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그날 화성, 누가 왜 국과수 감정서를 조작했나
화성 사건, 국과수 증거조작의 재구성
화성 8차 사건, 엉뚱한 사람 옥살이
수원지검 “국과수 감정서 허위 작성”
국과수 장 실장, 음모성분 감정 도입
당시 동료 “과학적 검증 안된 분석법
국과수에서 장 실장 혼자 우겨” 증언
경찰, 국과수에 윤씨 체모 감정 의뢰
국과수, 비교 시료 바꿔치기
바꾼 수치도 임의로 가감해 조작
경찰 ‘조작 부인’, 국과수는 침묵
[한겨레] 김정필 기자 | 등록 : 2019-12-28 09:11 | 수정 : 2019-12-28 16:20
이춘재(56). 1994년 1월 13일 집에 놀러 온 처제를 강간·살해한 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다. 부산교도소에 있던 그가 지난 10일 수원구치소로 이감됐다. 수원지검 한 검사가 조사실에서 이춘재와 마주 앉았다. 그는 화성 8차 사건 범행 상황을 담담히 말로 그려냈다. 방문 앞을 가로막은 책상 위 책장, 그 책장을 넘어 책상에 발을 딛고 내려가자 갑자기 푹 꺼진 느낌의 바닥까지. 앞서 이춘재는 지난 10월 경찰 조사에서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경기도 화성시에서 총 10차례 부녀자가 강간·살해당한 화성 연쇄살인사건(이하 ‘화성 사건’)을 “전부 내가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춘재의 한마디로 세간의 관심이 화성 8차 사건에 쏠렸다. 유일하게 범인이 잡혔던, 동시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그 범인이 옥중에서 무죄를 호소했던 사건. 1988년 화성 8차 사건으로 구속기소 된 윤 아무개(당시 22살) 씨는 무기징역이 확정돼 수감생활을 하다 20년형으로 감형돼 2009년 출소했다. 윤 씨는 22살부터 교도소 생활을 시작해 42살 자유의 몸이 됐다. 교도소를 나온 그에겐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었다. 이춘재의 자백은 30년간 묻혀 있던 비극의 장막을 걷어냈다. 만기 출소 10년이 지난 어느 날 허무하게 날아온 “내가 진범”이라는 누군가의 뒤늦은 고백은, 윤 씨에겐 잔인하지만 뒤엉켜버린 30년의 실타래를 푸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화성 사건은 모두 공소시효(당시 15년)가 완성됐다. 이춘재를 법정에 세울 수는 없다. 형법으로 범죄의 성립 여부를 따지고 처벌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형법상 화성 8차 사건의 범인은 아직 윤 씨다. 이춘재의 자백은 주장일 뿐이다. 이제 윤 씨는 판결문에 새겨진 유죄의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수원지검은 윤 씨 유죄의 핵심 증거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옛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감정서가 조작된 사실을 최근 확인했다. 과학의 영역인 국과수 감정서가 조작으로 오염되면서 당시 수사와 재판 과정의 기초적인 사실 확인 작업은 느슨해져 버렸다. 혹시 드는 의구심은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숫자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그런 의심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국과수는 왜 감정서를 조작했던 것일까. 이 사건은 이 질문의 답을 찾아야 완성된다. 국과수 감정서 조작은 진실 규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한겨레>는 30년 전 경찰 수사기록 열람과 경찰·국과수·한국원자력연구원(옛 한국원자력연구소)·검찰 관계자 등의 인터뷰를 통해 화성 8차 사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구성했다. 사망, 질병, 국외 거주 사유로 일부 핵심 관계자들은 만날 수 없었고, 취재원들 요구로 증언은 익명 처리했다.
서울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1988년 9월 16일 금요일 오전 6시 50분. 화성군(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한 가정집에서 중학교 1학년 여학생 박 아무개(당시 13살) 씨가 자기 방에서 목에 멍이 들어 숨진 채 발견됐다. 진안리에서 차로 20분 거리인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 아무개(54) 씨 시신이 발견(화성 7차 사건)된 지 고작 9일 만에 추가 범죄가 발생한 것이다. 첫 화성 사건이 발생한 1986년 9월 이후 만 2년 동안 8건의 범죄가 발생하는 동안 경찰은 범인 윤곽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은 화성 8차 사건 현장의 박 씨 시신에서 용의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 10점(이하 ‘현장 음모’)을 채취했다. 사건 발생 11일 만인 9월 27일 국과수에서 넘어온 현장 음모의 혈액형 감정 결과가 B형으로 나오자, 경찰은 혈액형이 B형인 사람 중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음모를 채취해 외관상 형태가 현장 음모와 비슷한지 확인하는 방식(이하 ‘혈액·형태학적 감정’)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음모가 전부 꼬불꼬불한 형태라서 구분이 쉽지 않았고, 당시 국과수 혈액형 판정법의 정확성도 크게 떨어졌다.
“1980년대만 해도 유전자 검사가 도입되기 전이라 감정 의뢰가 오는 샘플이 누구의 것이냐는 개인식별 문제가 국과수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당시 국과수 혈액형 판정법은 ABO식(A, B, O, AB 4가지로 혈액형 분석)이라 식별력이 떨어졌다. 그 판정법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 누구 잘못이라기보다는 당시 국과수 수준이었다.” (1980년대 국과수에서 근무한 관계자 ㄱ 씨)
실제 화성 8차 사건 현장 음모의 혈액형 감정 결과는 B형으로 나왔지만 최근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한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다.
경찰 수사는 수개월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 무리한 수사가 검찰에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유력 용의자로 자백했다던 10대, 20대 남성들이 증거불충분, 자백의 신빙성 문제로 다시 풀려나는 사례가 여럿 있었다.
