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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9년만에 드러난 쌍용차의 ‘노조 와해’ 비밀문서 100여건

9년만에 드러난 쌍용차의 ‘노조 와해’ 비밀문서 100여건
쌍용자동차 비밀문서가 말하는 것
파업 참가자 ‘내부 붕괴’시키고 공권력 투입 유도하고

[한겨레] 이문영 기자 | 등록 : 2018-08-04 09:42 | 수정 : 2018-08-04 13:40



▶ 쌍용자동차가 2009년 정리해고 때 파업 참가자 ‘내부 붕괴’를 유도하고 경찰·검찰·노동부 등 정부 부처와 공조를 모색한 정황들이 문서로 확인됐다. 파업 전후로 제기돼온 진압 공조 의혹들이 쌍용차 회사 측의 문서로 뒷받침되긴 처음이다. <한겨레>가 입수한 100여 건의 문건에선 ‘이명박의 정리해고 압박 → 노조와 파업 동력 와해 → 경찰 투입과 강경 진압 → 정부 자금 지원 → 기업노조 설립 및 금속노조 탈퇴’ 등으로 이어진 ‘쌍용차 사태’의 흐름이 각종 ‘계획’과 ‘방안’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 문서들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 경찰특공대가 조립공장 옥상을 폭력 진압한 날(파업 종료 하루 전인 2009년 8월 5일)로부터 정확히 아홉 해가 흘렀다. 그날 그 옥상에서 故 김주중씨는 특공대의 곤봉에 맞고 방패에 찍힌 뒤 체포(<한겨레> 6월 23일 치 12·13면)됐다.

9년을 꽉 채운 2018년 8월 5일은 진압 뒤 몸과 마음에 고통을 새기고 살아온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6월 30일 치 12면) 40일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시작된 해고노동자들의 대한문(서울 중구 세종대로) 농성은 8월 5일로 34일째가 된다. 지난 7월 12일 인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쌍용차 모기업(마힌드라 & 마힌드라) 회장과 만나 “해고자 복직에 관심”을 요청했으나 여전히 해결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를 조사해온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 발표(8월 중)를 앞두고 <한겨레>는 입수 문건들을 토대로 9년 전 ‘진상’의 퍼즐을 맞췄다. 문건들은 진상조사위원회에도 제출돼 있다. 위 사진은 2009년 7월 21일 경찰과 회사 쪽 직원들이 뒤섞여 파업 조합원들과 대치하는 장면. 글 이문영 기자, 사진 김명진 기자, 그래픽 이정윤 기자


3월 26일 이명박 지침

“Q: 이명박이 지난 수원 방문시 무슨 얘기를 했나?”

2009년 4월 9일 쌍용자동차가 답(A)이 준비된 질문(Q)을 던졌다. 3월 20일 처음 생성해 이날 마지막으로 저장한 문서 파일(‘경영 정상화 방안 설명 관련 Q & A’)에서였다. 회사가 “인적 구조조정을 고집”하는 논리를 문답으로 풀어낸 문건이었다. 쌍용차는 이 문건에서 정부 지원의 기본 원칙이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효율성을 높여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전제”라고 정리했다. 3월 26일 이명박의 발언(수원시 경기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열린 현장비상경제대책회의 및 자동차산업간담회)이 근거로 제시됐다. 대규모 정리해고와 이명박 요구의 상관관계를 문건은 자문하고 자답했다.

“A: (이명박 답변 요약) 이런 기업(쌍용차)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국고 낭비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면 해야 한다. 근로자들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회사의 미래는 없다. 살아남겠다는 강력한 의지와 노력을 보여야 정부가 지원할 수 있다.”

법원의 쌍용차 회생절차 개시 결정(2월 6일) 48일 뒤 나온 이명박의 ‘주문’이었다. 같은 날 작성된 보충자료(‘생산 부문 경영정상화 방안 보충자료’)는 ‘강력한 의지’로 화답했다.

“수술대에 오른 이상 암과 지방 덩어리 확실히 제거하여 굳건한 체력으로 시장 경쟁에 대비해야 함.”

