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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미군은 왜 독도에 폭탄을 투하했나

그날, 미군은 왜 독도에 폭탄을 투하했나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1948년과 1952년에 벌어진 독도 폭격 사건
[오마이뉴스] 글: 김종성, 편집: 김예지 | 19.06.08 20:13 | 최종 업데이트 : 19.06.08 20:13


한반도가 공식 분단된 1948년에는 홍수 피해도 심각했다. 을축년 홍수로 불리는 1925년 대홍수 이후 23년 만의 대홍수였다. 1948년 상반기에는 가뭄 피해가 심했다. 그러다가 7월부터 장마가 시작되더니 대홍수로 이어진 것이다.

그해 6월 13일 치 <경향신문>에 따르면, 장마 조짐은 6월 9일부터 나타났다. 오랜 가뭄을 해소하는 비가 9일부터 내리더니, 12일 아침까지의 강우량이 162mm가 되고 한강 증수량도 4m나 됐다.

가뭄이 끝나기 하루 전날인 6월 8일, 한국인들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것들에 깜짝 놀라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갑지 않은 것이 그날 하늘에서 마구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바로, 독도에 투하된 폭탄과 총탄이었다. 이날 대대적인 독도 폭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해 6월 12일 치 <동아일보> 보도다.

“동해의 고도, 독도에서 어선이 폭격을 받아 20여 명이 사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8일 울릉도로부터 39마일 떨어진 무인도 독도에서는 미역 따는 어선 15척이 본토와 울릉도로부터 모여들어 작업 중, 정오경에 이르러 상공에 나타난 비행기로부터 폭탄과 기관총의 세례를 받아 11척이 침몰하고 9명이 사망, 5명이 행방불명, 중상 2명, 경상 8명이란 큰 희생을 내었다 한다.”


태극기 흔들었지만 속수무책... “초록빛 독도 앞이 피바다 됐다”

▲ 1948년 6월 12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이 신문에서는 사망자가 9명이라고 했지만, 6월 11일 치 <조선일보>는 16명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실제는 훨씬 컸다. 이때만 해도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사건의 내막이 충분히 알려지고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나온 1999년 10월 11일 치 <한겨레신문>은 150명이라고 보도했고, 2015년 2월 6일자 <대구일보>는 200명이라고 보도했다.

침몰된 선박 숫자도 당시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최대 20여 척 정도로 보도됐을 뿐이다. 하지만, 위 <한겨레신문>은 80척으로 보도하고 <대구일보>는 30척으로 보도했다. 가뭄의 해갈을 기다리던 한국인들에게 엉뚱하게도 폭탄과 총탄의 세례가 쏟아졌던 것이다.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건이었다.

이 끔찍한 만행을 자행한 것은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 제5공군 B29 폭격기다.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군이 벌인 일이었던 것이다. 1879년에 일본 식민지가 된 오키나와는 1945년 미군에 점령됐다가, 1953년에 그 일부가 일본으로 넘어가고 1972년에 그 전체가 일본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오키나와 미군은 지금의 주일미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행의 주체가 주일미군임을 알게 되면, 그날 독도에서 벌어진 일이 한층 더 서글프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국 어민들이 미군 폭격기를 향해 태극기를 흔들어대는데도 미군은 폭격을 중지하지 않았다. 2008년 6월 호 <민족21>에 실린 '미군이 저지른 독도 폭격 사건, 미국은 독도는 한국 땅이라 말한 바 없다'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1948년 6월 8일 화요일, 울릉도와 강원도 배들이 독도에서 고기잡이와 미역 채취를 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인 오전 11시경, 비행기 소리가 났다. 지나가는 비행기겠거니 하며 어민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비행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독도로 접근을 하더니, 갑자기 폭탄을 투하하였다. 뒤이어 주변 수역에서 조업하던 선박을 향하여 폭탄 투하는 물론이고 기관총 사격을 가하였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배 위에 있던 어민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독도 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어민들은 동굴로 급히 몸을 피하였다. 어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손짓을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이곳저곳에서 어민들이 무참하게 죽어갔다. 팔이 잘려나가고 몸통에서 피가 솟구쳤다. 초록빛 독도 바다는 피바다로 변하였다. 네 차례에 걸친 맹폭이 있은 후 비행기 한 대가 와서 유유히 한 바퀴 선회하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평소 같았으면 일본 어민과 선박들이 독도 부근에 있었을 수도 있다. 일례로, 1947년 4월에는 일본 어민이 독도에 상륙해 "이곳은 내 구역"이라며 한국 어민에게 총격을 가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1948년 6월 8일 그날에는 이상하게도 일본 어민들이 일절 나타나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한국 어민들만 집중 폭격을 당한 것이다.