당시 경기도경(현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화성 사건을 비롯해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1987년 8월 경기도 용인시 오대양 공예품 공장 식당 천장에서 시체 32구가 발견됐으나 원인 규명에 실패하다 1991년 7월 사건 관계자들이 자수해 재수사)과 고문 기술자 이근안 잠적 사건(<한겨레>가 1988년 12월 김근태 씨 고문 경찰이 당시 경기도경 공안실장이었던 이근안 씨라고 보도하자 이 씨가 잠적한 사건) 등 이른바 ‘전국 경찰의 3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사건들이 관내에 겹치며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렸다. 1988년 12월 조종석 치안본부장이 화성 사건 수사본부를 방문해 “경찰의 명예를 걸고 해결하라”고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지역주민은 불안에 떨었고, 언론은 경찰 수사 문제점을 연일 비판했다.
화성 8차 사건 발생 직후인 1988년 10월부터 수사본부 인력을 잇달아 교체·보강하던 경찰은 한 달 뒤인 11월 유 아무개(현재 미국 거주) 경정을 화성경찰서 수사과장에, 조 치안본부장 방문 무렵인 12월에는 대공수사를 해왔던 최 아무개(교통사고로 사망) 순경을 화성서 수사과 형사계로 배치했다. 유 경정은 감정서를 조작한 국과수 직원과 업무 논의를 한 인물이고, 최 순경은 화성 8차 사건 조사 때 윤 씨를 폭행·고문했다고 동료 경찰들이 지목한 인물이다.
화성 8차 사건 수사팀이 재정비된 1989년 1월부터 경찰은 국과수와 논의해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범인 확인 작업에 적용하기로 한다.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이란, 시료에 방사선을 쪼여 각 성분(칼슘, 마그네슘, 티타늄 등) 함량을 측정한 뒤 다른 시료와 동일성(두 시료에서 나온 5개 이상 성분의 함량 편차가 40% 이하면 동일하다고 판단)을 확인하는 분석 방법이다.
당시 국과수에서 화성 8차 사건에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도입한 사람은 이화학3과 실장이었던 장 아무개 씨다. 화성 8차 사건의 조작된 감정서를 작성한 인물이다. 이 감정법은 지금껏 화성 8차 사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됐다. 당시 국내외 법의학 논문에도 실린 적이 없는 감정법이었다.
장 씨는 현재 뇌경색으로 병상에 누워 있어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한다. <한겨레>는 1980년대 장 씨와 비슷한 시기에 국과수에 근무했던 ㄱ 씨로부터 당시의 장 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ㄱ 씨와의 문답.
- 장씨의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기억하나?
“그때 장씨가 연구비를 받아 원자력연구원과 공동연구를 추진했다. 모발 속 원소를 측정해 개인식별 하는 방법을 도입하려 했다. 그 연구과제 연구비 지원 심사회의에 내가 들어가 굉장히 반대했다. 그거는 방법 자체가 잘못됐다.”
- 반대한 이유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 기존 연구도, 논문도 없었다. 방사성 측정은 모발이 굉장히 오랜 기간 유지됐을 때 가능하다. 고고학에서는 그런 측정 방법이 있다. 화석처럼 아주 오랜 기간 (원소가) 쌓인 것은 된다. 내가 그것은 아이디어 자체가 잘못됐다고 했는데도 (장씨가) 계속 연구하더라. 정말 심하게 반대했던 거는 정확히 기억한다.”
- 대략 언제쯤이었나?
“1986년 이전일 거다. 국과수 연보에 그 연구 결과가 실렸다.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그럴 수 없는 방법이니까. 그 연구 결과를 보고 ‘이건 틀렸는데…’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걸 정말 화성 8차 사건에 적용했다는 건가.”
- 장씨가 원자력연구원에서 온 음모 분석 결과를 임의로 조합했다.
“그분 성격이 원래 그런 편이다. 평소에도 데이터를 주물럭주물럭했다. 국과수 안에서도 장씨 혼자 우겼다.”
<한겨레> 확인 결과 장 씨는 화성 8차 사건이 윤 씨 검거(7월)로 해결된 1989년 12월 발행된 국과수 연보에 ‘모발의 개인식별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실었다. 그런데 장 씨가 원자력연구원과 공동연구한 ‘모발분석에 의한 개인식별 연구’라는 제목의 용역보고서(1991년 11월)를 보면 “모발의 방사화 분석은 (중략) 법정 적용을 위한 확고한 신뢰성과 함께 모발의 식별은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으로 윤 씨를 검거한 지 2년이 지난 보고서에서 장 씨 스스로 일부 문제 소지가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 장씨가 그렇게 무리를 할 국과수에서의 내적 동기가 무엇인가?
“당시 국과수 과장급들은 대졸 출신이 세명 정도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고졸 출신이었다. 대졸인 장씨는 물리학과 출신인데, 전공이 애매했다. 국과수에서 전문으로 맡은 검사 파트가 없었다. 그러니 고졸 출신 과장들이 장씨한테 ‘당신은 아무것도 못 하고 있냐’며 윽박지르기도 했다. 주된 역할이 없다 보니 뭐라도 하나 해야 했던 위치였다. 항상 (본인 자리의) 불안감이 좀 있었다.”
- 수치를 조작한 감정서를 국과수 결재 과정에서 윗사람이 걸러내지 못하나?
“국과수 전문 분야는 누구도 그 결과를 아규(논쟁)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감정서 쓰면 위아래 아무도 터치를 못 한다.”