4월 9일은 쌍용차가 ‘암’과 ‘지방 덩어리’ 2646명의 ‘제거’ 방침을 발표한 다음 날이었다. 전체 직원의 37%에 달하는 대규모 정리해고를 회사 측은 파업이 종료될 때까지 물러섬 없이 관철했다.

이명박의 ‘수원 발언’ 닷새 뒤(4월 1일) 쌍용차는 ‘노동조합 단체행동 세부 대응방안’란 문서를 임원회의에 올리며 ‘비상대책종합상황실’을 꾸린다.



진압 9년 만에 확인된 비밀 문건들


4월 1일 비상대책종합상황실 구성

문건 첫 장엔 상황실 조직도가 첨부됐다. ‘관리인’(법정관리 상태였던 당시 이유일·박영태 공동관리인 체제)을 정점에 두고 아래로 인사담당 상무(정)와 노사협력팀장(부)이 상황실을 책임졌다. ‘노사지원팀’(10명씩 5개 조)과 ‘전문채증팀’(5명씩 5개 조), ‘방어팀’(각 부문 전체 인원), ‘사설 경비대’(50명씩 6개 조)가 상무와 팀장 밑으로 편재됐다.

비상대책종합상황실은 노조의 정리해고 반대에 맞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조직이었다. “각 팀의 임무수행 결과와 각종 동향을 종합하여 보고”하고 “(노조의) 단체행동 정도에 따라 업무 분담 및 동원 수를 조정”했다. 첨부된 ‘종합상황실 일지 양식’은 보고 방법도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노조동향’과 ‘현장여론’ 등을 “육하원칙에 의거 작성하되 발언자 이름, 발언 내용을 구분하여 대화체 형식으로” 기록하고 “불법 행위자의 몸짓 및 욕설 등 행위 내용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도록 했다. 전문채증팀의 자격은 “신체 건강하고 행동이 민첩한 사람”과 “사진촬영 및 속기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법적 대응을 위한 자료 확보”와 “사전에 주요 인물 및 성향을 확인”하는 역할(문서 ‘전문채증팀 업무 분담’)을 부여받았다. “주인의식이 투철한 직원”이 자격 조건인 노사지원팀(10명씩 5개 조+팀장 5명+조장 5명)은 “협상단 보호”와 “현장 여론 조성” 역할을 수행했다. 방어팀(생산부문 150명+연구소 150명+구매부문 전체)은 부문별 시설을 방어했다. 문건은 늦어도 정리해고 안 발표 이틀 뒤인 4월 10일까지 팀별 구성(전문채증팀 4월 6일·노사지원팀과 방어팀 4월 10일)과 교육(임무 숙지 및 예행연습)을 끝내도록 못 박았다.

▲ 2009년 8월 3일 쌍용자동차 경비용역(등에 ‘시큐리티’가 적힌 검은 복장)과 경찰, 회사 쪽 직원들이 뒤섞여 파업 노동자들과 대치하고 있다. 평택/김명진 기자


수사·정부기관 공조 명시

상황실 책임자인 상무·팀장 오른쪽 옆으론 눈길을 잡는 기관들이 자리했다. ‘평택지방검찰청 공안담당검사’와 ‘평택경찰서 정보과’, ‘경인지방평택노동청 근로감독관’이 실명 없는 직함으로 유선번호와 함께 기재됐다. 한 자동차기업의 사내 비상기구에 수사·정부기관들까지 등장한 이 문서와 조직도는 이후 수차례 수정·보완되며 여러 버전의 파일로 재생산된다.

<한겨레>가 입수한 쌍용차의 내부 비밀문서들은 법정관리 신청(2009년 1월 9일)부터 파업 종료(8월 6일) 직후까지 어떤 전략과 체계 아래 정리해고가 추진·완수됐는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인력 구조조정 진행에 따라 생성·업데이트된 문서들 안에선 쌍용차가 정부·수사기관들과의 협업을 전제로 지휘 조직을 만든 뒤 파업 동력을 깨고 경찰 진압을 유도하는 과정들이 조직적으로 전개된다.

