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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제법 공백 20년 방치…이건희 수조원 은닉재산에 탈출구

실명제법 공백 20년 방치…이건희 수조 원 은닉재산에 탈출구
입법미비·엉터리 법해석
1997년 이후 개설된 차명계좌에
징벌적 과징금 징수 근거 못만들어
‘과세대상 아니다’ 법해석 잘못
2008년 이후 이자·배당에만 과세
이건희 내야할 세금 기껏해야 200억
쥐꼬리 과징금 징수도 산넘어 산
금융기관서 원천징수해 납부 방식
차명계좌 대부분 인출해 깡통 많아
실명제법 개정도 소급 논란 등 험난

[한겨레] 김경락 기자 | 등록 : 2018-03-05 19:30 | 수정 : 2018-03-05 21:34



2008년 삼성 특검 등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이건희(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는 모두 1500여 개에 이른다. 특검과 금융감독원이 적발한 1229개에다 2011년 삼성 쪽이 자진하여 신고한 260개를 포함한 숫자다. 하지만 차명계좌에 대한 과징금 부과 등 금융실명법에 따른 징벌적 조처는 10년이 지난 2017년에 와서야 논의가 촉발됐다. 결과적으로 이건희가 뒤늦게 물게 될 과징금과 세금은 300억 원을 밑돌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의 소극적 법리 해석과 제도적 구멍이 가져온 결과다.


이건희 회장이 내야 할 과징금·세금 규모는?

이건희의 차명재산은 2007년 말 기준 4조4천억인데, 이 가운데 금융실명법상 규제 대상인 차명계좌에 든 재산은 2조1646억 원이다. 나머지 2조3천억 원에 해당하는 삼성생명 주식은 차명계좌가 아닌 주식 증서 형태로 개인 금고에 보관해왔기 때문에 과징금이나 세금 부과 대상이 아니다.

5일 금융감독원이 밝힌 검사 결과에 따르면, 이건희가 내야 할 과징금은 30억9천만 원 수준이다. 금감원은 삼성증권 계좌에 대해 검사를 1주일 더 연장한다고 밝혔지만, 금액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렇게 과징금 부과액이 미미한 것은 현행법이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도입 이전에 개설된 계좌에 대해서만 과징금 부과 근거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1993년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시행된 금융실명제가 1997년 법제화될 때, 1993년 이후 만들어진 차명계좌에도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을 만들지 못한 데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금융당국이 구멍 난 법을 20년 넘게 방치한 탓에 쥐꼬리 과징금만 부과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건희가 추가로 물어야 할 세금도 200억 원 안팎에 그칠 전망이다. 금융실명법은 차명계좌에서 발생한 이자와 배당소득을 사실상 전액(지방세 포함 99% 세율) 몰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소극적 유권해석을 고수하다가 지난해 하반기에 와서야 뒤늦게 과세 절차에 착수하면서, 실제 물어야 할 세금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08년 이후 발생한 배당·이자소득에 대해서만 과세하기로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다. 현행 국세기본법은 세금을 매겨야 할 때로부터 10년이 지나면 과세를 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

이건희가 2008년 말과 2009년 초에 차명계좌에서 돈을 찾아갔다는 점과 차명계좌에 든 자산 상당 부분이 삼성전자 주식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과될 세금은 200억 원이 채 안 될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전자가 2008년 주주들에게 지급한 총배당금은 약 1조 원이며, 이 기간에 이건희의 차명주식에 지급된 배당금은 150억 원 정도에 그친다.

그나마 쥐꼬리 과징금과 세금을 걷는 일도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과징금이나 세금은 금융회사가 원친 징수해 과세당국에 내야 하는데, 이건희 차명계좌는 이미 돈을 다 빼가고 계좌 대부분을 해지한 터라 원천징수를 할 수 있는 계좌 자체가 사라진 상태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도 과징금 부과 절차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정부는 금융회사가 먼저 과징금과 세금을 낸 뒤 이건희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지만 금융회사들이 난색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제도개선 과제는?

금융위는 이날 ‘금융실명제 제도개선 추진 방향’을 밝히며, 앞으로 규제 대상을 확대하고 제재 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과징금 산정 시점과 부과비율 등을 현실화하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탈법 목적으로 개설된 차명계좌에 대해서도 과징금을 물릴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수사기관·과세당국·금융당국 간 차명 금융거래 정보 공유를 위한 근거 신설 △금융회사에 의한 원천징수 외에 과세당국이 과징금을 직접 부과할 수 있는 근거 규정 마련 △검찰수사 등으로 밝혀진 탈법 목적 차명 금융자산에 대한 지급정지 조처 신설 등을 추진하겠다는 것이 뼈대다.

이는 현행법의 공백을 메우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건희 차명계좌에 대한 소급 적용은 어려울 전망이다. 금융위는 금융실명제 이후에 개설된 탈법목적 차명계좌에 대해서도 과징금을 물리는 방안을 모색하면서도, 과징금 산정 시점이나 부과비율 등의 기준에 대해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김 부위원장은 “구체적인 내용은 국회 논의 과정을 거쳐야 확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관계자는 “(이 회장 차명계좌를 포함해) 1993년 이후 개설된 차명계좌 가운데 새로 적발된 때에만 과징금을 부과하는 쪽으로 법 개정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출처  실명제법 공백 20년 방치…이건희 수조원 은닉재산에 탈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