장 씨는 국과수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지시로, 왜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느닷없이 화성 8차 사건에 도입했던 걸까. 경찰 의뢰로 시작되는 국과수 감정 업무 절차의 특성상 장 씨가 화성 8차 사건을 담당한 화성서 수사과장 유 경정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가 가장 큰 의문으로 남는다. 장 씨의 업무파트너였던 유 씨는 2005년 퇴직 뒤 이민을 가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다. 수원지검은 최근 귀국해 조사를 받으라고 유 씨에게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화성 8차 사건 발생 이후 그해 연말까지도 범인 검거에 실패한 경찰은 이듬해인 1989년 1월부터 음모의 혈액·형태학적 감정에서 유사한 것으로 판명된 용의자들의 음모를 추려낸 뒤, 추가로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시행해 동일성 여부를 확인하기로 한다. 당시 음모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장비는 원자력연구원에만 있었다. 이 때문에 ①경찰이 채취한 용의자들의 음모를 국과수에 감정 의뢰하면 ②국과수는 원자력연구원에 음모의 성분 분석을 맡기고 ③원자력연구원이 분석 결과를 국과수에 보내면 ④국과수가 감정서를 작성해 ⑤경찰에 회신하는 구조로 일이 진행됐다.
1989년 1월 말에서 2월 초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 의뢰와 회신이 경찰·국과수·원자력연구원 사이에서 처음 오간다. 3월 말까지도 몇 차례 감정이 이뤄지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 무렵 대공수사 전문인 최 순경이 태안읍 주변을 탐문하다 한 여성으로부터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수상하다는 제보를 받는다. 당시 화성서 수사과장 유 경정의 전임이었던 이 아무개 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최 순경 본인 말로는, 화성 8차 사건 범인을 검거하면 특진을 시켜주겠다는 윗선 제안을 받고 수사팀에 합류했다고 한다. 최 순경으로부터 윤 씨를 검거한 경위를 들은 적이 있다. 텔레비전에 화성 8차 사건 뉴스가 나오면 깜짝깜짝 놀라거나 갑자기 음료수를 들이켜는가 하면, 변소에서도 해당 기사가 있는 신문만 본다며 어느 집 주인아주머니가 윤 씨를 용의자로 가리켰다고 했다”고 말했다.
최 순경은 4월 8일 윤 씨가 일하는 곳을 찾아가 윤 씨와 동료 두 명의 음모를 채취하지만, 국과수에 감정 의뢰를 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 순경은 윤 씨를 유력 용의자로 꼽지는 않았다. 그런데 5월 초 최 순경은 현장 음모 성분 중 티타늄 함량이 높다는 감정 결과에 주목한다. 수원 쪽 한 대학교 식품가공학과 교수를 만나서는 관련 문헌을 찾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최 순경은 티타늄 성분을 자주 사용할 만한 공장 등을 돌며 윤 씨 등 총 47명의 음모를 다시 채취해 5월 9일 혈액·형태학적 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한다.
그리고 얼마 뒤 최 순경은 수원 쪽 다른 대학교 식품가공학과 양 아무개 교수를 면담한다. 양 교수는 “보통 사람은 극미량이 들어 있는 티타늄이 높게 검출된 건 환경적 요인이다. 그 성분을 사용하는 곳은 합금이나 용접봉 등을 사용하는 공장일 가능성이 크다. 또 나트륨·염소가 다량 검출된 것은 잘 씻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고 말했다.
최 순경은 양 교수가 언급한 조건에 들어맞는 용의자들을 집중적으로 탐문하며 수시로 수사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러는 사이 앞서 5월 9일 국과수에 의뢰했던 용의자 47명의 혈액·형태학적 감정 결과가 6월 20일 경찰에 도착한다. 윤 씨 등 두 명의 음모가 B형이고 현장 음모와 모양이 유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경찰 내부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경찰은 6월 26일 윤 씨 음모를 다시 채취해 사흘 뒤인 29일 윤 씨 등 용의자 11명 음모의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의뢰하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윤 씨 음모만 대상에서 제외한다. 경찰이 작성한 ‘음모 감정 대상자 명단’에는 윤 씨 이름에 지움 표시(〓)가 돼 있고 화성서 수사과장 유 씨 도장이 찍혀 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 내부 기안 문서까지만 해도 윤 씨 이름이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할 때 갑자기 빠졌다”고 말했다. 윤 씨 재심사건을 맡은 공동변호인단 쪽 박준영 변호사는 “아마도 6월 20일부터 경찰이 윤 씨를 유력 용의자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음모의 혈액·형태학적 감정이 유사하다는 국과수 감정서를 받아들고서도, 그것 때문에 윤 씨 음모를 곧장 다시 채취하고서도, 그의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추가로 의뢰하지 않고 있던 경찰은 20여 일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7월 18일 이상하게 윤 씨 음모를 다시 채취한다. 그러고는 윤 씨 음모만을 별도로 국과수에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맡긴다. 국과수는 원자력연구원 분석 결과를 받아 7월 24일 두 쪽짜리 감정서를 작성한다.