파일 ‘속성’에서 확인되는 작성일과 작성자는 문건들이 쌍용차 내부에서 생산됐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만든 이’에는 당시 쌍용차 관리직군 임직원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대부분 직급을 높여 지금도 재직 중이다. 파워포인트 문서들엔 쌍용차 로고와 마크도 박혀 있다. 분량으로는 1백여 건이 넘는다. 문서들의 내용과 생산 날짜, 실행 여부, 파업·구조조정 경과를 맞춰 보면 ‘그 잔혹했던 여름’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지형이 그려진다. 정리해고와 노조 와해를 전제조건으로 당시 정권(자동차 기업 구조조정)과 쌍용차(자금 지원)의 필요가 기묘하게 만난다.


10년 전부터 수정·보완

국가와의 공조 체계를 반영한 쌍용차의 종합상황실 조직도는 2009년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최소 10년간 다듬어졌다.

“직장폐쇄 후 출근 시 출입 저지를 위한 병력배치에 대하여 사전 협조를 구한다. 점거 농성 시 즉각적으로 공권력 행사가 가능토록 사전 협조한다. 직장폐쇄의 필요성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이해시킨다. 대외적으로 회사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도록 상호교류 한다. 지역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당사의 직장폐쇄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지역여론을 회사에 유리하도록 형성시킨다.”

3년 전인 2006년 8월 9일(상하이자동차 ‘먹튀’ 의혹 등에 따른 파업 이틀 전) 쌍용차 노사협력팀은 ‘노조 불법행위 관련 대응방안’ 파일을 만들었다. 문건은 “검찰·경찰, 노동부, 지역기관(시청 등)”을 상대로 한 “병력배치”와 “공권력 행사를 위한 사전 협조” 구축을 “업무분담”으로 할당했다. 문서에 첨부된 ‘종합상황실운영 조직도’엔 평택노동청 근로감독관과 평택경찰서 정보관 등의 실명과 연락처가 기재됐다. 1999년 5월 22일 처음 작성된 이 문건은 160차례의 수정을 거쳐 2006년 8월 9일 최종 저장됐다.

2009년 회사의 신속한 비상 체제 구성도 오랜 시간 구축해온 기본 틀이 있어 가능했다. ‘직장폐쇄 시행방안’ 문건도 이미 1999년에 작성·활용됐다. 사장이 담당해야 할 몫으로 “청와대, 노동부 장관, 검찰청장, 노동사무소장, 경찰서장”을 배정했다. 통상산업부 장관과 전경련도 ‘업무 대상’에 포함됐다. “중간에서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충분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일과 “직장폐쇄 시 언론의 역할이 회사에 유리하도록 형성시키며, 대조적으로 노동조합에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임무였다.

1999년의 문서들을 만든 직원은 2009년 비상대책종합상황실 조직도에 상황실장(부)으로 이름을 올렸다. 노조의 공장점거(5월 22일) 8일 전 인사노무담당은 2009년 버전의 ‘직장폐쇄 시행방안 검토’를 작성한다. 1999년에 틀을 짜고 2006년을 거치며 완성된 방안들이 2009년 그대로 재생된다. “협력업체가 노동조합 및 언론에 회사의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내용도 추가됐다.


회사 지휘부와 경찰 지휘부의 동거


파업 일주일 전 직장폐쇄안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2012년 6월 출간한 자서전(<조현오, 도전과 혁신>)에서 썼다.

“2009년 1월 30일 경기경찰청장에 부임한 직후 업무보고를 통해 조만간 쌍용차 노조가 공장을 불법점거 하리라는 판단을 하게 됐다. (…) 경비과에 경찰력 진입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가 노조의 공장점거를 예상했다고 밝힌 시점은 쌍용차의 법정관리 신청(1월 9일) 불과 20여 일 뒤였다. 법원의 기업회생절차 개시 결정(2월 6일)으로부터도 일주일 전이었다. 파산과 회생 사이에서 쌍용차의 운명조차 정해지지 않았을 때(노조 파업 4개월 전)부터 공장 진입계획을 짰다는 뜻이다.

