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주남마을 버스 총격 최소 3건…22구 주검 사라졌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최소 3건…22구 주검 사라졌다
미니버스 총격 목격 강해중씨 80년 5월 23일 총 맞고 실명
“홍금숙씨 탔던 미니버스 사건 오전에 발생했을 가능성”
김종화씨 목격했던 버스 사건과 ‘광주고속 버스’ 총격 조사해야
최소 33명의 버스 관련자 중 주검 10명과 생존자 1명만 밝혀져

[한겨레] 정대하 기자 | 등록 : 2019-05-15 08:45


▲ 강해중(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씨는 1980년 5월 23일 오전 광주시 동구 주남마을 인근 길을 가다가 공수부대원들이 쏜 총에 두 눈을 잃고 39년째 빛을 보지 못하고 산다. 정대하 기자

총소리가 지글지글 끓는 것 같았다. 겁이 나 길옆 보리밭으로 뛰어들어 엎어졌다. 두 아들이 자신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딸이 걱정됐다. 총격을 받은 소형버스 바퀴 아래 숨은 딸이 꼭 죽은 것만 같았다. 총소리가 그친 틈을 타 딸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순간, 두 눈에 총을 맞았다. 강해중(85·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씨는 빛을 보지 못하고 산 지 올해로 39년째다.

그는 1980년 5월 23일 광주에서 화순으로 피난을 가던 중 공수부대원들의 공격을 받았다. 실명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미니버스 총격 사건이었다. 신작로 양쪽 산에 “꼭 까마구 떼처럼”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자녀 3명과 길을 가던 중 미니버스(①)가 총을 맞고 반듯하게 멈춰 서는 것을 목격했다. “그 차 유리창이 다 깨져분 차여. 거기 탄 사람 다 죽었을 거이요.” 강 씨는 미니버스 총격사건 시점을 “9시 반이나 10시 정도 됐어”라고 기억했다.

▲ 1980년 5월 23일 오전 미니버스 총격사건을 목격한 유춘학씨가 광주 동구 지원동 쪽에서 사격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정대하 기자

강 씨는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본 증인이다. 주남마을 총격 사건은 1980년 5·18 암매장 의혹을 규명할 수 있는 열쇳말이다. 그러나 주남마을 총격 사건의 진실은 39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강 씨를 비롯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발생 시각과 전체 사건 수, 피해 현황 등을 다시 따져봐야 할 판이다.

당시 미니버스 총격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당시 여고생·56) 씨는 사고 시간을 오후 2~3시라고 진술(⑤)해왔다. 하지만 당시 미니버스 총격 장면을 지켜보다가 총상을 입은 유춘학(55) 씨는 “이날 오전에 미니버스 총격 사건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유 씨의 병원 도착 시각은 오전 10시 30분이다. 홍 씨와 함께 미니버스에 탔던 박현숙 씨의 검시조서엔 사망 시각이 오전 9시로 나온다. 홍 씨가 증언한 사건의 발생 시점이 오후 2~3시가 아니라 오전 9시 반~10시 15분께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진술들이다.

주남마을 주민 임석기(1932년생) 씨의 1996년 1월 검찰 수사 진술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임 씨는 미니버스 총격사건 발생 시간을 “오전 9시 30분께”로 진술했다. 그날 오전 9시께 군인들이 쏜 총을 맞고 다친 아들을 경운기에 태우고 뒷산으로 가 군 헬기로 태워 병원으로 이송하고 난 직후 미니버스 부상자들이 오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임 씨는 “여자 부상자가 홍금숙이라고 생각했고, 홍금숙이 사건을 오후 3시께라고 진술했다면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고 진술했다. 이제원 11공수여단 62대대장도 미니버스 총격사건 발생 시간을 5월 23일 오전 10시로 진술했다.

▲ ‘5·11연구위원회’ 문서를 보면, 홍금숙씨도 오전 9시 30분께 지원동을 지나 화순 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홍 씨는 미니버스 탑승자를 18명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한겨레>가 확보한 ‘5·11연구위원회’ 문서를 보면, 홍 씨도 군 조사에서 “오전 9시 30분께 지원동을 지나 화순 가는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산 쪽에서 위협 사격이 있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 문서엔 ‘10명 이상의 남자와 여자 1명’이라는 내용과 함께 ‘홍금숙 조사 관련 사항은 대외 보안유지’라고 적혀 있다.