국과수 이화학3과 실장 장 씨는 감정서에 ‘현장 음모와 윤 씨 음모는 동일인 음모로 볼 수 있음’이라고 썼다. 이 감정서를 근거로 경찰은 윤 씨를 체포·조사해 자백을 받은 뒤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윤 씨를 살인·강간치사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법원은 윤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국과수 감정서 발급(7월 24일)부터 1심 무기징역 선고(10월 20일)까지 우리 형사사법 시스템이 윤 씨를 무기수로 결론짓는 데는 채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30년이 지나 이 국과수 감정서는 허위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원지검은 지난 23일 1989년 7월 24일 치 국과수 감정서에 사용된 현장 음모와 윤 씨 음모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결과는 다른 사람 두 명의 음모 수치를 갖다 쓴 것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이들 음모 성분 수치도 최대한 비슷하게 나오도록 조작됐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보면, 현장 음모 성분 수치는 원자력연구원이 분석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 가동할 때 테스트용으로 쓰는 일반인 음모의 성분 수치였고, 윤 씨 음모 성분 수치는 다른 용의자의 것이었다. 더군다나 엉뚱한 두 사람의 음모 성분 수치도 편차가 크게 나는 경우 큰 수치는 낮추고 낮은 수치는 높이는 방법으로 두 음모 수치가 비슷하도록 임의로 가감해 편차를 줄였다.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원자력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측정값 옆에 오차 범위를 표시하지 않고, 오차 범위 중 상한값, 하한값 어느 하나만 쓰는 행위를 두고는, 어느 통계학자라도 같은 평가를 할 것이다.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과학이라는 외피를 두른 두 쪽짜리 조작된 허위 국과수 감정서 앞에 당시 화성 8차 사건을 수사한 경찰을 지휘했던 최 아무개 검사(현 변호사) 역시 무기력했다. 당시 최 검사는 경찰 현장검증에 동행한 데 이어 검찰로 사건이 송치된 후에도 이례적으로 직접 현장검증에 나섰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윤 씨가 범행 현장에서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책상 위 책장을 넘어가기 쉽지 않은 점 등 윤 씨의 범행을 배척할 만한 현장 정황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모두 무시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9일 검찰 조사에서 최 변호사는 “당시 너무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한다는 검찰 내부 의견과 함께 보강 수사의 필요성이 있어 약식으로 현장검증을 추가로 했다”고 진술했다.
수원지검은 지난 23일 국과수 감정서 조작 사실을 발표하며 “사건의 종국 처분은 검사가 한다. 수사 검사가 감정서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과오가 있는 것은 맞다. 최 변호사 조사 결과 국과수 감정 결과가 일치한다고 하니 그것을 믿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긴 했지만 (조작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현재 부산에 있는 최 변호사 사무실의 한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최 변호사가 화성 8차 사건 관련 문제로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입장을 밝히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 변호사가 법률정보 포털서비스 ‘로앤비’에 올린 본인 정보 중 기고 논문 항목에는 지금도 ‘모발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에 의한 식별(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해결)’이란 제목의 논문명이 기재돼 있다. 정말 그는 조작을 알지 못했을까?
‘하나. 우리는 오로지 과학적 진실만을 추구한다.’(국과수 윤리헌장)
국과수는 1986년 9월 1일 직원들의 직무 철학을 담은 과수인의 선서를 제정했다. 이 선서는 ‘언제 어디서나 진리만을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과수인이 된다’는 다짐부터 시작한다.
진실만을 추구하고, 진리만을 사랑한다는 국과수는 이제 30년 전 국과수에 물어야 한다. 과연 그때의 진실이 무엇이었냐고.
어긋난 진실의 조각을 다시 끼워 맞춰야 하는 화성 8차 사건의 한복판으로 소환된 국과수는 지금 침묵하고 있다. ‘허위 감정서 작성’이란 얼룩은 30년 전 한낱 조작의 추억으로 외면하고 침묵한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진상 규명과 반성 없이는 신뢰 회복도 없다.
국과수 대외협력 쪽 한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당시 조작이나 오류 등에 관해 현재로서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공식 입장이 없다. (그때와 관련된) 실험 데이터는 국과수 원장이나 담당 부서가 설명할 계획이다. 언제 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 17일 수사상황 브리핑에서 “국과수 감정인이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조작이 아니라 오류라고 보고 있다. 잘못을 알고 저지른 것(조작)이 아니라 잘못을 모르고 실수한 것(오류)이라고 주장한다.
국과수 감정인의 단순 오류라면 이 사건은 더는 진상 규명할 부분이 없다. 하지만 의혹의 핵심 인물들인 국과수 감정인 장 씨와 화성서 수사과장 유 씨는 아직 입을 열지 않았다.
국과수 감정 업무를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현장 음모 성분 수치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꾸고, 윤 씨 음모 수치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꾸고, 그 바꿔치기한 두 사람의 음모 수치를 임의로 가감하는 세 가지 실수를 동시에 저지르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제 윤 씨의 재심 청구에 법원이 응답할 시간이다. 국과수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된 것은 화성 8차 사건 법정에서다. 만약 30년 전 윤 씨의 범행이 누군가에 의해 지어낸 이야기라면, 그 거짓에 속아 윤 씨의 20년 세월을 교도소 담장으로 가두라고 최종 결정을 한 곳도 역시 법원이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기엔 너무 많은 증거가 ‘거짓’을 향하고 있다. 윤 씨는 지난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며 자필로 쓴 입장문을 읽었다.
“저는 무죄입니다.”