2009년 쌍용차 회사 쪽의 노조 대응 문서들은 파업(5월 21일)은 물론 인력 구조조정안이 발표(4월 8일)되기 전부터 생산됐다. 비상대책종합상황실 구성안은 회사의 정리해고 발표 일주일 앞서 만들어졌다. 파업을 전제로 하는 ‘직장폐쇄 시행방안 검토’(5월 14일)도 파업 시작 일주일 전에 이미 작성됐다. “노동조합이 쟁의행위를 개시한 이후에만 직장폐쇄를 할 수 있다”는 법률 검토도 문건에 담겼다. 검경을 대상으로 “점거농성시 즉각적으로 공권력 행사가 가능하도록 사전협의”가 명시됐다.

이명박의 “강력한 구조조정” 주문(3월 26일)과 회사 쪽의 종합상황실 조직(4월 1일) 이후 쌍용차는 파업과 공장점거를 전제로 한 문서들을 집중적으로 생산한다. 상황실 구성 직후부터 노조 일일동향과 대의원 동향, 부문별 현장 여론 등이 ‘일일 모니터링’ 형태로 매일 보고됐다. “상무님 보고용”, “자금팀용” 등으로 용도를 특정하기도 했다. 4월 8일 정리해고 안 발표 당일엔 생산부분·품질본부·관리담당·연구소·구매본부를 5개 조의 ‘방어팀’으로 조직하는 ‘위기 대응조 편성(안)’을 만들어 대외비로 분류했다. 인적 구조조정 공표 이틀 뒤(4월 10일)엔 직원들 반응을 파악한 ‘자구책 발표에 따른 현장 여론’이 작성됐다. 대규모 정리해고에 따른 불만, 노조가 파업하면 참여하겠다는 의견 등이 부문별·팀별로 정리됐다.

4월 13일엔 ‘관리담당 대응방안’이 만들어졌다. 종합상황실과 연계한 관리 부문의 대응조직 구성안을 담았다. 이 문서에도 ‘대관청 업무계획’이 포함됐다. 평택지원·평택지검·평택경찰서를 상대로 “회사손실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와 “시설물 보호요청 및 공권력 행사 요청” 등을 하고, 평택경찰서·경기도청·평택시청·유관단체에 “종합상황실 운영상황”과 “긴급 정보”를 공유하는 역할을 지정했다. “핫라인 설치”를 통한 “긴밀한 협조체계 유지” 책임도 부여했다.


실행된 시나리오들

‘휴업실행계획’ 파일은 파업 하루 전인 5월 20일 최종 저장됐다.

문서 두 번째 페이지엔 ‘내부 단계별 시나리오’란 소제목이 붙었다. “공권력 행사 부분 확정”이 도장반·전산실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 및 시설물 보호 요청 등과 함께 1단계 업무로 잡혔다. 직장폐쇄 공고가 이뤄지는 3단계엔 “부문별 경찰 병력 안내자 별도 선정(부문별 3명)”이 적혀 있다. 실제 직장폐쇄는 11일 뒤 문서 끝에 첨부된 공고 양식에 날짜(5월 31일)와 시간(아침 8시 30분)을 박아 단행됐다.

경찰 병력 안내자 배정도 현실화했다. 경찰은 “6월 말부터 정보경찰이 공권력 행사 대책을 수립하면서 사측에 동원 중대별 안내요원 선정을 요구”(2009년 12월 경기지방경찰청 발간 <쌍용자동차사태 백서> 175쪽)했다. 쌍용차 문건 중엔 ‘안내양 현황’이란 엑셀 파일이 있다. 6월 30일 처음 저장됐다. 두 차례에 걸쳐 부서별로 모집한 100명의 안내 요원 이름이 휴대전화 번호와 함께 정리돼 있다.