80년 5월 23일 주남마을에선 오전 8시 30분에 또 한 건의 버스 총격 사건(②)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주남마을 인근에서 화훼 비닐하우스를 운영하던 김종화(1952년생) 씨는 1995년 12월 검찰 수사에서 집 앞에서 목격한 총격 사건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그는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의 사격 개시 명령에 따라 도로 양편에 매복해 있던 군인들이 2~3분간 콩 볶는 듯이 집중적으로 사격해 승객들을 몰살시켰다”고 진술했다. 버스는 도로 옆길로 전복됐고, 군인들이 2인 1조가 돼 끌어내린 주검들은 도로 배수로에 내동댕이쳐졌다고 했다.

김종화 씨가 목격했던 버스 총격 사건과 홍금숙 씨가 타고 있던 미니버스 사건은 별개일 가능성이 높다. 박형락 11공수여단 62대대 대위는 “미니버스 총격전이 있었던 장소에 가봤더니 미니버스가 치워지고 없었다”고 진술했다. 김 씨가 목격한 사건의 희생자 수는 10명(여성 2명)이다. 김 씨는 “한 여성의 바지 주머니에서 일신방직 회사의 출입증을 보고 회사로 연락했다”고 진술했다.

▲ 주남마을 인근에서 화훼 비닐하우스를 운영하던 김종화(1952년생)씨는 1995년 12월 검찰 수사에서 집 앞에서 목격한 총격사건을 지도를 그려가며 상세하게 진술했다.

주남마을 암매장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위 두 개의 사건과 별개인 광주고속버스 총격 사건(③)의 조사가 필요하다. 20사단 61연대 소속 이래헌 일병은 2007년 5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에서 “5월 24일 주남마을에 도착한 뒤에도 총격전이 있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는 11공수여단이 철수하고 20사단이 주남마을로 교체 투입됐던 때다. 총격으로 고속버스의 운전석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버스 안은 피가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버스엔 ‘살인마 전두환’ 등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 씨는 “버스 주변에서 주검 11구(여성 3구)를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시신을 누가 수습해 갔는지 알지 못한다. 50대가량의 민간인이 와서 신분증을 확인한 뒤 확인되지 않는 사람들은 ×자를 표시했다”고 이 씨는 진술했다. 당시 국방부 과거사위는 “이 씨가 미니버스가 아니라 광주고속 소속의 대형버스였다고 주장해 추가조사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적었지만,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 80년 5월 23일 미니버스에 탔다가 공수부대 총격을 받고 다쳤으나 사살당한 시민 2명의 위령비가 세워진 광주시 동구 주남마을을 정수만 유족회장이 둘러보고 있다. 정대하 기자

이와 함께 5월 28일 광주 주남마을에서 멀지 않은 지원동 동사무소 인근에서 발견된 구급차 사체 1명의 행방(④)도 규명해야 할 대목이다. 당시 주남마을 인근은 민간인 출입이 금지돼 5월 25~28일에 주검들이 수습됐다. 군·검찰 기록과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라 주남마을 사건을 종합하면,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은 총 4건으로 추정되고, 피해자는 모두 33명이다.

주검이 발견된 10구는 고영자·김남석·김윤수·김춘례·박현숙·백대환·양민석·장재철·채수길·황호걸 등이다. 생존자 홍 씨 1명과 10구를 제외하면 22명의 주검이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홍 씨의 주장대로 미니버스 사건 1건에 탑승자 18명으로 치더라도 최소 7명의 주검이 사라졌다.

▲ 11공수여단 박형락 62대대 대위는 1980년 5월 23일 미니버스가 치워졌다고 진술한 바 있다.

시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육군본부 전투교육병과사령부 ‘전교사 상황일지’엔 ‘5.23 15:30 상황: 광주 소태동, 폭도 50명(버스 1대) 군부대 기습 기도, 군부대(11공수여단) 반격 소탕. 생포 3명(부상 2명), 사살 17명’이라고 적혀 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전교사 상황일지를 보면 5월 23일 광주~화순 간 도로에서 17명을 사살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군 기록에 맞춰 사고 시간과 주검 숫자가 맞춰졌을 가능성이 크다. 향후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핵심적으로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주남마을 버스 총격 최소 3건…22구 주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