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줍다 총탄에 쓰러진 11살 소년…처벌받은 이는 없었다
마을서 놀다 변 당한 전재수군
멱감다 총맞은 12살 방광범군
계엄군, 자위권 빙자한 무차별 학살
18명 죽음에만 전두환 살인죄 인정
147명 죽음은 아무도 책임 안져
암매장·집단성폭행 등도 규명돼야
[한겨레] 정대하 안관옥 기자 | 등록 : 2018-05-15 05:03 | 수정 : 2018-05-15 09:25
총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흩어졌다. 한 아이의 검정 고무신이 벗겨졌다. 뒤돌아 고무신을 줍는 순간, 총탄이 쏟아졌다. 11살 전재수(1969년생) 군은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 50분 광주시 남구 효덕초등학교 부근 마을에서 놀다가 변을 당했다. 11공수특전여단 계엄군들은 시민군과 총격전을 하다가 민간인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다. 비슷한 시간 진월동 원제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방광범(1967년생) 군도 총을 맞고 숨졌다.
공수부대원들은 보복살해도 서슴지 않았다. 12·12 및 5·18 재판 1심 판결문을 보면, 5월 24일 1시 55분께 광주 남구 송암공단 앞 도로를 거쳐 외곽으로 빠지려던 11공수여단 부대에 수류탄 포격이 쏟아졌다. 산에 매복 중이던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군인들이 무장시위대로 오인하고 공격한 것이다. 군인들 간 오인 사격으로 63대대 9명이 죽고 33명이 다쳤다. 11공수 부대원들은 군화를 신은 채 민가에 들어가 권근립(25) 씨 등 청년 3명과 주민 1명을 즉결처분했다.
즉결처분 사례는 또 있다. 5월 23일 광주시 동구 주남마을 앞 도로에서 발생한 미니버스 총격 사건으로 18명 중 15명이 총격으로 즉사했다. 생존자 3명은 산으로 끌려갔고, 양민석(20) 씨 등 2명은 계엄군들이 총을 쏴 살해했다. 이들의 주검은 임시매장됐다가 6월 2일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 5·18 연구자인 안길정 박사는 “계엄군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발포한 것은 자위권을 빙자한 학살극”이라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 38돌을 맞지만 대낮에 대한민국 군인의 총을 맞고 숨진 11살 소년의 죽음을 책임진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1997년 열린 12·12 및 5·18 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죄로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은 전두환(보안사령관)·이희성(계엄사령관)·주영복(국방부 장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5명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들이 5월 21일 저녁 8시 30분 계엄사령부에서 자위권 행사를 지시한 뒤 계엄군들이 5월 21~24일 26명(7건)을 총으로 쏴 살해한 범죄 행위와 관련한 내란목적살인죄엔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두 전직 대통령과 군 지휘자들에 대한 최종판결을 내리면서 18명 죽음에 대해서만 내란목적살인죄를 인정했다. 1980년 5월 18~27일 사망한 165명 중 147명의 죽음은 내란죄의 폭동 행위로만 판단했다.
공수부대 군인들과 계엄군 수사관의 성폭행·성고문도 처벌받지 않은 야만의 범죄다. 광주지검이 1996년 1월 6일 작성한 ㅇ 씨 진술서를 보면, 계엄군(공수부대) 3명이 자신을 포함해 3명을 성폭행했다고 고발했다. ㅇ 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검찰은 공수부대원들이 여성 3~4명을 군용화물차에 싣고 산으로 가 총을 들이댄 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을 수사하지 않고 덮었다.
처벌이 불완전했던 탓에 5·18 민주화운동 가치에 대한 왜곡 시도도 계속됐다. 전두환 씨는 지난해 4월 출간된 회고록에서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은 불철저한 역사 청산 때문이다. 5·18 연구자 이재의 씨는 “검찰 수사와 재판부 판결이 12·12 쿠데타의 불법성보다 5·18의 살상행위는 소홀하게 다뤄졌다”고 지적했다.
향후 꾸려질 5·18진상규명위원회는 민간인 학살뿐 아니라 발포 명령, 암매장, 여성 성폭력과 성고문 등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사실이나 새로 드러난 범죄를 철저하게 조사한 뒤 전두환 등 신군부 일당을 재기소할 수 있는지 법리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출처 고무신 줍다 총탄에 쓰러진 11살 소년…처벌받은 이는 없었다
마을서 놀다 변 당한 전재수군
멱감다 총맞은 12살 방광범군
계엄군, 자위권 빙자한 무차별 학살
18명 죽음에만 전두환 살인죄 인정
147명 죽음은 아무도 책임 안져
암매장·집단성폭행 등도 규명돼야
[한겨레] 정대하 안관옥 기자 | 등록 : 2018-05-15 05:03 | 수정 : 2018-05-15 09:25
▲ 14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유영봉안소는 고요했다. 1980년 5월 24일 공수부대 군인들의 무차별 총격에 희생된 전재수(11) 군 자리엔 무궁화 꽃을 그린 영정이 놓여 있다. 정대하 기자
총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흩어졌다. 한 아이의 검정 고무신이 벗겨졌다. 뒤돌아 고무신을 줍는 순간, 총탄이 쏟아졌다. 11살 전재수(1969년생) 군은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 50분 광주시 남구 효덕초등학교 부근 마을에서 놀다가 변을 당했다. 11공수특전여단 계엄군들은 시민군과 총격전을 하다가 민간인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다. 비슷한 시간 진월동 원제저수지에서 멱을 감던 방광범(1967년생) 군도 총을 맞고 숨졌다.