경찰 대상의 “공권력 행사에 대한 제반 사항 업무(주요시설/위험물/안내/식별 등)”는 직장폐쇄 사전준비 단계로 지정(5월 21일 ‘직장폐쇄 실행계획’)됐다. 이 지원 업무들도 경찰의 진압 작전 과정에서 계획대로 이뤄졌다. 복잡한 구조의 공장 건물들 안엔 생산에 사용되는 위험물질들이 쌓여 있었다. 경찰은 “공장 내부 사정에 정통한 직원들과 접촉하면서 도면을 연구”(백서 175쪽)하며 진압 계획을 짜나갔다.

“(안내 요원을 제공받고 내부 도면을 같이 연구하면서) 공권력 행사가 임박했다는 의견을 전달하자… 공권력 행사로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는 소문이 사측 직원들 사이에 퍼지면서 잔뜩 고무되어 경찰과의 돈독한 신뢰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사측도 경찰에 최대한 협조해나가면서 사태 해결을 위한 힘을 모을 수 있었다.”(백서 175~176쪽)

당시 파업 현장에선 경찰과 회사 쪽 직원과 경비용역들이 한데 뭉쳐 노조와 대치하는 장면들이 자주 목격됐다. ‘합동작전’ 의혹이 제기됐다. 쌍용차는 공동관리인 2명과 생산부문장, 기획재무본부장, 연구소장, 인사노무담당 등 6명으로 ‘최고의사결정기구’를 구성(‘직장폐쇄 실행계획’)했다. 본관 5층에서 운영됐다. 7월 1일 “노사분규 현장에 전국 최초로”(백서 227쪽)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한 경찰은 같은 달 31일 쌍용차 본관 5층으로 지휘본부를 옮겼다. 회사의 최고의사결정기구와 경찰의 지휘본부가 같은 건물 같은 층에 동거하며 파업 진압을 공동 모색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 건물 1층에선 비상대책종합상황실이 가동되고 있었다.

2009년 법정관리~파업 종료 직후 쌍용차 정리해고 추진 전략 담은
비밀문서 1백여건 처음 입수·보도... 9년 만에 드러나는 그 여름의 진실

“강력한 구조조정 없인 지원 없다” 3월 26일 이명박 발언 뒤로
5일 만에 작성된 종합상황실 문건, 검경 등 수사·정부기관 공조 명시

‘암’, ‘지방덩어리’ 제거 조직적 전개... 안내조 배치하고 도면 연구하며
회사와 경찰 “돈독한 관계” 구축, 양쪽 지휘부 한 건물 같은 층 동거

공장 진입 시도로 진압 명분 제공 뒤 경찰력 공장 투입되며 초강경 진압
관리인 “민주노총 탈퇴 추진” 뒤 실행, 사쪽 “위기상황 대비 일반 규정일 뿐”



“내부 붕괴를 통한 사태 해결”


잔인한 민관 합동작전

“공권력 투입 예상 일자를 (…) 진압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심리적으로 압박”, “손배소 청구 인원 확대로 심리적 압박 증대”, “경찰 헬기 1시간 간격 순회비행으로 심리적 압박감 배가(야간에도 실시, 수면 방해)”….

7월 11일 오후 회사는 해고를 피한 직원들에게 파업 조합원들을 압박하는 “강경책”과 “진압책”과 “회유책”을 정리해 메일(당시 노조가 입수·폭로)로 보냈다. 쌍용차 비밀문건들에서 언급된 “공권력 행사”와 “손해배상소송” 등의 단어가 파업불참 직원들에게 ‘노하우’로 전수됐다. 회사가 할 수 없는 ‘경찰 헬기를 활용한 수면 방해’도 경찰-쌍용차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의심케 했다. 파업 조합원들에겐 “굉음을 내며 라이트를 비추는 헬기의 심야 비행에 잠 못 이루는 날들”(당시 파업 참가자 증언)이 계속됐다. 경찰도 “심야시간대를 선택하여 선회 비행 하면서 헬기 서치라이트를 이용”해 “노조원들을 비추는 등 실제 진입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고 백서에 썼다. “유례없이 긴 시간 공중에 떠” 있으면서 “노조원들에게 긴장감과 심리적 압박”(백서 204)을 가했다. 회사 메일엔 “수면가스를 살포한 후 파업자 수면 상태에서 진압”하는 방안까지 포함됐다. 노조는 “악랄한 민관 합동작전”이라고 비판했다. 회사 지침이 메일로 전파된 날 오전 경찰은 쌍용차 공장의 4개 출입문을 장악했다.