출처 30년 전 그날 화성, 누가 왜 국과수 감정서를 조작했나
화성 사건, 국과수 증거조작의 재구성
화성 8차 사건, 엉뚱한 사람 옥살이
수원지검 “국과수 감정서 허위 작성”
국과수 장 실장, 음모성분 감정 도입
당시 동료 “과학적 검증 안된 분석법
국과수에서 장 실장 혼자 우겨” 증언
경찰, 국과수에 윤씨 체모 감정 의뢰
국과수, 비교 시료 바꿔치기
바꾼 수치도 임의로 가감해 조작
경찰 ‘조작 부인’, 국과수는 침묵
[한겨레] 김정필 기자 | 등록 : 2019-12-28 09:11 | 수정 : 2019-12-28 16:20
▲ 1989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여덟 번째 범인으로 지목된 윤 아무개 씨. 그는 그해 구속수감돼 20~30대를 꼬박 교도소에서 지냈다. 옥중에선 늘 누군가를 향해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 그의 호소는 교도소 담장을 넘지 못했다. 22살에 강간·살인죄로 단 수인번호는 42살 만기 출소하며 뗄 수 있었다. 출소 후에도 10년이 흘렀다. 억울함을 세월에 묻고 지낼 무렵, 진범이라는 사람이 자백하고 나섰다. 윤 씨는 지난달 13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수원지검은 과거 법원이 윤 씨의 범죄를 유죄로 판단할 때 핵심 증거로 삼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서가 허위로 작성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최근 밝혔다. 국과수 감정관이 수치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깨고 감정서를 조작한 것이다. 과학 증거라는 신화 앞에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교묘히 조작된 숫자에 속아 넘어갔다. 30년 전 그날, 화성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진은 1988년 화성 8차 살인사건 당시 경찰이 현장검증을 하는 모습(왼쪽), 윤 씨를 범인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근거가 된 1989년 국과수 감정서. 글 김정필 기자, 그래픽 박향미 기자, 사진 <시사저널> 제공
이춘재(56). 1994년 1월 13일 집에 놀러 온 처제를 강간·살해한 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다. 부산교도소에 있던 그가 지난 10일 수원구치소로 이감됐다. 수원지검 한 검사가 조사실에서 이춘재와 마주 앉았다. 그는 화성 8차 사건 범행 상황을 담담히 말로 그려냈다. 방문 앞을 가로막은 책상 위 책장, 그 책장을 넘어 책상에 발을 딛고 내려가자 갑자기 푹 꺼진 느낌의 바닥까지. 앞서 이춘재는 지난 10월 경찰 조사에서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경기도 화성시에서 총 10차례 부녀자가 강간·살해당한 화성 연쇄살인사건(이하 ‘화성 사건’)을 “전부 내가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춘재의 한마디로 세간의 관심이 화성 8차 사건에 쏠렸다. 유일하게 범인이 잡혔던, 동시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그 범인이 옥중에서 무죄를 호소했던 사건. 1988년 화성 8차 사건으로 구속기소 된 윤 아무개(당시 22살) 씨는 무기징역이 확정돼 수감생활을 하다 20년형으로 감형돼 2009년 출소했다. 윤 씨는 22살부터 교도소 생활을 시작해 42살 자유의 몸이 됐다. 교도소를 나온 그에겐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없었다. 이춘재의 자백은 30년간 묻혀 있던 비극의 장막을 걷어냈다. 만기 출소 10년이 지난 어느 날 허무하게 날아온 “내가 진범”이라는 누군가의 뒤늦은 고백은, 윤 씨에겐 잔인하지만 뒤엉켜버린 30년의 실타래를 푸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화성 사건은 모두 공소시효(당시 15년)가 완성됐다. 이춘재를 법정에 세울 수는 없다. 형법으로 범죄의 성립 여부를 따지고 처벌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형법상 화성 8차 사건의 범인은 아직 윤 씨다. 이춘재의 자백은 주장일 뿐이다. 이제 윤 씨는 판결문에 새겨진 유죄의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수원지검은 윤 씨 유죄의 핵심 증거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옛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감정서가 조작된 사실을 최근 확인했다. 과학의 영역인 국과수 감정서가 조작으로 오염되면서 당시 수사와 재판 과정의 기초적인 사실 확인 작업은 느슨해져 버렸다. 혹시 드는 의구심은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숫자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그런 의심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국과수는 왜 감정서를 조작했던 것일까. 이 사건은 이 질문의 답을 찾아야 완성된다. 국과수 감정서 조작은 진실 규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한겨레>는 30년 전 경찰 수사기록 열람과 경찰·국과수·한국원자력연구원(옛 한국원자력연구소)·검찰 관계자 등의 인터뷰를 통해 화성 8차 사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구성했다. 사망, 질병, 국외 거주 사유로 일부 핵심 관계자들은 만날 수 없었고, 취재원들 요구로 증언은 익명 처리했다.
벼랑 끝 몰린 경기도경
서울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1988년 9월 16일 금요일 오전 6시 50분. 화성군(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한 가정집에서 중학교 1학년 여학생 박 아무개(당시 13살) 씨가 자기 방에서 목에 멍이 들어 숨진 채 발견됐다. 진안리에서 차로 20분 거리인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 아무개(54) 씨 시신이 발견(화성 7차 사건)된 지 고작 9일 만에 추가 범죄가 발생한 것이다. 첫 화성 사건이 발생한 1986년 9월 이후 만 2년 동안 8건의 범죄가 발생하는 동안 경찰은 범인 윤곽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은 화성 8차 사건 현장의 박 씨 시신에서 용의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 10점(이하 ‘현장 음모’)을 채취했다. 사건 발생 11일 만인 9월 27일 국과수에서 넘어온 현장 음모의 혈액형 감정 결과가 B형으로 나오자, 경찰은 혈액형이 B형인 사람 중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음모를 채취해 외관상 형태가 현장 음모와 비슷한지 확인하는 방식(이하 ‘혈액·형태학적 감정’)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음모가 전부 꼬불꼬불한 형태라서 구분이 쉽지 않았고, 당시 국과수 혈액형 판정법의 정확성도 크게 떨어졌다.
“1980년대만 해도 유전자 검사가 도입되기 전이라 감정 의뢰가 오는 샘플이 누구의 것이냐는 개인식별 문제가 국과수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당시 국과수 혈액형 판정법은 ABO식(A, B, O, AB 4가지로 혈액형 분석)이라 식별력이 떨어졌다. 그 판정법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 누구 잘못이라기보다는 당시 국과수 수준이었다.” (1980년대 국과수에서 근무한 관계자 ㄱ 씨)
실제 화성 8차 사건 현장 음모의 혈액형 감정 결과는 B형으로 나왔지만 최근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한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다.