▲ 국립5·18민주묘지 안에 있는 전재수(11) 군의 묘지.
공수부대원들은 보복살해도 서슴지 않았다. 12·12 및 5·18 재판 1심 판결문을 보면, 5월 24일 1시 55분께 광주 남구 송암공단 앞 도로를 거쳐 외곽으로 빠지려던 11공수여단 부대에 수류탄 포격이 쏟아졌다. 산에 매복 중이던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군인들이 무장시위대로 오인하고 공격한 것이다. 군인들 간 오인 사격으로 63대대 9명이 죽고 33명이 다쳤다. 11공수 부대원들은 군화를 신은 채 민가에 들어가 권근립(25) 씨 등 청년 3명과 주민 1명을 즉결처분했다.
▲ 1980년 5월 24일 광주시 남구 진월동 원제저수지에 멱을 감다가 공수부대 군인들이 난사한 총을 맞고 숨진 방광범(13)군.
즉결처분 사례는 또 있다. 5월 23일 광주시 동구 주남마을 앞 도로에서 발생한 미니버스 총격 사건으로 18명 중 15명이 총격으로 즉사했다. 생존자 3명은 산으로 끌려갔고, 양민석(20) 씨 등 2명은 계엄군들이 총을 쏴 살해했다. 이들의 주검은 임시매장됐다가 6월 2일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 5·18 연구자인 안길정 박사는 “계엄군이 5·18 민주화운동 당시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무차별 발포한 것은 자위권을 빙자한 학살극”이라고 말했다.
▲ 방광범 군이 1980년 5월 24일 멱을 감다가 숨진 원제저수지. 정대하 기자
5·18 민주화운동 38돌을 맞지만 대낮에 대한민국 군인의 총을 맞고 숨진 11살 소년의 죽음을 책임진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1997년 열린 12·12 및 5·18 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죄로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은 전두환(보안사령관)·이희성(계엄사령관)·주영복(국방부 장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정호용(특전사령관) 등 5명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들이 5월 21일 저녁 8시 30분 계엄사령부에서 자위권 행사를 지시한 뒤 계엄군들이 5월 21~24일 26명(7건)을 총으로 쏴 살해한 범죄 행위와 관련한 내란목적살인죄엔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두 전직 대통령과 군 지휘자들에 대한 최종판결을 내리면서 18명 죽음에 대해서만 내란목적살인죄를 인정했다. 1980년 5월 18~27일 사망한 165명 중 147명의 죽음은 내란죄의 폭동 행위로만 판단했다.
▲ 1980년 5월 24일 공수부대원들의 보복살해로 즉결처분당한 권근립 씨.
공수부대 군인들과 계엄군 수사관의 성폭행·성고문도 처벌받지 않은 야만의 범죄다. 광주지검이 1996년 1월 6일 작성한 ㅇ 씨 진술서를 보면, 계엄군(공수부대) 3명이 자신을 포함해 3명을 성폭행했다고 고발했다. ㅇ 씨는 검찰 조사를 받으며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검찰은 공수부대원들이 여성 3~4명을 군용화물차에 싣고 산으로 가 총을 들이댄 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을 수사하지 않고 덮었다.
처벌이 불완전했던 탓에 5·18 민주화운동 가치에 대한 왜곡 시도도 계속됐다. 전두환 씨는 지난해 4월 출간된 회고록에서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은 불철저한 역사 청산 때문이다. 5·18 연구자 이재의 씨는 “검찰 수사와 재판부 판결이 12·12 쿠데타의 불법성보다 5·18의 살상행위는 소홀하게 다뤄졌다”고 지적했다.
향후 꾸려질 5·18진상규명위원회는 민간인 학살뿐 아니라 발포 명령, 암매장, 여성 성폭력과 성고문 등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사실이나 새로 드러난 범죄를 철저하게 조사한 뒤 전두환 등 신군부 일당을 재기소할 수 있는지 법리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출처 고무신 줍다 총탄에 쓰러진 11살 소년…처벌받은 이는 없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수단체 예산 지원·집회 동원 MB기무사가 ‘최초 기획자’였다 (0) | 2018.05.18 |
---|---|
“나는 박정희의 노예였다” 57년만에 드러난 끔찍한 진실 (0) | 2018.05.18 |
‘비리 볼륨’만 키운 대북 확성기 사업…무더기 기소 (0) | 2018.05.15 |
이재용 경영 승계, 바이오로직스 안에 있다 (0) | 2018.05.09 |
박근혜 정부, ‘네이버 상단 점령’ 작전 짰다 (0) | 2018.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