“파업이 장기화되고 노사 간 대화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지 않음에 따라 불법파업 중인 노조에 대한 대응수위를 높이기 위한 조치.”(백서 276쪽)

같은 날 재차 발송된 회사 메일들은 그날의 일들을 “711작전”이라고 불렀다. 확보된 출입문에 ‘방어조’로 투입될 명단들을 정리해 공지했다. 경찰의 진압 계획과 상호 역할분담까지 알렸다.

“주요 임무는 언론/정치인 출입을 막는 데 있음(금일 회사 내 출입문을 경찰이 막는 것을 시작으로 단계별 진입이 추진될 예정임). 경찰과 용역 경비가 함께 지키며 우리는 상기 업무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편 가르기”, “축출”

파업 하루 전(5월 20일) 쌍용차는 ‘희망퇴직 관련 설득 논리’를 문서로 만들었다. 직장폐쇄와 휴업조치의 장단점을 기술했다. “회사의 강력한 의지 표현으로 조합원들 심리적 위축”과 “선제적/방어적 직장폐쇄 선택 가능”을 각각의 장점으로 꼽았다. 두 조처의 마지막 단계는 모두 “공권력 행사”이었다. 세 번째 선택지로 문서는 “정상근무를 통한 편 가르기”를 제시했다. “희망퇴직 극대화”와 “회사 손실 최소화”를 장점으로, “옥쇄/전면파업 용이”를 단점으로 들었다.

점거파업의 장기화가 예상되면서 회사는 6월 11일 ‘구조조정대상자(976명) 대응방안’을 작성한다. 파업 동력을 무너뜨릴 구체적 전략들을 서술했다. 정리해고 인원 2646명 중 희망퇴직·분사자 1670명을 뺀 976명이 대상이었다. 문건 제작의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옥쇄파업 인원 대부분에 해당하는 구조조정 대상자(976명)를 옥쇄파업 거점에서 축출함으로써, 옥쇄파업 참여 인원의 내부 붕괴를 통한 현 사태의 해결.”

시행의 전제조건은 ‘회사의 명확한 입장 표명에 따른 여론 형성’이라고 했다. “대화와 타협은 더 이상 없다… 공권력이 투입될 것이다… 공권력 투입시 현 사태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가압류 신청 등)은 내부 인원에 있다….” 문건에서 제시한 방법들은 이후 그대로 시행됐다.

① “여론형성 방법: 전 관리자 및 옥쇄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조합원들이 한 목소리로 회사의 입장을 주변 사람들에게 명확히 이야기…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회사의 입장을 게시.”

7월 7일 회사는 “공권력 투입의 명분 강화 & 축적하는 주간으로 운영”한다는 메일을 직원들에게 보내 포털사이트 홍보를 주문했다. 실적을 팀별로 집계하고 중역회의에서 보고한다(2·3일 메일)며 인터넷 카페 활동과 글 올리기를 독려했다.

② “1단계 가정통신문 발송: (대상) 옥쇄파업 참가자 가족. (내용) 옥쇄파업이 좌파 외부단체에 의해 현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으며….”

가정통신문들이 파업참가자 집마다 배달됐고 불안해진 부모·친지들이 이탈을 설득했다.

③ “2단계 인맥(학연·지연·선후배 등)을 동원한 설득: 관리자 및 구조조정 비대상자들을 총동원하여 구조조정 대상자 및 그 가족들과 친분이 가장 두터운 대상자들을 선정하여 맨투맨 방식으로 설득.”

