그 말을 영어 말법으로 풀이했다. 그렇다면 왜 어문학계에서는 그 뒤로 이것을 지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우리 국어문법학계에서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인 현장성과 경제성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이다.


출처  이명박의 우리 말법과 나경원의 영어 말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