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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응징’ 언론인 백은종 “응징 기준은 국민적 상식이다”

‘응징’ 언론인 백은종 “응징 기준은 국민적 상식이다”
[경향신문] 원희복 선임기자 | 입력 : 2019.12.28 19:49 | 수정 : 2019.12.28 19:51


▲ <서울의 소리> 백은종 대표 / 김창길 기자

2019년 12월 19일 여의도 국회 앞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토착왜구당은 사흘 전인 16일 여야 ‘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의 선거법 국회 통과를 막겠다며 태극기부대를 동원해 국회를 ‘유린’했다. 국민적 공분을 샀지만 태극기부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국회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경찰은 많은 인원을 동원해 이들을 저지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국회 정문 앞에서는 정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민주 진보 유튜버연합 필리버스터 릴레이 단식’이라는 플래카드를 건 시위였다. 집회 참여자는 10명도 안 됐고, 그것도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독립군가>를 틀어놓고 “설치하라 공수처”, “정치검찰 해체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유튜브 중계를 하고 있었다. 경찰이 중간에 있었지만, 대규모 태극기부대에 비하면 너무 소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태극기부대 ‘지휘관(검은 베레모를 쓴 그는 극우 유튜버로 유명하다)’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 시위대에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검은 베레모에게 달려갔다. 시위대의 세로 보면 ‘무모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물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무모함을 감행한 사람은 백은종 <서울의 소리> 대표(67)다. 그는 인터넷 언론사 발행·편집인이다. 게다가 그는 44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다. (방송사를 제외한 중앙언론사 유튜브 구독자를 보면 <한겨레> 23만 명, <한국일보> 19만 명, <서울신문> 1만 명 정도이고 시사주간지 유튜브 구독자는 수천~4만 명 수준이다·2019년 1월 기준) 국내 언론은 그를 외면하지만, 오히려 외신이 그를 주목해 11월 6일 프레스센터에서 초청 기자회견까지 했다. 유튜브 중계를 마친 그와 인근 영등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44만 명 구독자 가진 유튜버

- 오늘 국회 앞에서 농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황교안 자한당 대표가 청와대 앞에서 7일간 단식농성을 할 때, 나는 하루 뒤 마주 보면서 단식농성을 했다. 그 농성을 이곳으로 옮겨 민주·진보 유튜버들이 교대로 농성하고 방송도 하고 있다. 우리는 공수처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거법은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다.”

- 유튜브는 보수·극우 인물이 장악하고 있다. 민주·진보 유튜버들이 많이 있는가.

“지금 유튜브에는 보수·극우 천지다. 진보진영이 팟캐스트를 장악했을 때 극우로 넘어갔다. 현재 우리 스튜디오에서 유튜버를 양성하고 있다. <서울의 소리>는 창간부터 유튜브를 했고, 특히 박근혜 탄핵과 요즘 ‘응징취재’로 구독자가 44만 명으로 늘었다. 페이스북도 4개, 트위터도 6개 계정으로 활동하고 있다. 홈페이지도 있지만 네이버나 다음에 올리지 않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만 알려도 영향력이 크다고 자부한다.”

- SNS는 국가정보원 댓글공작에 대한 대선 무효 투쟁과 촛불혁명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기존 시민단체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규모 군중이 모이는 서초동 집회도 기성 시민단체가 아닌 SNS가 주도하고 있다.

“사실 요즘 시민단체가 집회를 하면 수백 명 수준이다. 막강한 조직력을 갖춘 민주노총도 수만, 많아야 10만여 명이다. 우리는 2016년 백남기 농민이 숨졌을 때 웹자보를 SNS를 통해 뿌렸다. 처음에는 1000명 모으기도 어려웠는데, 나중에 3만 명까지 모았다. 지금 15차까지 이어지는 서초동 집회도 처음 300명으로 시작해 1000명으로 불어나더니 1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이들 집회 참가자의 70%가 여성으로, 40~50대가 제일 많다.”

- 물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시비비가 언론의 의무이긴 하다. 그러나 ‘응징취재’라고 폭언과 폭력으로 직접 응징하는 것은 언론의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나.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잘못을 깨달으라고 혼을 내는 것이다.”

- 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상식이 기준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 아니다’, ‘일제 위안부는 없었다’, ‘반민특위는 국론분열이다’, ‘제1야당 당수가 국회 폭력을 주도하는 것이 옳은가’ 등 국민 정서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응징대상이다. 나는 사적으로 응징한 적은 한 번도 없다.”

- 이런 기준 역시 자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여론조사에서 공수처 설치를 70%가 찬성하지 않았나. 표현·학문의 자유와 매국행위는 구분해야 한다. 이를 빙자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


“나는 언론인이기 이전에 사회운동가”

그는 정식 등록된 인터넷 언론매체를 운영하는 발행·편집인이지만 실제는 사회운동가다. 그 역시 “나는 언론인이기 이전에 사회운동가”라며 “사회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언론을 보조로 활용하고 있다”고 시인했다. 그런 그에게 ‘언론의 본령’이나 ‘저널리즘의 기초’ 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솔직히 ‘기레기’로 표현되는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극심한 현실에서 그리 지적할 자격도 없다. 오히려 그는 기성 언론의 무책임한 기계적 중립을 비판했고, 기자는 그의 지적에 공감했다.

백 대표는 2009년 ‘안티 이명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명박심판행동운동본부’를 차렸다. 이명박 사저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는데도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않자 “그냥 우리가 쓰자”라는 생각으로 <서울의 소리>를 창간했다. <서울의 소리>는 ‘입을 꿰매도 할 말은 하자’는 모토를 내걸었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자 ‘이명박근혜심판범국민행동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적폐를 청산하고 승리의 역사를 기록하자는 의미에서 다시 ‘적폐청산의혈행동본부’로 바꿔 현재 대표로 있다.