이 문건이 작성된 직후부터 쌍용차는 부문별 담당자를 정해 976명 전원의 분석 작업에 들어간다. 성격과 정치성향, 친구관계 등을 기입하는 조사 양식을 만든 뒤 결과를 파일 하나로 종합했다. 직급과 파업참여 여부, 활동하는 현장조직, 본적, 학력, 출신교 등이 정리됐다. 아내와 자녀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까지 포함시켰다. 파업 이탈을 이끌 “설득자”들의 이름도 일대일로 매칭했다.

현장 조직 참가자들은 따로 파일을 만들어 관리했다. 조직별·세력별로 사람들을 분류(“한상균 지부장 세력” 등)해 직책과 “주요인물” 여부를 기입했다. 이 과정을 거쳐 축적·분석한 정보들을 토대로 “편 가르기”와 “축출”과 “내부 붕괴” 전략이 수립·추진됐다.

④ “시행시기: 6월 16일 후 시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

6월 16일을 특정한 까닭이 있었다.

▲ 2009년 8월 5일 조립공장 옥상에서 故 김주중씨(오른쪽 상단에서 솥뚜껑으로 몸을 가린 사람)가 경찰 특공대의 방패와 전투화에 찍히며 진압 당하고 있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제공


경찰 투입 유도하는 공장 진입 시도


“공권력 투입 명분 제공”

쌍용차는 6월 11일 ‘회사 정상화를 위한 공장 진입계획’을 완성한다. 6월 3일 공권력 행사를 공식 요청한 회사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전 직원을 동원해 ‘공장 진입팀’을 짠다. 팀장들 아래로는 선봉조(50명)와 지원조(50명), 절단·합판조(15명), 밧줄·갈고리조(54명)를 편성했다. 무전병(1명)과 팀장 보호조(5명)도 별도로 뒀다. 문건은 공장 진입의 목적 중 하나로 “부정적인 정부 의견 해소 및 조기 공권력 행사 명분 제공”을 적었다. 공장 진입 시도를 통해 정부에 ‘강력한 생존 의지’를 보여주고 경찰에 ‘충돌 방지’를 이유로 진압할 명분을 준다는 뜻으로 읽힌다. 진입 날짜와 시간은 6월 16일 아침 8시 30분이었다.

진입은 계획대로 시도됐다. 세부지침(6월 13일 ‘선봉2팀 회사 진입작전 계획안’)이 ‘이동 시 제창하라’며 지정해준 구호(“정상조업 파업 철회”)도 현장에서 똑같이 울려 퍼졌다. 진입은 도중에 중단됐으나 6월 27일 재시도 되며 격렬한 충돌을 낳았다. 회사는 6월 11일 ‘경비인력투입계획안’에서 380명의 용역(방패·가스총·삼단봉·안전모·고글·무전기 등으로 무장) 투입 계획을 짜뒀다.

이때의 충돌을 ‘명분’ 삼아 경찰은 6월 말부터 쌍용차에 안내 요원 배치를 요구하며 진압 실행 단계로 전환한다. 7월 2일엔 경기경찰청 소속 50여 명으로 구성된 ‘쌍용차 사이버대응팀’을 설치(백서 342쪽)해 노조의 폭력성과 진압의 정당성을 쌓는 여론 작업을 시작했다. ‘댓글 공작’이었다. 쌍용차도 7월 7일 ‘대정부 공권력 행사 촉구대회’(여의도공원)와 10일 ‘엄정한 법 집행 촉구 기자회견’(청와대·정부 과천청사·대검찰청·경찰청 동시진행)을 열며 보조를 맞췄다. ‘711작전’으로 출입문을 확보한 경찰 지휘부는 7월 21일부터 쌍용차 ‘4WD 주차장’에 상주한 뒤 7월 31일 회사 본관 5층에 입주해 ‘그날’을 맞는다.


