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에 이럴수가/WTO·FTA·TPP

ISD 중재했던 미 판사 ‘미 정부서 압력’ 고백

공정한 국제중재라더니…
ISD 중재했던 미 판사 ‘미 정부서 압력’ 고백

예일대 로스쿨 논문에 실려
[한겨레] 정은주 기자 | 등록 : 20120102 20:51 | 수정 : 20120103 13:59


투자자-국가 소송(ISD)에 중재인으로 참여했던 전직 미국 판사가 미국 정부의 압력을 받았다고 고백한 것으로 확인됐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공정한 국제중재절차이며 중재인은 중립성과 독립성을 보장받는다고 외교통상부는 주장해왔다.

2일 미국 예일대 로스쿨이 2008년에 펴낸 논문집 ‘국제투자중재에서 근거의 필요성: 판례 중심’을 보면, 빌 클린턴 정부의 고문으로 일하던 전직 연방법원 판사 애브너 미크바는 캐나다 회사가 미국 판결에 처음 도전한 로언 사건의 중재인으로 1998년 지명된 뒤 미국 법무부와 만났다. 당시 법무부 관계자는 “미국이 로언 사건에서 패소하면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NAFTA)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미크바는 “내게 압력을 행사하길 원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국제중재인으로 활동하는 잰 폴슨 미국 마이애미 로스쿨 교수는 “미국 압력을 거부한다는 듯이 밝혔지만 정부 관료 출신인 미크바는 클린턴 정부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지지하며, 그만큼 로언 사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언 사건이란 캐나다 장의업체인 로언이 1995년 미국 미시시피 주법원에서 5억달러를 배상하라는 배심원 평결을 받자 북미자유무역협정 위반이라며 미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소송을 청구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워낙 드라마틱한 사건이라 영화화가 논의될 만큼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설민수 판사가 논문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형태와 그에 따른 대응’에서 정리한 로언 사건 내용을 보면, 법정싸움은 미국 장례식장 사업에 투자했던 로언과 인수계약을 맺은 미국의 장례식장 소유주 제레미아 오키프가 로언이 계약과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며 미시시피 주법원에 500만달러의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로언이 오키프의 400만달러 화해 제의도 거부할 만큼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배심원의 감성을 잘 활용하기로 유명한 미국 변호사 윌리 게리가 등장하면서 판세가 역전됐다. 게리는 대중적 선동을 통해 이 사건을 ‘흑인사회 대 캐나다 국적 대기업’의 대결로 몰아가며 인종주의와 국수주의를 자극했다. 법원의 경고에도 게리는 각종 라디오 토크쇼나 흑인 집회에 참석해 여론재판으로 몰아갔고 그 과정에서 배심원은 격리되지 않았다.

재판의 진행도 엉망이었다. 중요한 법률논점인 계약법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게리는 배심원의 편견을 불러올 수 있는 발언과 증거로 법정을 장악했다. 예컨대 원고는 ‘미국 내 지역회사’ 피고는 ‘캐나다 국적 대기업’으로, 원고는 ‘인종주의자가 아닌 건실한 백인 기업가’로, 피고는 ‘인종주의자’로 몰아갔다. 또 원고를 ‘국방의무를 다한 상이군인’으로 원고를 묘사하는 한편 피고의 ‘국제성과 부’를 강조했다. 게다가 피고의 증거 이의신청은 번번히 기각됐다.

결국 배심원들은 1억달러의 실질적 손해와 4억달러의 징벌적 손해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5억달러는 로언의 전체 자산의 78%에 달하는 액수였다. 로언은 평결에 항소하길 원했지만 당시 미시시피법은 1심 판결액의 125%를 공탁해야 항소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로언은 실질적 손해의 125%인 1억2500만달러로 공탁금을 감액해달라고 대법원에 신청했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했고 결국 1억7500만달러에 원고와 최종적으로 화해했다. 화해가 끝나자 1998년 로언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청구했고 중재절차를 밟다가 파산신청을 했다.

중재판정부를 구성할 때 로언이 캐나다 외교관 출신의 유능한 중재인을 지명하자 미국 정부는 중립성 문제를 제기하며 그를 교체시켰다. 그리고는 미국 법무부는 미국 관료 출신의 미크니 중재인을 지명하고 “미국이 패소하면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압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당시 로언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폴슨 미국 교수는 “미국 정부의 위선이 통탄스럽다”고 말했다.

중재판정부(3명)를 구성해보니 미크바를 제외한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판사 출신의 두 중재인은 미국 주법원의 잘못된 평결로 로언이 피해를 봤다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미크바는 회상했다. 이에 미크바는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소수 의견을 개진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중재인 둘도 나중에 입장을 바꿔 2003년 6월 중재판정부는 만장일치로 미국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중재판정부는 내용적으로는 “(미국 법원의) 배심원 평결은 명백히 부당하고 국제관습법에 견줘 적합하다고 볼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로언이 파산한 뒤 미국 회사로 재설립됐고 미국 내 사법적 절차가 끝나지 않았다”며 절차적 문제를 들어 로언의 청구를 기각했다. 데이비드 슈나이더만 캐나다 토론토 로스쿨 교수는 “미크바가 미국 정부가 패소하면 커다란 논쟁이 불붙어 북미자유무역협정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그 견해를 다른 중재인들과 공유하면서 중재판정부가 전략적으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미크바는 로언 사건의 뒷얘기를 2004년 12월 페이스 로스쿨 대학에서 열린 환경법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녹음돼 2008년 예일대 논문집을 통해 공개됐다. 폴슨 교수는 “미크바는 미국 행정부의 압력을 받고도 소송사건을 맡아 중재인으로서 중립성과 독립성을 잃었을 뿐아니라 중재판정의 비밀까지 누설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투자자-국가 소송제가 미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을 위해서 필요한 제도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외국 투자자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중재를 제기해 승소한 사례는 없다. 지금까지 15건 소송을 냈지만 미국 정부가 6건 승소했고 나머지는 계류 중이다. 특히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뒤 캐나다 투자자가 미국 정부에 잇따라 도전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미국 기업은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로 108건의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제기해 15건 승소했고, 18건 합의했으며, 22건 패소했다. 나머지 사건은 진행 중이다.


출처 : 공정한 국제중재라더니…ISD 중재했던 미 판사 ‘미 정부서 압력’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