경찰 수사는 수개월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 무리한 수사가 검찰에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유력 용의자로 자백했다던 10대, 20대 남성들이 증거불충분, 자백의 신빙성 문제로 다시 풀려나는 사례가 여럿 있었다.
당시 경기도경(현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화성 사건을 비롯해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1987년 8월 경기도 용인시 오대양 공예품 공장 식당 천장에서 시체 32구가 발견됐으나 원인 규명에 실패하다 1991년 7월 사건 관계자들이 자수해 재수사)과 고문 기술자 이근안 잠적 사건(<한겨레>가 1988년 12월 김근태 씨 고문 경찰이 당시 경기도경 공안실장이었던 이근안 씨라고 보도하자 이 씨가 잠적한 사건) 등 이른바 ‘전국 경찰의 3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사건들이 관내에 겹치며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렸다. 1988년 12월 조종석 치안본부장이 화성 사건 수사본부를 방문해 “경찰의 명예를 걸고 해결하라”고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지역주민은 불안에 떨었고, 언론은 경찰 수사 문제점을 연일 비판했다.
화성 8차 사건 발생 직후인 1988년 10월부터 수사본부 인력을 잇달아 교체·보강하던 경찰은 한 달 뒤인 11월 유 아무개(현재 미국 거주) 경정을 화성경찰서 수사과장에, 조 치안본부장 방문 무렵인 12월에는 대공수사를 해왔던 최 아무개(교통사고로 사망) 순경을 화성서 수사과 형사계로 배치했다. 유 경정은 감정서를 조작한 국과수 직원과 업무 논의를 한 인물이고, 최 순경은 화성 8차 사건 조사 때 윤 씨를 폭행·고문했다고 동료 경찰들이 지목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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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국과수에서 생긴 일
화성 8차 사건 수사팀이 재정비된 1989년 1월부터 경찰은 국과수와 논의해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범인 확인 작업에 적용하기로 한다.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이란, 시료에 방사선을 쪼여 각 성분(칼슘, 마그네슘, 티타늄 등) 함량을 측정한 뒤 다른 시료와 동일성(두 시료에서 나온 5개 이상 성분의 함량 편차가 40% 이하면 동일하다고 판단)을 확인하는 분석 방법이다.
당시 국과수에서 화성 8차 사건에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도입한 사람은 이화학3과 실장이었던 장 아무개 씨다. 화성 8차 사건의 조작된 감정서를 작성한 인물이다. 이 감정법은 지금껏 화성 8차 사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됐다. 당시 국내외 법의학 논문에도 실린 적이 없는 감정법이었다.
장 씨는 현재 뇌경색으로 병상에 누워 있어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한다. <한겨레>는 1980년대 장 씨와 비슷한 시기에 국과수에 근무했던 ㄱ 씨로부터 당시의 장 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ㄱ 씨와의 문답.
- 장씨의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기억하나?
“그때 장씨가 연구비를 받아 원자력연구원과 공동연구를 추진했다. 모발 속 원소를 측정해 개인식별 하는 방법을 도입하려 했다. 그 연구과제 연구비 지원 심사회의에 내가 들어가 굉장히 반대했다. 그거는 방법 자체가 잘못됐다.”
- 반대한 이유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 기존 연구도, 논문도 없었다. 방사성 측정은 모발이 굉장히 오랜 기간 유지됐을 때 가능하다. 고고학에서는 그런 측정 방법이 있다. 화석처럼 아주 오랜 기간 (원소가) 쌓인 것은 된다. 내가 그것은 아이디어 자체가 잘못됐다고 했는데도 (장씨가) 계속 연구하더라. 정말 심하게 반대했던 거는 정확히 기억한다.”
- 대략 언제쯤이었나?
“1986년 이전일 거다. 국과수 연보에 그 연구 결과가 실렸다.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그럴 수 없는 방법이니까. 그 연구 결과를 보고 ‘이건 틀렸는데…’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걸 정말 화성 8차 사건에 적용했다는 건가.”
- 장씨가 원자력연구원에서 온 음모 분석 결과를 임의로 조합했다.
“그분 성격이 원래 그런 편이다. 평소에도 데이터를 주물럭주물럭했다. 국과수 안에서도 장씨 혼자 우겼다.”
<한겨레> 확인 결과 장 씨는 화성 8차 사건이 윤 씨 검거(7월)로 해결된 1989년 12월 발행된 국과수 연보에 ‘모발의 개인식별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연구 결과를 실었다. 그런데 장 씨가 원자력연구원과 공동연구한 ‘모발분석에 의한 개인식별 연구’라는 제목의 용역보고서(1991년 11월)를 보면 “모발의 방사화 분석은 (중략) 법정 적용을 위한 확고한 신뢰성과 함께 모발의 식별은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으로 윤 씨를 검거한 지 2년이 지난 보고서에서 장 씨 스스로 일부 문제 소지가 있을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 장씨가 그렇게 무리를 할 국과수에서의 내적 동기가 무엇인가?
“당시 국과수 과장급들은 대졸 출신이 세명 정도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고졸 출신이었다. 대졸인 장씨는 물리학과 출신인데, 전공이 애매했다. 국과수에서 전문으로 맡은 검사 파트가 없었다. 그러니 고졸 출신 과장들이 장씨한테 ‘당신은 아무것도 못 하고 있냐’며 윽박지르기도 했다. 주된 역할이 없다 보니 뭐라도 하나 해야 했던 위치였다. 항상 (본인 자리의) 불안감이 좀 있었다.”