의혈단 이름이 들어간 것은 최근 발호하는 친일세력을 응징하기 위함이다. 그는 연세대 류석춘 교수가 강의 중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발언을 하자 학교 연구실로 찾아가 “일본 간첩이 분명하니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며 끌어내는 응징 취재를 했다. 그 영상의 유튜브 조회 수는 100만 회가 넘었다. 또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던 <반일종족주의> 저자 이우연을 응징 취재하기도 했다.

이를 보고 있으면 1965년부터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추적하며 응징했던 곽태영 씨와 역시 1996년 10월 23일 ‘정의봉’이라는 몽둥이로 안두희를 살해한 박아서 씨가 생각난다. 백 대표는 박아서 씨와 매년 광복절 백범 묘소에서 같이 참배하는 사이로 그에게 ‘정의봉’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런 친일행위 역시 이명박·박근혜가 낳은 적폐로 판단하고 있다. 그는 “<친북종족주의>를 써 북한을 찬양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가는데 <반일종족주의>를 써 친일하는 사람을 처벌할 법이 없다”며 한탄했다.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30여 건의 고소·고발을 당했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영장실질심사에서 기각된 똑같은 사안으로 검찰이 다시 구속영장 청구해 결국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하지만 응징 취재로 인해 소송까지 간 경우는 10여 건이고 그중 내가 패소한 것은 딱 1번”이라고 말했다. 이 역시 항소 날짜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서울 영등포 사무실에는 스튜디오와 녹음실 등이 마련돼 있고 적잖은 직원이 일하고 있다. 이 사무실은 한 독지가가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2년 전까지 유튜브 광고 수입 50만~60만 원에 자신의 돈을 합쳐 한 달 100만 원으로 어렵게 <서울의 소리>를 운영했다고 한다. 직원 모두 자원봉사였고, 무료 기고였다. 하지만 지난해 이 사무실을 후원받아 본격적으로 유튜브를 하면서 광고 수입이 월 1000만 원, 후원자도 1,500명이 넘으면서 경영이 안정됐다고 한다. “7~8명 직원도 채용하고 취재 차량도 마련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유튜브 방송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광고를 배정하지 않자 구글 본사에 찾아가 항의해 유료광고를 실을 수 있었다.

▲ 12월 19일 <서울의 소리> 백은종 대표가 국회 앞에서 공수처 설치를 요구하는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보수정권 비판, 30여 건 고소·고발 당해

1952년생인 그는 “박근혜와 동갑으로 생일까지 같다”라고 말했다. 출신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지연·학연·혈연을 일절 따지지 않는다”라면서 “사람은 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실 백범 김구도 ‘고향을 묻지 말라’고 하긴 했다. 하지만 개인정보를 독자에게 전하는 것도 기자의 임무라 맞섰다. 그는 “언론이 그런 것을 따지니 모두 대학에 가려고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점만 시인했다.

성격상 직장을 다니지 않았고 개인사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식당도 해보고 공장도 경영해 봤다”면서 “돈도 많이 벌었지만, 돈을 잘 써 많이 모으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면서 ‘특히 198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경기 의정부에서 양 김 씨(김영삼·김대중 씨) 단일화 운동을 치열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후 ‘정치인 노무현’을 알게 되고 노사모에 가입해 활동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시도되자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정의롭고 깨끗한 집단인가’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을 시도, 그는 세상이 주목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분신자살을 시도한 이유가 뭐였나. 노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있나.

“노사모 활동을 치열하게 했고, 직접 노 대통령을 만나도 봤다. 고졸 출신이라 대통령직 수행을 못 한다고 비난받으며 탄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전날 아내와 아들을 앉혀놓고 고민을 얘기했지만 가족은 분신하리라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휘발유와 라이터를 사서 여의도 국회 앞으로 나갔다. 5시에 분신하면 저녁뉴스에 나올 것이라 계산했다. 화가 나 욱하는 심경으로 분신한 한 것이 아니라 탄핵의 부당함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 노 대통령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나는 개인 노무현보다 그 사람의 정신을 좋아한다.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그 용기와 의지가 좋다. 노무현이 응징취재를 잘할 만한 성격 아닌가, 나와 성격이 비슷하다. (웃음) 나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부모에게도 빌어본 적이 없다. 달래야 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한번 결심하면 하는 사람이다.”

-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가족이 이해하나.

“분신까지 한 나를 이해하기 쉽겠나. 게다가 매일 체포영장·소환장·테러위협까지 있는데 집에 있을 수 있나. 가족에게 위험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따로 생활한다. 다행히 아내가 생계를 맡고 아이들도 잘 키워 딸이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 요즘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간다.”

그는 무서운 것이 없는 ‘집념의 인간’으로 보였다. 그는 “분신해 죽지 않았지만, 노무현 탄핵 무효도 이루고, 이명박·박근혜 구속도 이뤘다”면서 “누가 대법원장이 구속될 것으로 생각했나”라고 말했다. 이 말은 ‘자신의 행동이 돌출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사실 그 어떤 호소력을 가진 언론도, 매우 많은 정보력을 가진 정치분석가도 이들의 구속을 주장하고 또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이런 행동은 ‘좋아했던’ 노무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풀이가 아니다. 그래서 그에게 추구하는 세상이 무엇인가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우리 아이들이 전쟁위험이 없는 한반도와 독재가 없는 나라에서 살게 하는 데 밀알이 되는 것”이라며 “나는 노령연금 25만 원만 받고도 잘살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출처  [원희복의 인물탐구]‘응징’ 언론인 백은종 “응징 기준은 국민적 상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