사건 뒤에 한국인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거센 분노를 표시했다. 6월 19일 치 <경향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한미동맹을 어둡게 전망하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자 미 공군 극동사령부는 '바위인 줄 알고 폭격했다'는 어이없는 해명을 내놨다. 목격자들은 이 발표가 거짓이며, B29 폭격기가 저공 비행을 하면서 어민과 어선들을 의도적으로 조준했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왜 어민과 어선을 공격했나

▲ 독도 폭격에 대한 한국인들의 원성을 보도한 1948년 6월 19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 2개를 투하하고 항복을 받아냈지만, 얼마 안 있어 일본에 유화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국민당이 약해지고 공산당이 강해지자, 일본을 중국과 소련을 견제할 전초기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 같은 전략적 전환에 따라, 미국은 1948년 1월 6일에는 육군장관 로이얄의 성명을 통해 '자주적인 일본을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까지 천명했다. 일본을 전범국이 아니라 동맹국으로 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일본은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홍보전을 열렬히 전개했다. 1947년 6월부터 미국과 연합국 진영을 상대로 선전 책자를 배포하며 대대적 선전전에 나섰다.

그런 가운데서 구체화된 일본 정부의 구상이 있다. 독도를 주일미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만듦으로써 독도를 한국에서 떼어놓는다는 것이었다. 이 작업의 결과로,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 26일 일본은 미국과 '군용시설과 구역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독도를 미군의 공공훈련구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독도의 폭격 연습장 지정이 일본 정부의 공작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독도 침탈의 일환이었다는 점과 관련해, 이태우 영남대 독도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1948년 독도 폭격사건의 경과와 발생 배경'은 이런 사례를 소개한다.

“제13회 중의원 외무위원회(1952.5.23)에서 야마모토 도시나가 의원은 ‘이번 일본 주둔군 연습지 설정에서 다케시마 주변이 연습지로 지정되면 이를 일본의 영토로 확인받기 쉽다는 발상에서 외무성이 연습지 지정을 오히려 바란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이냐’라고 질문했고, 이시하라 간이치로 외무성 정무차관은 ‘대체로 그런 발상에서 다양하게 추진’한다고 답변했다.” -영남대 독도연구소가 2016년 발행한 <독도 연구> 제20호.

독도가 주한미군이 아닌 주일미군 연습장이 되면, 자연스럽게 일본 차지가 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외무성 차관은 그것을 위해 다양한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문제를 놓고 미군과 일본 정부가 공조했다는 점은, 일본 어민들이 폭격 당일 독도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폭격 전에 미군은 일본 어민들에게 독도에 가지 말라고 사전에 통보했다.

위 논문은 "일본 어민에게만 훈련 사실을 통보했고, 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한 채 자국 어장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어선·어민들은 폭격에 희생되었다"라고 설명한다. 1948년 6월 8일의 독도 폭격이 어떤 의도 하에 벌어졌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비참한 일은,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미국이 끝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상보고서도 발표하지 않았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독도 폭격사건과 관련하여 주한미군사령부나 극동군사령부·극동공군사령부·제5공군 등은 무고한 사망·부상, 재산상의 손실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사죄하지 않았다.

또 이 사건과 관련한 최종적인 조사 결과도 발표되지 않았다. 극동공군은 ‘가장 불행한 유감스러운 사고’라고 발표했고, 하지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미군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판명되면 그 책임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했다.”

한국 주둔군 사령관인 존 하지가 '미군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명되면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발언하는 수준에서 사건이 종결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이때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다. 독도 침탈을 위한 일본의 시도가 계속 전개되는 가운데, 독도 상륙을 시도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4년 뒤인 1952년 9월 15일·22일·24일에도 있었다.

1952년 9월 15일의 경우에는, 해녀와 선원을 포함해 20여 명의 한국인이 조업하는 곳에다가 미군 폭격기가 폭탄 4발을 투하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9월 22일의 경우에는, 독도 학술조사단이 독도에 근접한 상태에서 미군 폭격기가 나타나 주변 해상에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갔다. 이때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어이없는 것은, 한국인들의 독도 학술조사가 사전에 예고된 상태에서 미군 폭격기가 예정일에 맞춰 출현했다는 점이다. 9월 15일은 애초 계획된 상륙 예정일이고, 22일은 수정된 상륙 예정일이었다. 위의 <민족21>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1952년 사건의 경우, 재미있는 점은 한국산악회의 독도 상륙 예정일이 9월 14~15일이었던 바, 하필 9월 15일에 폭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일정이 늦어져서 9월 18일에야 울릉도에 도착하였으니 망정이지, 모두 몰살당할 뻔하였다. 그런데 학술조사단이 독도로 상륙하고자 했던 9월 22일에 독도 부근 해상에 다시 폭격기가 나타나서 폭탄을 투하하고 사라졌다.”

한국인들의 독도 상륙 예정일에 맞춰 미군 폭격기가 독도를 공격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인들을 몹시 서글프게 만든다.

다만, 1948년과 1952년의 폭격도 한국인들의 독도 소유에 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한국인들이 한층 더 각성된 태도로 독도 수호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 반응에 놀란 미국은 얼마 안 있어 독도에 대한 공식 개입을 포기했다. 그에 더해, 1953년 3월 19일에는 독도를 미 공군의 훈련구역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한국인들의 원성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었다. '다케시마가 훈련구역이 되다 보니 조업에 불편이 많다'는 시마네현 어민들의 항의를 반영한 결과였다.


출처  그날, 미군은 왜 독도에 폭탄을 투하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