이명박 허가 받고 경찰 진압

그날 8월 5일 강희락 경찰청장은 ‘진입 불허’를 명령했다. 거부한 조현오는 청와대로 직접 전화해 이명박의 허가(조현오 자서전)를 받아낸다. 곧바로 특공대를 투입해 경찰 역사에 남을 초강경 진압을 연출한다. 조립공장 옥상에서 특공대의 곤봉과 방패에 찍힌 해고자들 가운데 故 김주중씨가 있었다. 그날 몸과 마음에 새긴 고통을 안고 9년을 살아온 그는 지난 6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쌍용차 정리해고로 세상을 떠난 30번째 사망자가 됐다.

‘노동자가 다른 생각을 하면 회사의 미래가 없다’며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한 이명박과, 이명박의 주문에 부응하며 ‘공권력 협업안’을 짜 대규모 정리해고를 마무리한 기업과, 그 이명박으로부터 파업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승승장구(2010년 1월 서울지방경찰청장→2010년 8월 경찰청장)한 경찰 지휘관. 그들이 외면한 ‘죽음의 행렬’이 10년째 멈출 줄을 모른다.

“직장폐쇄는 파업이 시작돼야 가능하다. 회사는 파업 전부터 폐쇄 계획을 수립하며 사실상 파업을 유도했다. 공권력 투입을 위해선 노사 간의 물리적 충돌이 필요하다. 회사는 경찰 진압의 명분을 준다며 진입을 시도해 충돌을 유도했다. 이후 대대적 경찰 진압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회사와 긴밀히 정보를 교환하고 협의했다.”(쌍용차 문건들을 분석한 윤지영 공감 변호사와 윤지선 ‘손잡고’ 활동가)


민주노총 탈퇴로 “마무리”

파업 종료 12일 뒤(8월 18일)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이 주관한 쌍용차와 협력업체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영태 쌍용차 공동관리인은 공개석상에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불법성(부당노동행위) 강한 발언을 한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 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 민주노총 탈퇴 등을 해보겠다. 쌍용차가 모범사례가 되어 보겠다.”

그날 수정된 한 문서가 ‘소집권자 지명 및 총회소집 관련 질의응답 자료’란 제목으로 남았다. 총회 소집권자(지부장 또는 직무대행)가 아닌 조합원이 금속노조(민주노총) 탈퇴를 목적으로 총회 개최를 요청했을 때 예상되는 반박질문을 만든 뒤 하나하나 답변하는 방식으로 서술됐다. 13일 뒤(8월 31일)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조합원 일부가 서명을 받아 총회 소집을 공고했다. 9월 8일 조합원 총회에서 투표율 75.3%에 73.1% 찬성으로 금속노조 탈퇴가 결정됐다. 그렇게 그 여름은 “마무리”(8월 12일 산업은행 1,300억 원 자금지원 발표)됐다.

당시 비상대책종합상황실 책임자는 <한겨레>의 사실 확인 질문에 “나한테 묻지 말고 홍보팀에 물으라”며 전화를 끊었다. 정무영 쌍용차 홍보담당 상무는 “(정부기관들과 협조를 언급한) 문건들은 회사의 위기관리 규정일 뿐”이라고 했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할 수 있는 조처들을 적은 일반적인 내용이다. 우리가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쪽에서 요청이 오면 응한다는 의미다. 행정적 조처들은 기관들이 하는 것이므로 회사가 개입할 수 없다. (문건들은 회사의 적극적·능동적 대관전략들을 보여주는데?) 당시 회사가 가동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빨리 가동되도록 해달라는 정도의 뜻이었다. 위기관리 규정대로 실행됐는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확인할 수 없다.” 문건에 경찰 쪽 담당자로 이름이 등장한 경찰관은 “회사와 공조라고 할 만한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이 없다”고 답했다.

▲ 지난 7월 3일 대한문(서울 중구 세종대로) 앞에 설치된 故 김주중씨의 분향소에 그의 영정 그림이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남은 자들의 오늘

김주중씨의 죽음을 떠안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8월 2일 40도의 폭염이 달군 불덩이 아스팔트를 기었다. 해고자 전원복직과 국가사과를 요구하며 살이 타들어 가는 지렁이의 속도로 오체투지를 했다.


출처  9년만에 드러난 쌍용차의 ‘노조 와해’ 비밀문서 100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