- 수치를 조작한 감정서를 국과수 결재 과정에서 윗사람이 걸러내지 못하나?
“국과수 전문 분야는 누구도 그 결과를 아규(논쟁)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감정서 쓰면 위아래 아무도 터치를 못 한다.”
검증 안 된 감정법
장 씨는 국과수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지시로, 왜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느닷없이 화성 8차 사건에 도입했던 걸까. 경찰 의뢰로 시작되는 국과수 감정 업무 절차의 특성상 장 씨가 화성 8차 사건을 담당한 화성서 수사과장 유 경정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가 가장 큰 의문으로 남는다. 장 씨의 업무파트너였던 유 씨는 2005년 퇴직 뒤 이민을 가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다. 수원지검은 최근 귀국해 조사를 받으라고 유 씨에게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화성 8차 사건 발생 이후 그해 연말까지도 범인 검거에 실패한 경찰은 이듬해인 1989년 1월부터 음모의 혈액·형태학적 감정에서 유사한 것으로 판명된 용의자들의 음모를 추려낸 뒤, 추가로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시행해 동일성 여부를 확인하기로 한다. 당시 음모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장비는 원자력연구원에만 있었다. 이 때문에 ①경찰이 채취한 용의자들의 음모를 국과수에 감정 의뢰하면 ②국과수는 원자력연구원에 음모의 성분 분석을 맡기고 ③원자력연구원이 분석 결과를 국과수에 보내면 ④국과수가 감정서를 작성해 ⑤경찰에 회신하는 구조로 일이 진행됐다.
1989년 1월 말에서 2월 초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 의뢰와 회신이 경찰·국과수·원자력연구원 사이에서 처음 오간다. 3월 말까지도 몇 차례 감정이 이뤄지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 무렵 대공수사 전문인 최 순경이 태안읍 주변을 탐문하다 한 여성으로부터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수상하다는 제보를 받는다. 당시 화성서 수사과장 유 경정의 전임이었던 이 아무개 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최 순경 본인 말로는, 화성 8차 사건 범인을 검거하면 특진을 시켜주겠다는 윗선 제안을 받고 수사팀에 합류했다고 한다. 최 순경으로부터 윤 씨를 검거한 경위를 들은 적이 있다. 텔레비전에 화성 8차 사건 뉴스가 나오면 깜짝깜짝 놀라거나 갑자기 음료수를 들이켜는가 하면, 변소에서도 해당 기사가 있는 신문만 본다며 어느 집 주인아주머니가 윤 씨를 용의자로 가리켰다고 했다”고 말했다.
최 순경은 4월 8일 윤 씨가 일하는 곳을 찾아가 윤 씨와 동료 두 명의 음모를 채취하지만, 국과수에 감정 의뢰를 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최 순경은 윤 씨를 유력 용의자로 꼽지는 않았다. 그런데 5월 초 최 순경은 현장 음모 성분 중 티타늄 함량이 높다는 감정 결과에 주목한다. 수원 쪽 한 대학교 식품가공학과 교수를 만나서는 관련 문헌을 찾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최 순경은 티타늄 성분을 자주 사용할 만한 공장 등을 돌며 윤 씨 등 총 47명의 음모를 다시 채취해 5월 9일 혈액·형태학적 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한다.
그리고 얼마 뒤 최 순경은 수원 쪽 다른 대학교 식품가공학과 양 아무개 교수를 면담한다. 양 교수는 “보통 사람은 극미량이 들어 있는 티타늄이 높게 검출된 건 환경적 요인이다. 그 성분을 사용하는 곳은 합금이나 용접봉 등을 사용하는 공장일 가능성이 크다. 또 나트륨·염소가 다량 검출된 것은 잘 씻지 않는 사람일 수 있다”고 말했다.
▲ 이진동 수원지검 2차장검사가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검 브리핑실에서 열린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국과수 감정서 조작과 관련해 모니터를 가리키며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멋대로 가공된 감정서 수치
최 순경은 양 교수가 언급한 조건에 들어맞는 용의자들을 집중적으로 탐문하며 수시로 수사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러는 사이 앞서 5월 9일 국과수에 의뢰했던 용의자 47명의 혈액·형태학적 감정 결과가 6월 20일 경찰에 도착한다. 윤 씨 등 두 명의 음모가 B형이고 현장 음모와 모양이 유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경찰 내부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경찰은 6월 26일 윤 씨 음모를 다시 채취해 사흘 뒤인 29일 윤 씨 등 용의자 11명 음모의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의뢰하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윤 씨 음모만 대상에서 제외한다. 경찰이 작성한 ‘음모 감정 대상자 명단’에는 윤 씨 이름에 지움 표시(〓)가 돼 있고 화성서 수사과장 유 씨 도장이 찍혀 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 내부 기안 문서까지만 해도 윤 씨 이름이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할 때 갑자기 빠졌다”고 말했다. 윤 씨 재심사건을 맡은 공동변호인단 쪽 박준영 변호사는 “아마도 6월 20일부터 경찰이 윤 씨를 유력 용의자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음모의 혈액·형태학적 감정이 유사하다는 국과수 감정서를 받아들고서도, 그것 때문에 윤 씨 음모를 곧장 다시 채취하고서도, 그의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추가로 의뢰하지 않고 있던 경찰은 20여 일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7월 18일 이상하게 윤 씨 음모를 다시 채취한다. 그러고는 윤 씨 음모만을 별도로 국과수에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을 맡긴다. 국과수는 원자력연구원 분석 결과를 받아 7월 24일 두 쪽짜리 감정서를 작성한다.
국과수 이화학3과 실장 장 씨는 감정서에 ‘현장 음모와 윤 씨 음모는 동일인 음모로 볼 수 있음’이라고 썼다. 이 감정서를 근거로 경찰은 윤 씨를 체포·조사해 자백을 받은 뒤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윤 씨를 살인·강간치사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법원은 윤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국과수 감정서 발급(7월 24일)부터 1심 무기징역 선고(10월 20일)까지 우리 형사사법 시스템이 윤 씨를 무기수로 결론짓는 데는 채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30년이 지나 이 국과수 감정서는 허위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원지검은 지난 23일 1989년 7월 24일 치 국과수 감정서에 사용된 현장 음모와 윤 씨 음모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결과는 다른 사람 두 명의 음모 수치를 갖다 쓴 것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이들 음모 성분 수치도 최대한 비슷하게 나오도록 조작됐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보면, 현장 음모 성분 수치는 원자력연구원이 분석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 가동할 때 테스트용으로 쓰는 일반인 음모의 성분 수치였고, 윤 씨 음모 성분 수치는 다른 용의자의 것이었다. 더군다나 엉뚱한 두 사람의 음모 성분 수치도 편차가 크게 나는 경우 큰 수치는 낮추고 낮은 수치는 높이는 방법으로 두 음모 수치가 비슷하도록 임의로 가감해 편차를 줄였다.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원자력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측정값 옆에 오차 범위를 표시하지 않고, 오차 범위 중 상한값, 하한값 어느 하나만 쓰는 행위를 두고는, 어느 통계학자라도 같은 평가를 할 것이다.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과학이라는 외피를 두른 두 쪽짜리 조작된 허위 국과수 감정서 앞에 당시 화성 8차 사건을 수사한 경찰을 지휘했던 최 아무개 검사(현 변호사) 역시 무기력했다. 당시 최 검사는 경찰 현장검증에 동행한 데 이어 검찰로 사건이 송치된 후에도 이례적으로 직접 현장검증에 나섰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윤 씨가 범행 현장에서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책상 위 책장을 넘어가기 쉽지 않은 점 등 윤 씨의 범행을 배척할 만한 현장 정황들이 여럿 있었음에도 모두 무시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9일 검찰 조사에서 최 변호사는 “당시 너무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한다는 검찰 내부 의견과 함께 보강 수사의 필요성이 있어 약식으로 현장검증을 추가로 했다”고 진술했다.
수원지검은 지난 23일 국과수 감정서 조작 사실을 발표하며 “사건의 종국 처분은 검사가 한다. 수사 검사가 감정서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과오가 있는 것은 맞다. 최 변호사 조사 결과 국과수 감정 결과가 일치한다고 하니 그것을 믿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긴 했지만 (조작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현재 부산에 있는 최 변호사 사무실의 한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최 변호사가 화성 8차 사건 관련 문제로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입장을 밝히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 변호사가 법률정보 포털서비스 ‘로앤비’에 올린 본인 정보 중 기고 논문 항목에는 지금도 ‘모발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에 의한 식별(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해결)’이란 제목의 논문명이 기재돼 있다. 정말 그는 조작을 알지 못했을까?
▲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돼 20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한 뒤 출소한 윤아무개씨의 공동변호인단 박준영 변호사(오른쪽 둘째)가 지난달 13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기자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과수의 30년 침묵
‘하나. 우리는 오로지 과학적 진실만을 추구한다.’(국과수 윤리헌장)
국과수는 1986년 9월 1일 직원들의 직무 철학을 담은 과수인의 선서를 제정했다. 이 선서는 ‘언제 어디서나 진리만을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과수인이 된다’는 다짐부터 시작한다.
진실만을 추구하고, 진리만을 사랑한다는 국과수는 이제 30년 전 국과수에 물어야 한다. 과연 그때의 진실이 무엇이었냐고.
어긋난 진실의 조각을 다시 끼워 맞춰야 하는 화성 8차 사건의 한복판으로 소환된 국과수는 지금 침묵하고 있다. ‘허위 감정서 작성’이란 얼룩은 30년 전 한낱 조작의 추억으로 외면하고 침묵한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진상 규명과 반성 없이는 신뢰 회복도 없다.
국과수 대외협력 쪽 한 관계자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당시 조작이나 오류 등에 관해 현재로서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공식 입장이 없다. (그때와 관련된) 실험 데이터는 국과수 원장이나 담당 부서가 설명할 계획이다. 언제 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지난 17일 수사상황 브리핑에서 “국과수 감정인이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조작이 아니라 오류라고 보고 있다. 잘못을 알고 저지른 것(조작)이 아니라 잘못을 모르고 실수한 것(오류)이라고 주장한다.
국과수 감정인의 단순 오류라면 이 사건은 더는 진상 규명할 부분이 없다. 하지만 의혹의 핵심 인물들인 국과수 감정인 장 씨와 화성서 수사과장 유 씨는 아직 입을 열지 않았다.
국과수 감정 업무를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현장 음모 성분 수치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꾸고, 윤 씨 음모 수치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바꾸고, 그 바꿔치기한 두 사람의 음모 수치를 임의로 가감하는 세 가지 실수를 동시에 저지르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제 윤 씨의 재심 청구에 법원이 응답할 시간이다. 국과수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된 것은 화성 8차 사건 법정에서다. 만약 30년 전 윤 씨의 범행이 누군가에 의해 지어낸 이야기라면, 그 거짓에 속아 윤 씨의 20년 세월을 교도소 담장으로 가두라고 최종 결정을 한 곳도 역시 법원이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기엔 너무 많은 증거가 ‘거짓’을 향하고 있다. 윤 씨는 지난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며 자필로 쓴 입장문을 읽었다.
“저는 무죄입니다.”
출처 30년 전 그날 화성, 누가 왜 국과수 감정서를 조작했나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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